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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5일 목요일

명심보감 明心寶鑑




도서명 : 명심보감 明心寶鑑
지은이 : 범입본
옮긴이 : 조기영
분야 : 인문 > 철학 > 동양고전 > 명심보감
출간일 : 2009년 9월 18일
ISBN : 978-89-6406-219-7
가격 : 18,000원
규격 : A5    제본 : 양장본    쪽 : 291쪽


☑200자 핵심요약

≪명심보감≫의 여러 판본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청주본을 완역했다. 그동안 ≪명심보감≫의 편찬자는 추적(秋適)으로 알려져 왔는데, 청주본이 등장하면서 범입본이 편찬자임이 밝혀졌다. 불교 관련 내용이 거의 누락되어 있는 초략본과는 달리 완본인 청주본은 유교·불교·도교의 내용을 아우르고 있어 동양사상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1000개가 넘는 상세한 주석을 통해 다른 중국 고전과 ≪명심보감≫의 다른 판본과의 비교를 꾀했다.


☑ 책 소개

유·불·도를 아우르는 전통적인 동양 사상의 진면목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초학 입문용 교재로 손꼽히는 ≪명심보감≫은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과 삶의 호흡을 같이하는 고전이다. 단순히 쉬운 문장들로 구성되어 한문 학습을 돕는 역할만 했다면 그 위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간결한 문장 안에 담긴 선인들의 보배로운 말과 글은 인격 수양을 돕고, 나아가 인생의 잠언으로 두고두고 숙독되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현인들의 지혜는 유교·불교·도교 등의 내용을 아우르고 있어 전통적인 동양 사상의 진면목을 잘 보여준다. 어느 한편의 사상에 치우치지 않고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도덕을 강조하고, 인간 본연의 착한 심성을 강조하며, 지족(知足)과 겸양의 덕성을 가져야 한다는 명언은 경세(經世)를 위한 수양서이자 제세에 필요한 교훈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서양어로 번역된 최초의 동양 고전
국내에만도 수십 종에 이르는 판본이 전하는 ≪명심보감≫은 1393년에 편찬된 이래 각국에 널리 소개되었다. 베트남이나 일본 등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네덜란드어나 독일어로 번역되어 서구에까지 유입되었다. 동양 문헌 최초로 서양어로 번역된 것이다. 선교를 위해, 중국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명심보감≫에 관심을 가졌던 서양인 선교사는 중국인에게 성서와 같은 존재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보다 원전에 가까운 판본, 청주본 ≪명심보감≫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 고려 충렬왕 때의 명신(名臣) 추척(秋適)의 저작으로 알려졌던 것과 달리, ≪명심보감≫은 명나라 학자인 범입본(范立本)의 저작이다. 이는 본서에서 저본으로 삼은 청주본이 소개되면서 밝혀진 사실이다. 청주본은 우리나라 최초의 판각본이자 중국의 원본을 가장 충실하게 옮긴 판본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수십 종의 판본은 판각을 거듭하면서 시대와 상황에 맞게 그 모습을 달리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로 유교 이념이 중시되던 시기에 간행된 초략본에는 불교 관련 내용이 거의 누락되어 있다.

1000개가 넘는 상세한 주석
발문(跋文)에서 밝히다시피 ≪명심보감≫은 “넓게 경전을 고찰하고 중요한 말을 가려 모아서 20편으로 나누어 만든 것”이다. 때문에 여러 경전에서 인용한 글이 많다. 옮긴이는 1000개가 넘는 상세한 각주를 통해 ≪명심보감≫이 담고 있는 명구와 다른 경전에 담겨 있는 같은 내용의 글의 차이를 비교한다. 아울러 청주본 외에 다른 판본에서 쓰이는 실례를 들어 판본 사이의 비교도 충실히 해내고 있다.


☑ 책 속으로

三點如星象
橫鉤似月斜.
披毛從此得
作佛也由他.

세 개의 작은 점은 별 모양과 같으며,
가로 그은 필획은 초승달을 닮았도다.
머리 풀어헤친 신선도 이로부터 얻고,
부처가 되는 길도 저것에 말미암도다.


☑ 지은이 소개

범입본(范立本, 1393~1454)

원나라 말기에 출생한 명나라 사람으로 자가 종도(從道)다. 그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으나, 주로 활동한 시기는 명나라 초기일 것이며, 정계에 진출하기보다 지방 향촌이나 산림에 은거하여 후학들을 교육하고 저술 활동을 하면서 일생을 마친 일사(逸士)로 추정된다. 그가 편찬한 ≪명심보감≫은 명나라의 사회적 신분이 높은 상류 지식층에서 주목했고, 명나라 황제들이 사특한 종교를 배척하고 부패한 정치를 바로잡기에 적합한 양서로 인정하고 편찬했다. 그만큼 그는 사상적 편중에서 벗어나 중세 중국의 지성과 인륜도덕,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혼자 노력하고 헌신했던 인물이라 하겠다.


☑ 옮긴이 소개

조기영

강원대 사범대학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홍만종 시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하서 김인후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도회 한문연수원과 중앙승가대학 불전국역연구원 등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권우 홍찬유 선생과 연민 이가원 선생으로부터 지어재(之於齋)와 인재(仁齋)라는 아호를 받았다. 연세대 국학연구원과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했으며, 연세대·강원대·공주교대·한성대·서정대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충북대 우암연구소 전임연구원 및 고려대 교육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이다. 그동안 조광조 평전인 ≪위대한 개혁≫·≪삼봉 리더십≫을 비롯해 ≪하서 김인후의 시문학 연구≫·≪한국시가의 자연관≫·≪한문학의 이해≫·≪화랑세기≫·≪동몽선습≫·≪백련초해≫·≪백유경≫·≪반야심경≫ 등 90여 편의 논저를 냈다. 우리나라 한문학과 동양고전 전반에 걸쳐 연구하고 강의하고 저술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명심보감(明心寶鑑) 서(序)
명심보감(明心寶鑑) 권상(卷上)
계선편(繼善篇) 제1 [47조]
천명편(天命篇) 제2 [19조]
순명편(順命篇) 제3 [16조]
효행편(孝行篇) 제4 [19조]
정기편(正己篇) 제5 [117조]
안분편(安分篇) 제6 [18조]
존심편(存心篇) 제7 [82조]
계성편(戒性篇) 제8 [15조]
근학편(勤學篇) 제9 [22조]
훈자편(訓子篇) 제10 [17조]

명심보감(明心寶鑑) 권하(卷下)
성심편(省心篇) 제11 [256조]
입교편(立敎篇) 제12 [17조]
치정편(治政篇) 제13 [22조]
치가편(治家篇) 제14 [16조]
안의편(安義篇) 제15 [5조]
준례편(遵禮篇) 제16 [21조]
존신편(存信篇) 제17 [7조]
언어편(言語篇) 제18 [25조]
교우편(交友篇) 제19 [24조]
부행편(婦行篇) 제20 [9조]

발문(跋文)

옮긴이에 대해


* 더 자세한 내용은 동봉한 책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1년 10월 26일 수요일

연암 산문집 燕巖散文集

지나친 수식과 격식을 버리고 단순 명쾌한 문장으로 문단을 주도해 결국 정조의 문체반정을 이끌어 낸 장본인, 고금 학자들이 우리나라 최고의 글쟁이라고 서슴없이 손꼽는 연암 박지원의 주옥같은 작품을 모았다. 연암에 푹 빠진 박수밀 교수의 정성스런 번역과 자상한 해제를 따라가다 보면 연암의 맛깔스런 문장과 혁신적인 사상뿐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숨결까지 느낄 수 있다.

☑ 책 소개

연암 박지원은 고금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글쟁이이자 실학의 큰 나무다. 창강 김택영은 그의 문장에 대해 천년의 역사 가운데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던 바라고 극찬했으며 퇴계와 율곡의 도학(道學), 충무공 이순신의 용병술과 더불어 조선의 세 가지 우뚝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도 연암을 우리나라 최고의 문장가이자 세계의 어느 문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인물로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연암집≫에는 이와 같은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삶에 대한 모든 글들이 담겨 있다. 그가 <초정집서>에서 언급한 ‘법고창신’과 <영처고서>에서 말한 ‘조선풍’은 조선 후기 문학과 사상의 정수를 보여 주는 정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산문은 조선 후기의 새로운 문학 정신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특히 ≪연암집≫ 별집에 실린 ≪열하일기≫는 최고의 기행문학이자 사상서다. ≪열하일기≫에는 박지원의 두 가지 핵심 사상, 곧 백성들의 삶을 이롭게 하자는 이용후생의 사상과 청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워 가난한 조선의 현실을 바꾸는 데 도움을 주자는 북학(北學) 사상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허생전>은 북벌론의 허구성, 해외 진출 사상, 양반 사대부의 무능 비판, 상공업의 중요성, 이상 사회 건설 등의 주제 의식을 담고 있어 박지원의 생각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지원은 ≪연암집≫에서 이른바 연암체라 불리는 고유한 문체를 사용해, 기존의 판에 박힌 글투를 과감하게 탈피했다. 전통적으로 지켜야 했던 바르고 고운 문체 대신 비속어를 적극적으로 끌어 쓰는 등 그만의 독특한 문체를 썼으며, 해학과 풍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당시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본 번역서는 기존의 번역서들을 두루 참고하면서도 차별화되는 지점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정했다. 첫째, 수많은 산문 가운데 연암의 진면목을 총체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제 분류 및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연암은 위대한 문장가이자 사상가였으며, 세상을 바꾸려는 개혁가이자 평범한 한 인간이었다. 이러한 면모들을 골고루 균형 있게 담아내고자 했다. 독자들이 이 번역서를 읽고 위대한 문장가이자 사상가로서의 연암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연암도 발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품을 선별했다.

둘째, 번역은 원문에 최대한 충실하되 가장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옛날과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으므로 원문을 그대로 해석하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많다. 그럼에도 우선은 원문 그대로를 충실히 번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풀어 쓸 경우 자칫 연암의 간결한 문장과 맛깔스런 은유를 놓칠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풀어서 번역하면 그 의미가 더 쉽게 이해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원문 고유의 색깔을 버리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사람의 자호(字號)만 밝힌 경우는 이름까지 적었으며 지명은 가능한 한 오늘날 명칭으로 바꾸었다. 그때는 호(號)만 써도 독자가 그 이름을 알 수 있었기에 따로 이름을 쓰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연암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표현했을까를 생각하며 번역을 진행했다.

셋째, 번역자의 주관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인 언어로 쓰기 위해 노력했다. 예컨대 <일야구도하기>에서 ‘今吾夜中一夜九渡’의 일야구도(一夜九渡) 번역에 대해 많은 분들이 ‘아홉 번이나 건넜다’라고 번역했으나 옮긴이는 ‘아홉 번 건넜다’라고 번역했다. ‘이나’라는 표현은 번역자의 주관이 개입된 것인데, 이 경우 글의 의미를 명료하게 해 주는 장점은 있으나, 연암의 세계관이 매우 냉철하고 객관적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가능한 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번역했다. 다른 글들도 이와 동일한 기준에서 번역에 임했다.

넷째, 각주는 최대한 줄였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 각주까지 읽어야 이해가 되는 번역은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 본문만으로도 의미가 쉽게 전달되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경우는 원문에 나와 있지 않은 최소한의 정보를 첨가한 경우도 간혹 있다. 특히 긴 고사를 짧은 몇 마디 문장으로 표현한 원문의 경우, 각주로 달아 주기보다는 본문에서 최대한 요령 있게 압축해서 번역하고자 했다.

한편, 작품마다 해제를 달아 독자들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배려했다. 연암의 작품들은 감춤의 미학을 지향한다. 생각을 직접 전달하지 않고 비유와 알레고리 등을 통해 전달하기 때문에 그 의도한 바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배경 정보들을 다루어 줌으로써 독자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배려했다. 그렇지만 연암은 작품 한 편 한 편마다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이 가능하므로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열하일기≫에서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산문은 선별해 수록했다. 소설 가운데 연암의 면모를 잘 드러낸다고 판단되는 몇 작품을 수록했다. 오늘날 소설로 취급되는 연암 작품들은 사(史), 혹은 전(傳)의 맥락에서 쓰인 것임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이 책을 읽고 박지원의 새로운 문학 정신과 세계관, 한 인간으로서의 삶과 지식인으로서의 혜안을 함께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작품을 번역하면서 박지원의 문장력과 생각의 힘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글은 오늘날 그대로 옮겨 놓아도 전혀 진부하지 않고 신선하다. 절제된 언어, 감칠맛 나는 비유, 상식을 뒤집는 싱싱한 생각, 세계에 대한 냉철한 시선 등 좋은 글이 갖추어야 할 요소를 전부 갖추고 있다. 맛난 음식을 맛볼 때와도 같은 즐거움을 독자들도 함께 경험하기를 기대한다.

☑ 책 속으로

●마을의 어린애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다가 읽기 싫어하기에 꾸짖었더니, 그 애가 말합디다.
“하늘은 푸르고 푸른데 하늘 천(天) 자는 푸르지가 않아요. 그래서 읽기 싫어요.”
이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을 굶어 죽이겠소.

●백호 임제가 막 말을 타려 할 때였다. 하인이 나서며 말렸다. “나리! 취하셨는뎁쇼. 짚신과 가죽신을 한 짝씩 신으셨습니다요.” 백호가 꾸짖으며 말했다. “길 오른편에서 보는 자는 내가 짚신을 신었다고 할 테고, 길 왼편에서 보는 자는 내가 가죽신을 신었다고 할 텐데, 뭐가 잘못이란 말이냐?” 이로 미루어 말하자면 세상에서 보기 쉬운 것으로 발만 한 것이 없으나, 보는 방향이 같지 않으면 짚신인지 가죽신인지도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참되고 바른 견해는 진실로 옳다 그르다 하는 시비의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땀에서 이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미묘해서 살펴보기 어렵다. 옷과 살갗의 사이에는 본래 빈틈이 있는데 떨어진 것도 아니고 붙어 있는 것도 아니며,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니니 누가 그 가운데[中]를 얻겠는가? 말똥구리는 자신의 경단을 아껴 여룡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룡 역시 자신에게 구슬이 있다 해서 저 말똥구리의 경단을 비웃지 않는다.

●저 허공 속을 날며 우는 새는 얼마나 생기가 넘칩니까? 그런데 허무하게 ‘새 조(鳥)’라는 한 글자로 생기를 말살해 빛깔도 없애고 모습과 소리를 삭제하고 맙니다. 마을 모임에 나가는 촌 늙은이의 지팡이 끝에 새겨진 새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어떤 이는 늘 쓰는 말이 싫다고 가볍고 맑은 글자로 바꿔 볼까 해 ‘새 금(禽)’ 자로 바꿔 쓰기도 합니다. 이는 책만 읽고 글을 쓰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병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 그늘진 뜰에 철새가 짹짹거립니다.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크게 외쳤지요.
“이것이 내가 말한 ‘날아가고 날아온다’는 글자고, ‘서로 울고 서로 화답한다’는 글이다. 온갖 빛깔을 문장이라고 한다면 이보다 더 나은 문장은 없다. 오늘 나는 글을 읽었다.”

●나는 본래 삼류 선비다. 내가 본 장관을 이야기하겠다. 깨진 기와 조각이 장관이고, 냄새나는 똥거름이 장관이다. 왜냐? 깨진 기와 조각은 세상 사람들이 버리는 물건이다. 그러나 민간에서 담을 쌓을 때 어깨 높이 위쪽으로는 깨진 기와 조각을 두 장씩 마주 놓아 물결무늬를 만들거나 네 조각을 모아 동그라미 무늬를 만들거나 네 조각을 밖으로 등을 대어 붙이면 옛날 동전 구멍 모양을 이룬다. 기와 조각들이 서로 맞물려 만들어진 구멍들이 영롱하고 안과 밖이 마주 비치게 된다. 깨진 기와 조각을 내버리지 않자 천하의 무늬가 모두 여기에 있게 된 것이다. 동네 집들의 문 앞 뜰에 가난해 벽돌을 깔 수 없으면 여러 빛깔의 유리기와 조각과 냇가의 둥근 조약돌을 주워다 얼기설기 서로 맞추어 꽃·나무·새·짐승 무늬를 새겨 깔아 놓는다. 그러면 비가 오더라도 땅이 진창이 될 걱정이 없게 된다. 기와 조각과 조약돌을 내버리지 않자 천하의 훌륭한 그림이 모두 여기에 있게 되었다.
똥오줌은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물건이다. 그러나 이것이 밭에 거름으로 쓰일 때는 금싸라기같이 아끼게 된다. 길에는 버린 덩어리가 없고 말똥을 줍는 자는 오쟁이를 둘러메고 말 꼬리를 따라다니기도 한다. 이렇게 모은 똥을 거름간에다 쌓아 두는데 혹은 네모반듯하게 쌓거나 혹은 여덟모로 혹은 여섯모로 혹은 누각 모양으로 쌓아 올린다. 똥거름을 쌓아 올린 맵시를 보아도 천하의 문물제도는 벌써 여기에 버젓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기와 조각과 조약돌, 똥거름이야말로 진정 장관이다. 왜 하필 성곽과 연못, 궁실과 누각, 점포와 사찰, 목축과 광막한 벌판, 나무숲의 기묘하고 환상적인 풍광만을 장관이라고 불러야 한단 말인가?

☑ 지은이 소개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박지원(1737∼1805)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실학자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자는 미중(美仲), 중미(仲美), 미재(美齋)이며,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冽上外史)다. 박사유(朴師愈)와 함평(咸平) 이씨(李氏)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는 ≪사기(史記)≫를 배워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의 문우(文友) 관계를 이어 갔다. 청년 시절엔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해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러한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이란 이름으로 편찬했다.

영조 47년(1771) 마침내 과거를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은거하면서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을 비롯한 많은 젊은 지식인들과 더불어 학문과 우정의 세계를 펼쳐 갔다. 정조 2년(1778) 홍국영이 세도를 잡고 벽파를 박해하자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 있는 연암협(燕巖峽)으로 피신해 은둔 생활을 했다. 연암이란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정조 4년(1780)에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의 연행(燕行) 권유를 받고 정사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을 가게 되었다. 이때 건륭 황제가 열하에서 피서를 즐기는 바람에 열하까지 가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연행을 통해 깨달음을 확대한 연암은 기행의 경험을 수년간 정리해 ≪열하일기≫를 저술했다.

정조 10년(1786) 유언호의 천거로 음사(蔭仕)인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임명되었다. 정조 13년(1789)에는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와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역임했고, 정조 15년(1791)에는 한성부 판관을 지냈다. 그해 12월 안의 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정조 임금이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하고는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직접 응하지는 않았다. 정조 21년(1797) 61세에 면천 군수로 임명되었다. 이 시절에 정조 임금에게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지어 바쳐 칭송을 들었다. 1800년 양양 부사로 승진했으며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순조 5년(1805) 10월 20일 서울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선영이 있는 장단(長湍)의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

박지원의 문학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되 법도를 지키라”는 의미다. 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되려는 것은 참이 아니며, ‘닮았다’고 하는 말 속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그만의 독특한 글투를 지향했다. 이러한 그의 글쓰기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연암체’라고 불렀다. 나아가 옛날 저곳이 아닌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중국이 아닌 조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일러 ‘조선풍(朝鮮風)’이라고 하는데 ‘조선의 노래’란 뜻이다.

연암의 학문적 성취와 사상은 ≪열하일기≫에 집대성되어 있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이용후생의 정신을 기반으로 청나라의 선진적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타개하자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북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는 ≪열하일기≫ 외에도 ≪방경각외전≫, ≪과농소초≫,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등을 직접 편찬했다. 연암의 유고는 그의 아들 박종의와 박종채에 의해서 정리되었는데 박종채가 쓴 <과정록추기>에 의하면 연암의 유고는 문고 16권, ≪열하일기≫ 24권, ≪과농소초≫ 15권 등 총 55권으로 정리되었다. ≪열하일기≫ 의 경우, 오늘날 완질은 2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암의 작품은 대부분이 문(文)이며 시(詩)는 42편이 전한다.

☑ 옮긴이 소개


박수밀
박수밀은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연암 박지원의 문예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박지원의 미의식과 문예이론≫, ≪18세기 지식인의 생각과 글쓰기 전략≫, ≪글로 만나는 옛 생각 고전산문≫ 등을 썼다. 분과 학문의 경계를 벗어나 문학을 교육, 철학, 미학 등과 가로지르는 통합의 학문을 지향한다. 인간과 자연, 문화와 현실, 민족과 민족 간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자 했던 실학자들의 인문 정신을 논리화해서 21세기 인간성 회복과 자본주의 모순 극복이라는 문제를 풀어 가고 싶어 한다. 고전에서의 글쓰기 전략, 실학의 인문 정신, 동아시아 문화 교류, 21세기 생태 사상에 대해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성품이 온화하지만 우유부단한 면이 있으며, 자유와 평화, 정의와 진실, 배려와 헌신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낮은 것, 약한 것들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으며, 지식이 삶에서 실천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 목차

사이에서 생각하기
몸을 보존하는 법 以存堂記 ·············3
천자문을 싫어한 아이 答蒼厓之三 ··········8
고라니의 크기 答某 ················9
말똥 경단과 여의주 蜋丸集序 ············12
사물은 본디 정해진 색이 없다 菱洋詩集序 ·······16
영원한 것은 없다 泠齋集序 ·············21
공(空)을 보아라 觀齋記 ··············24
매미 소리와 귤 향기 蟬橘堂記 ············28
나를 사랑한다는 것 愛吾廬記 ············34
대나무를 사랑한 사람 竹塢記 ············38
울음의 역설 好哭場 ················41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 건넌 사연 一夜九渡河記 ····46
코끼리 이야기 象記 ················52
시간와 역사 馹迅隨筆序 ·············58
백이를 말한다 伯夷論 上 ·············61
밤에 고북구를 나서다 夜出古北口記 ········65
문장가의 마음
글쓰기와 선변(善變) 楚亭集序 ···········73
글쓰기의 요령 騷壇赤幟引 ·············79
귀 울음과 코골이 孔雀館文稿自序 ··········85
습관이 오래되면 천성이 된다 自笑集序 ········89
책 읽기의 단계 素玩亭記 ··············94
천지자연이 독서다 答京之之二 ···········99
사마천과 나비 잡는 아이 答京之之三 ········101
글은 홀로 쓰는 것 答蒼厓 ·············103
매미 소리가 책 읽는 소리 與楚幘 ·········106
문장의 네 가지, 성색정경 鍾北小選自序 ······108
조선의 노래 嬰處稿序 ···············112
몰두해야 이룬다 炯言挑筆帖序 ···········117
비슷함을 구하지 말라 綠天館集序 ·········120
속 빈 강정과 개암 旬稗序 ·············124

생활의 발견
머리 기른 중 髮僧菴記 ··············131
새벽달은 누나의 눈썹 같고 伯姊贈貞夫人朴氏墓誌銘···139
여름날의 추억 夏夜讌記 ··············142
스승과 제자 酬素玩亭夏夜訪友記 ··········145
취해서 운종교를 거닐다 醉踏雲從橋記 ········152
말 머리서 무지개를 보다 馬首虹飛記 ········157
친구 석치를 조문함 祭鄭石癡文 ··········160
친구를 잃은 슬픔 與人 ··············163
여행길에서 꿈꾸다 渡江錄 七月六日 ·········166
유리창에서 고독을 외치다 關內程史 八月四日 ····171

현실과 사회
벗을 사귀는 방법 會友錄序 ············179
백영숙이 기린협으로 간 까닭 贈白永叔入麒麟峽序 ···185
열녀 함양 박씨의 죽음 烈女咸陽朴氏傳 ·······188
오랑캐란 모함에 대한 변명 答李仲存書 ·······196
친구는 제2의 나 繪聲園集跋 ············200
북학의 참뜻 北學議序 ···············204
송욱, 미치다 念齋記 ···············209
진정한 볼거리 壯觀論 ···············213
요술보다 무서운 것 幻戲記後識 ··········221
민 노인 이야기 閔翁傳 ··············228
참다운 친구, 예덕선생 穢德先生傳 ·········241
호랑이의 꾸짖음 虎叱 ··············249

해설 ······················269
지은이에 대해 ··················278
옮긴이에 대해 ·················282

2011년 4월 30일 토요일

육유 산문집 陸游散文集

≪육유 시선≫과 ≪육유 사선≫에 이어 ≪육유 산문집≫이 국내 최초로 소개된다.
시나 사에서는 맛볼 수 없는 산문 특유의 유려하고도 감칠맛 나는 문장, 글줄 사이로 드러나는 격정적인 애국심과 호방한 기개, 풍부한 지식과 섬세한 감수성, 소박한 일상생활과 정 깊은 교유 관계까지, 오직 ≪육유 산문집≫에서만 만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육유는 산문보다는 시와 사로 이름이 더 알려졌다. 하지만 육유의 산문은 남송대 어떤 문인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일단 양적인 면에서 충분한 성과를 냈다. ≪위남문집≫ 48권(사 2권은 제외), ≪남당서(南唐書)≫ 18권,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 10권, ≪가세구문(家世舊文)≫ 2권, ≪재거기사(齋居紀事)≫, ≪감지록(感知錄)≫ 1권, ≪방옹가훈(放翁家訓)≫, ≪피서만초(避暑漫抄)≫ 등이 모두 육유의 산문 저작들이다. 게다가 그의 문장 실력이 시와 사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는 것은 국사와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국사 편찬에 참여한 인물로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그가 남긴 ≪남당서≫는 방대한 사료를 고증하고 간결한 문체로 서술한 가작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마령(馬令)의 ≪남당서≫와 더불어 남당 및 오대 때의 강남 일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사서다.

일반적으로 육유 산문은 증공(曾鞏)의 문체를 많이 닮았다고 평가받는다. 실제로 육유는 어려서 증공을 사사한 경력이 있다. 육유는 문장 구조가 치밀하고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며 함축적인 의미를 잘 활용했다. 의론문에 있어서는 논리 전개가 탁월해 감성보다는 이성에 호소하는 냉철하고 설득력 있는 문체를 구사했다. 그의 의론문은 맹자와 한유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유가 사상을 잘 계승했다고 평가된다.

육유는 또 수필을 다작했다. 송대는 상공업이 발달하고 시장경제가 발전해 화려한 도시 생활이 형성되고 다양한 향락 문화가 만들어졌다. 문인 사대부 역시 이러한 문화 배경 속에서 고아한 문풍에서 탈피해 자유로운 형식과 파격적인 내용을 담은 수필을 창작했다. 육유 역시 예외는 아니었는데, 자신만의 특징을 살린 수필을 내놓았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입촉기≫와 ≪노학암필기≫다.

가장 강조하고 싶은 육유 산문의 특징은 시종일관 강한 애국정신과 애민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론문(政論文)이나 사전문(史傳文)같이 근엄한 문장이든 유기문이나 인물전(人物傳) 같은 부드러운 문장이든 육유는 시종일관 백성을 생각하고 나라를 걱정했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육유의 일부 문장만을 뽑아 해제하고 번역한 선집이다. 때문에 방대한 양의 문집에서 어떤 문장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 오랫동안 심사숙고했다. 처음엔 일반 독자를 위해 내용과 재미를 갖춘 기문(記文) 같은 문장만을 선택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육유의 사상과 문풍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차자(箚子), 서문(序文), 발문(跋文), 서문(書文), 찬(贊), 전(傳), 명(銘), 계(啓) 등 여러 문체를 골고루 선정하기로 했다. 아울러 상술한 육유 산문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을 선정하고자 노력했다. 각 문장 도입부에는 창작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해제를 달았다. 해석은 가급적 원문에 나오는 자구를 최대한 살리고자 노력했다. 아울러 원문을 함께 실어 번역과 함께 대조해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독자의 이해를 위해 지명·인명·전고 등은 각주로 설명을 달았다.

☑ 책 속으로

●만 종이나 되는 녹봉과 내가 가진 작은 배는 가난과 부귀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외물에 있어 나는 만 종의 녹봉은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내 작은 배에 연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과연 구할 수 있는 것인가요? 제 의미인즉 이렇습니다. 제 가슴속은 호연하고도 커다래서 그 속에서 운무와 해와 달이 장관을 연출하고, 천둥과 비바람이 기이한 변화를 일으킵니다. 비록 무릎이나 겨우 얹는 아주 작은 집이지만 언제나 물 흘러가는 대로 노를 저어 순식간에도 천 리 길을 나아갈 수 있으니, 과연 이 집이 ‘연정’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신등이 삼가 살펴보건대 폐하께서는 영명한 결단을 내리시어 동경으로 진격해 옛 영토를 회복하고 사천과 섬서를 견제하려는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신등은 폐하의 청미한 옥체를 시중들고 성명(聖明)한 뜻을 받들 수 있어 이보다 더한 기쁨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또한 조심스런 소견이 있사오니 감히 숨기지 않겠습니다. 소문을 들어 보니 다들 하는 말이 적군이 서북쪽을 점거하고 있어 계속 동경로를 보호할 수 없고 게다가 포학한 정치가 이어져 백성들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만일 폐하의 군대가 그곳에 가기만 해도 힘들이지 않고 그 지역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깊이 살펴보면, 백성을 위로하고 적군을 토벌하는 군대라는 것은 본래 군사 수가 많음에 의미가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부 군대만 국경에 보내도 수많은 성이 스스로 투항해 세상에 큰 공적을 세울 수 있는데 어찌 성공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대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만 저희 집에 들어와 보질 못하셨기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다. 제 방 안에는 책이 궤짝 안에도 들어 있고, 그 앞에도 늘어놓았고 침대 위에도 베개나 깔개처럼 쌓아 놓았습니다. 위아래 사방이 온통 책으로 가득합니다. 저는 식사하고 생활할 때나 아파서 끙끙거릴 때나 슬픔과 근심으로 탄식할 때에도 책과 함께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손님도 오질 않고 처자식도 들여다보지 않으며 심지어 바깥 날씨가 변해도 모르고 삽니다. 간혹 일어나 나가고자 해도 여기저기 정신없이 널려 있는 책들이 마른 장작처럼 쌓여 있어 나를 포위하니 나가지도 못합니다. 그러면 문득 웃음이 나와 ‘이야말로 내가 말한 대로 둥지가 아니면 무엇인가?’라고 중얼거립니다.”
그러면서 손님을 방으로 끌고 들어가 보여 주었다. 손님은 처음에는 들어가지 못하다가 겨우 들어왔는데 다시 나가질 못했다. 그리고는 “둥지 같다는 말이 믿을 만하군요”라면서 크게 웃어 댔다.

●이 집에 살면서 아침과 저녁 음식은 힘쓸 것을 생각해 많고 적은 양을 정했다. 그리고도 조금만 배부르면 식사를 그만두니 그릇을 다 쓸 필요도 없었다. 휴식으로 기와 혈을 조절하되 완전히 잠들 필요도 없다. 독서를 해 시원하고 편안한 정신을 만드는데 한 권을 다 읽을 필요도 없다. 옷 입는 것은 날씨를 봐 가면서 하고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바꿔 입기도 했다. 수십 보 이상은 돌아다니지 않았고 내키지 않으면 그냥 멈췄다. 비록 예정된 곳이 있었어도 다시 길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손님이 오면 만나기도 하고 안 만나기도 했다. 간혹 사람들과 옛일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고, 함께 술잔을 나누기도 했는데 싫증나면 내버려 두고 얼른 일어섰다. 사방에서 서신이 와도 생략하고 다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서신을 전하는 사람이 오면 금세 답장을 보낼 때도 있지만 답장을 써 주질 않아 며칠 동안 머무르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그 상황에 따라 보내는 것이지 귀천이나 친한 정도를 따지지는 않았다. 내 발걸음이 도시에 닿지 않은 지도 대략 여러 해가 되었다.


☑ 지은이 소개


육유(陸游, 1125∼1210)

육유(1125∼1210)의 자(字)는 무관(務觀),호(號)는 방옹(放翁)으로 월주(越州) 산음[山陰: 지금의 저장(浙江) 사오싱(紹興)]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배움을 좋아해 스스로 “나는 태어나 말을 배우자마자 책을 좋아했고, 만 권을 섭렵하느라 눈이 침침해졌다(我生學語即耽書, 萬卷縱横眼欲枯)”고 할 정도였다. 그의 조부 육전(陸佃)은 휘종(徽宗) 때 상서우승(尙書右丞)에까지 올랐고 후에 박주(亳州) 지주(知州)를 지냈다. 부친 육재(陸宰)는 회남동로 전운판관(淮南東路轉運判官)과 경서로 전운부사(京西路轉運副使)를 역임했다.

육유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대는 송 왕조의 부패가 극에 달했고,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금(金)에게 수시로 침략을 당하던 때였다. 육유가 태어난 다음 해 금군이 송 왕조의 수도 변량[汴梁: 지금의 허난(河南) 카이펑(開封)]을 함락했다. 그는 부친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고 열흘간 굶주리며 한밤중에도 쫓겨 다니는 등 갖은 고생을 하며 수춘[壽春: 지금의 안후이(安徽) 서우현(壽縣)]에 이르렀다. 후에 다시 산음으로 돌아갔으나, 육유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고 이것이 애국정신을 고취한 계기가 되었다.

육유는 스스로 “60년간 1만 수의 시(六十年間萬首詩)”를 지었다고 말할 만큼 열정적으로 창작에 임한 문인이다. 현존하는 시도 9000수가 넘고 생전에 이미 ‘소이백(小李白)’이란 별칭을 들었다. 대표 시문집으로는 ≪검남시고≫, ≪위남문집≫, ≪노학암필기≫, ≪방옹사(放翁詞)≫ 등이 있다.


☑ 옮긴이 소개


이기훈

이기훈은 1973년 8월 서울 태생으로 세명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베이징사범대학교 문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현재는 세명대, 세종대, 서울여대에서 강의 중이며 상명대학교 한중문화정보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한국연구재단 지원 국내 박사 후(POST-DOC) 과정에 있다. 저서로는 ≪중국 말(馬) 문화 연구≫(공저, 한국마사회출판사, 2010)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조선시대 ≪국어(國語)≫ 유통과 활용>, <명대(明代) 강남(江南) 지역 ‘묵보(墨譜)’의 문화 가치 초탐(初探)>, <송대(宋代) 사천(四川) 미주(眉州)의 지역 문화와 소식(蘇軾)의 가향(家鄕) 인식> 등 10여 편이 있다. 주로 중국 고전 산문과 지역 문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 목차

해설 ······················9
지은이에 대해 ··················17

군사를 나누어 산동을 취할 것을 바라며 대신 올리는 글(代乞分兵取山東劄子) ·············23
도읍에 관해 중서성과 추밀원 두 부서에 올리는 글(上二府論都邑劄子) ··················29
이 장간공의 글을 읽고서(跋李莊簡公家書) ·····34
동파의 간언 초고를 읽고서(跋東坡諫疏草) ·····38
채충회의 <송장귀부>를 읽고서(跋蔡忠懷送將歸賦)·41
≪화간집≫을 읽고서(跋花間集) ··········43
증 문청공의 상주문을 읽고서(跋曾文淸公奏議稿) ··45
부 급사의 서첩을 읽고서(跋傅給事帖) ·······48
요평중에 관한 전기(姚平仲小傳) ··········51
두 불승에 관한 이야기(書浮屠事) ··········57
≪통감≫을 읽고 난 후(書通鑑後) ·········61
위교에서 벌어진 이상한 사건(書渭橋事) ······67
부지신에게 올리는 제문(祭富池神文) ········72
무신년 엄주 지방의 농사를 장려하다(戊申嚴州勸農文) ·······················75
시강을 지낸 주원회께 올리는 제문(祭朱元晦侍講文) ·78
방옹자찬(放翁自贊) ···············81
≪동루집≫의 서문(東樓集序) ···········84
≪담재거사시≫의 서문(澹齋居士詩序) ·······87
부 급사 ≪외제집≫의 서문(傅給事外制集序) ····92
사마온 공의 포피에 관해 새기다(司馬温公布被銘) ··98
금애 벼루에 관해 새기다(金崖硯銘) ········100
엄주 지주로 추천해 주신 왕 승상께 드리는 감사 편지(知嚴州謝王丞相啓) ················102
연정에 대해 적다(煙艇記) ············110
입촉기(入蜀記) ·················115
동호각에 대해 적다(銅壺閣記) ··········151
서소에 대해 쓰다(書巢記) ············156
남원에 대해 적다(南園記) ············161
새로 지은 집에 대해(居室記) ···········167
열고천에 대해 적다(閱古泉記) ··········171

옮긴이에 대해 ··················175



지은이 : 육유
옮긴이 : 이기훈
분야 : 산문
출간일 : 2011년 4월 29일
ISBN : 978-89-6406-756-7
가격 : 12,000원
규격 : A5    제본 : 양장본    쪽 : 176쪽
초역

2011년 3월 5일 토요일

한유 서간문 韓愈 散文選

마음을 전하는 편지가 드문 시대, 한유의 편지를 읽습니다.

작년, 친구 생일에 짧은 카드를 쓴 뒤로는 손편지를 써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요즘은 트위터다 문자메시지다 해서 편지 쓸 일이 없습니다. 쉽고 편하기는 하지만, 어쩐지 예전만큼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볼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대와 헤어진 지 오래되었는데,
제가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을 통해
그대가 늘 저를 잊지 않고 생각하고 있음을 압니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한유의 편지입니다. 받는 사람에 따라 다른 말투와 형식, 구성을 써 변화의 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대문장가이니 만큼 유려하고 섬세한 문장은 말할 것도 없죠. 특히 스승으로서 질문에 답하는 편지가 인상 깊습니다. 한 수 알려준다면서 거드름피우는 태도가 아니라, 대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견해를 진솔하면서도 정성스럽게 쓰고 있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지는데, 아마 편지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유(韓愈)는 고문운동(古文運動)을 통해 형식일변도의 문학을 비판하고, 글 속에 충실한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개혁한 산문 문체는, 송대 이후 중국 한문 문체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서간문은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크게 부흥해서, 이를 통해 문학을 담론하는 것이 문인이나 학자 사이에 크게 유행했습니다. 당시의 문학 주장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서간문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의 서간문은 현재 50여 편이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유 서간문≫에서는 그의 문집 원본에 들어 있는 서간문 50편 전부를 번역하고 간단한 작품 해설과 주석을 붙였습니다. 옮긴이 이종한은 산문 연구를 계속해 왔는데, 한유의 산문에 대해 다수의 논문을 쓰기도 했어. 원문의 틀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쉬운 우리말로 옮기려고 노력했습니다.


단아한 글씨체로 조용한 편지지 위에 써준 편지가 참 그립습니다. 빠른 호흡으로 순간을 살아가야 하는 요즘 같은 때일수록 더 그렇죠. 한유가 긴 호흡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고심해 쓴 편지글을 당신에게도 추천합니다.

+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고문운동(古文運動)을 펼친 것으로 유명한 한유. 그의 편지에는 문학에 대한 깊은 성찰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가난에 괴로워하고 과거 낙방에 좌절하며 친구의 불행에 슬퍼하고 제자를 아끼는 한 인간으로서의 한유의 모습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당대의 명문가답게 유려하고 섬세한 문장과 함께 인간 한유의 새로운 모습을 만나 보자.

☑ 책 소개

한유의 서간문은 현존하는 문집 내에 50여 편이 남아 전한다. 이 책에서는 한유의 문집 원본에 들어 있는 서간문 50편 전부를 번역하고 간단한 작품 해설과 주석을 붙였다.

한유의 서간문은 수신인에 따라 각기 다른 말투와 형식을 사용했고, 주제의 설정이나 편장(篇章)의 구성 또한 작품마다 달라 변화의 묘미를 극도로 추구해 예술성이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내용 면에서는 통상 세 부류로 분류한다. 첫째는 문학에 관한 견해를 피력한 것이고, 둘째는 친구나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서를 터놓고 이야기한 것이며, 셋째는 정계의 유력 인사에게 발탁 또는 천거를 요청한 것이다.
문학에 관한 견해를 피력한 서간문은 대부분 후학들이 가르침을 요청한 데 답하기 위해 쓴 것이다. 한유는 서간문을 통해 자신이 제창한 고문운동의 취지를 천명하고, 자신이 고문 학습과 창작 과정에서 겪은 소중한 체험을 청년들에게 일러 줌으로써 그들의 고문 창작을 지도하고 있다. 스승의 위치에서 후학의 물음에 답하는 글이면서도 한 수 가르쳐 준다는 거드름 피우는 태도가 아니라 대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견해를 진솔하고도 정성스럽게 일러 주고 있다.
막역한 친구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글은 깊은 우정이 흘러넘치는 한편, 현실에 대한 강한 불만과 억울한 심정이 드러나 있기도 하다. 자신의 포부를 이야기하든, 회재불우(懷才不遇)의 정서를 토로하든, 친구에게 위로와 권면 또는 비판을 하든, 가식적인 언사가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정계의 유력 인사에게 발탁 또는 천거를 요청한 편지글은 자기 자신을 천거한 것과 제자나 친구를 천거한 것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자신을 천거한 편지글에는 고관인 수신인을 과도하게 추켜세우고 관직을 구하기에 급급한 작자의 심정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고 글의 표현 또한 절박한 작품도 있어 후대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성심을 바탕으로 정계의 유력 인사에게 논리 정연하고 정정당당하게 접근한 흔적도 적지 않다. 자신의 제자나 친구를 천거한 작품들은 글에 힘이 있고 언어가 간절하며 솔직한 심정을 담고 있어서, 재주를 품고도 실현할 기회를 만나지 못해 실의에 빠진 지식인들을 진정으로 돕고자 하는 바람을 잘 표현했다. 특히 이 부류의 글들은 곧이곧대로 대놓고 말하기 어려운 뜻을 전해야 하는 관계로 문학적 기교가 높은 수준에 달해 글의 구상이나 언어 구사에 예측불허의 우여곡절과 변환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인간사는 날로 복잡다단해지고 세상살이 또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럴수록 장고를 거듭하며 한 글자 한 글자 고심해서 가려 쓴 옛사람들의 편지글이 더욱 그립지 않은가? 대문호 한유가 긴 호흡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고심해 쓴 편지글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 책 속으로

1
문장의 기세는 물이요, 글은 물 위에 뜨는 물건입니다.
물살이 드세면 뜨는 물건은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다 뜹니다.
문장의 기세와 글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문장의 기세가 왕성하면 어구의 장단과 성조의 높낮이가 모두 잘 어울리게 됩니다.

2
그대와 헤어진 지 오래되었는데,
제가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을 통해
그대가 늘 저를 잊지 않고 생각하고 있음을 압니다.

3
현명하고 유능한 것과 어리석고 못난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고, 부귀와 빈천이나 화와 복은 하늘에 달려 있으며, 명성이 좋거나 나쁜 것은 타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은 제가 장차 힘써 할 것이고, 하늘에 달려 있고 타인에게 달려 있는 것은 제가 장차 그들에게 맡기고 저의 힘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4
저의 결점을 일러 주신 서신을 받았는데, 그대의 저에 대한 우정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면 제가 어찌 이런 말씀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친구 교제의 참된 도리가 끊어진 지 오래되어 서로 올바르게 타이르고 절차탁마하는 방식이 없어진 판이니, 제가 그대와 같은 친구를 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요! 저는 지금 세상 사람들이 귀가 있어도 자기들의 잘못을 듣지 못하는 것을 늘 가련하게 생각해 왔는데, 오직 황송하고 떨리는 심정으로 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듣지 못할까 두려워합니다. 지금 이후로 저는 그대에게 희망을 걸고자 합니다!

☑ 지은이 소개


한유(韓愈, 768∼824)
한유는 중국의 중당(中唐) 시기를 산 사상가요 정치가인 동시에 걸출한 산문 작가이며 특색 있는 시인으로, 사상계, 정계, 문단 등 다방면에서 걸출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자가 퇴지(退之)이고, 하양 사람이다. 본인이 본관을 창려로 자칭한 관계로, ‘한창려(韓昌黎)’로 부르기도 한다.
한유는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쇠퇴한 유학을 부흥시키고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는 주장을 전개했으며, 군벌들의 지방 할거(割據)를 반대해 토벌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당시의 정치적 폐단을 공격하는 데 용감했으며, 지방관으로 있을 때 백성들을 위해 많은 치적을 남겼다
산문 방면에서 그는 육조(六朝) 이래 문단을 풍미해 온 변문의 폐단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선진(先秦)과 양한(兩漢) 이전의 고문 전통을 회복할 것을 힘써 주장하면서 유종원 등 뜻을 같이하는 무리들을 이끌고 당대(唐代) 고문운동을 주도했으며 시가(詩歌) 방면에도 창조 정신을 발휘해 신기하고 웅건한 풍격의 독창적인 일가의 경지를 이룩했다.

☑ 옮긴이 소개


이종한
이종한(李鍾漢)은 1958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81년 계명대학교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1983년과 1992년에 서울대학교 대학원 중어중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부터 계명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국립대만사범대학(國立臺灣師範大學)과 미국 미네소타대학교(University of Minnesota)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일찍이 시로써 시를 논한 비평 양식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중국문학에서 연구가 미진한 분야인 산문 연구로 방향을 전환한 바 있으며, 중국 고전산문과 경서를 주로 강의하고 있다. ≪한유 산문의 분류와 의론산문≫, ≪한문 문법의 분석적 이해≫, ≪두보 시선≫, ≪당송 산문선≫, ≪중국산문간사≫(공역) 등의 저·역서와 <역대논시절구연구(歷代論詩絶句硏究)>, <한유 산문의 분석적 연구>, <한국에서의 한유 평가에 관한 연구>, <한중 양국의 ≪논어≫ ‘지(之)’ 자 해석에 관한 비교 연구>, <전문 문인으로서의 한유>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2011년 3월 4일 금요일

가곡원류 歌曲源流

음악과 시조의 만남, 가곡의 아름다움 속으로

≪가곡원류≫는 조선 후기의 유명한 가객인 박효관과 그의 제자 안민영이 당시 가곡작품들을 집대성해 편찬했다. 원전에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시조 108수를 선별했다. 5개의 악절로 된 새로운 형태인 가곡으로 접할 수 있어서,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문학 특유의 멋을 음미할 수 있는 작품이다.

☑ 책 소개


≪가곡원류≫의 탄생
≪가곡원류≫는 가객 박효관과 그의 제자 안민영에 의해 19세기 후반에 편찬된 가곡 가집이다. 그 편찬 작업은 대원군의 경제적 지원이 있어 가능했다. 박효관·안민영이 대원군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867년부터이고 대략 이때에 ≪가곡원류≫도 제작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은 1865년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시 여항인들의 칠송정 시사(詩社)를 후원해, 모임 장소였던 만리장성집을 수리해 주었다. ≪가곡원류≫는 바로 이곳에서 제작되기 시작해, 이후 1872년에 완성된다. ≪가곡원류≫ 편찬에는 적어도 5년 이상의 세월이 소요됐던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만리장성집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대원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가곡원류≫ 탄생도 어려웠을 것이다. 편자들의 문학적·음악적 시각에 따른 많은 작품들의 수집 활동, 작품 배열에 대한 고심, 문학적·음악적 실험의 단행, 작품마다 악보를 그리는 작업에는 절대적인 시간과 자본이 필요했는데, 거기에 대원군의 도움이 뒷받침되어 ≪가곡원류≫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사집이자 성악보집
≪가곡원류≫는 가사집이면서 동시에 성악보집으로서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우선 ‘가사집’으로서의 특징적 모습은 종래의 가집들과 달리 저본을 놓고, 이를 그대로 가져와 새로운 가집으로 탈바꿈시킨 것에서부터 나타난다. 여기에다가 역사상 유명한 작자의 작품임에도 빠진 것들과 자기 시대의 작품들을 찾아 보완해 넣는 방식으로 작품집을 구성했다. 이런 방식에 따라 유명한 <하여가>와 <단심가>는 물론이요, 서경덕, 황희, 변계량 등 수많은 유명 인물들의 작품들이 실려 있어서 보는 재미를 더해 준다.
‘성악보집’으로서의 특징은 크게 ‘가곡 연창 방식 순서’에서 나타난다. ≪가곡원류≫는 당대까지 형성된 가곡 악곡 전체가 연창 순서에 맞추어 배열되는 특징을 보인다. 악곡은 크게 ‘남창’과 ‘여창’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남창과 여창에는 평시조 형식의 노래와 사설시조 형식의 노래가 있고, 이것이 끝난 뒤에는 남자와 여자가 합창으로 부르는 가필주대, 즉 ‘노래가 끝났음을 알리는 노래’가 있다. 뿐만 아니라 개개의 작품들은 ‘가곡의 악절’에 맞추어 가사를 나누었는데, 시조(時調)가 세 개 악절로 되어 있는 반면에, 가곡(歌曲)은 다섯 개 악절로 되어 있다. 즉, 가곡과 시조는 가사는 같지만, 악곡은 전혀 다른 노래다. 가곡의 악절 수가 시조보다 많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가곡의 음악적 표현이 훨씬 세련되다. ≪가곡원류≫의 모든 가곡 가사들은 다섯 악절로 분절되어 있어 가곡의 악절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 책에서는 원본 ≪가곡원류≫의 이러한 특징들을 최대한 드러낼 수 있는 작품들을 선별, 원전에 실린 총 856수의 가곡 작품들 중에서 108수를 실었다. 또한 현대어 번역문과 원문이 함께 실려 있어, 이를 참고하며 본다면 가곡의 운율을 느끼고 ≪가곡원류≫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독자들에게 가곡의 새롭고 멋스러운 느낌이 잘 전달될 것이다.

☑ 책 속으로

空山에 우는 뎝동
너는 어이 우지는다.
너도 날과 갓치 무음 離別 엿냐.
아무리
피나게 운들 對答이나 더냐.    

공산에 우는 접동
너는 어이 우짖느냐.
너도 나처럼 무슨 이별 하였느냐.
아무리
피나게 운들 대답이나 하더냐.

-박효관(朴孝寬)

☑ 엮은이 소개


박효관(朴孝寬, 1800~1880)·안민영(安玟英, 1816~1885?)

박효관의 자는 경화(景華), 호는 운애(雲崖)다. 19세기를 대표하는 유명한 가객이었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아주 적다. 이는 그가 신분이 낮은 중인 계층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 밝혀진 바는, 그는 본디 서울 오군영 소속의 수군(守軍) 일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가객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다. 생애 후반부에 종2품 동지중추(同知中樞) 벼슬을 얻기도 하나, 이 벼슬은 실직이 아니라 일종의 명예직이다. 수군을 지냈지만, 워낙 가객으로서의 명성이 높고 또한 대원군 휘하에서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얻게 된 직함으로 보인다. 박효관은 당시 대표적인 음악 풍류회였던 ‘노인계’와 ‘승평계’의 수장으로, 많은 가객들 사이에서도 매우 영향력 있는 가객이었다. 이런 그의 가객으로서의 명성 때문에, 당시 여항 음악인들은 그를 존경해서 감히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선생’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그의 활동 중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은 흥선대원군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가곡원류≫라는 방대한 가집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안민영은 박효관의 제자로, 스승과 평생을 함께한 음악의 지기(知己)였다. 박효관을 매우 존경하고 따랐으며, ≪가곡원류≫의 편찬 사업에도 동참했다. ≪가곡원류≫의 편찬을 후원해 준 대원군을 곁에서 보필하는 일을 맡아 하며, 박효관과 대원군의 만남에 다리를 놓기도 했다. 이처럼 ≪가곡원류≫ 편찬에 안민영의 역할이 컸던바, ≪가곡원류≫ 발문에서 박효관이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안민영이다.

☑ 옮긴이 소개


신경숙

신경숙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교대, 한성대, 고려대를 거치며 국어국문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한성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고전시가를 주 전공으로 가르치고 있다. 동시에 고전문학과 문화를 접목한 다양한 강의를 하고 있다.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진행하고 있는 연구 주제는 주로 ‘조선조 가집’, ‘가곡 연행 환경’, ‘궁중 연향 가요’에 대한 것들이다. 최근에는 ‘근대 공간에서의 전통 가요’ 향유 양상들에 대한 탐색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19세기 가집의 전개≫(계명문화사, 1994), 공저로는 ≪한국 여성문학 연구의 현황과 전망≫(소명출판, 2008), ≪국어국문학 연구의 문화론적 전망≫(보고사, 2007), ≪예술과 장인문화≫(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7), ≪조선후기 궁중 연향 문화 2, 3≫(민속원, 2005), ≪효명세자 연구≫(두솔, 2005), ≪가곡의 새김≫(민족음악연구회, 2003), ≪시가사와 예술사의 관련양상 2≫(보고사, 2002) 등, 공역으로는 ≪송설당의 시와 가사≫(어진소리, 2004) 등이 있다.

☑ 차례

해설
엮은이에 대해

남창
우조
초삭대엽
이삭대엽
중거
평거
두거
삼삭대엽
소용
반엽
계면조
초삭대엽
이삭대엽
중거
평거
두거
삼삭대엽
만횡
농가
계락
우락
얼락
편락
편삭대엽
얼편

여창
우조
이삭대엽
중거
평거
두거
반엽
계면조
이삭대엽
중거
평거
두거
농가
우락
계락
편삭대엽

가필주대

≪가곡원류≫ 발문

옮긴이에 대해

2011년 3월 3일 목요일

용재총화 慵齋叢話

얕고 잔잔하게 이어지는 세상 모든 것들의 모든 이야기

≪악학궤범≫의 주요 필자 성현이 지은 조선 초기 잡기류 문헌이다. 일찍이 국사에서 다루지 못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풍부하게 기록했다. 이야기는 인물 일화를 비롯해 풍속·지리·문화·음악·제도 등 다방면에 걸쳐 있어 그야말로 ‘총화’라는 이름에 걸맞으며, 성현의 아름다운 문장은 그 이야기를 더욱 빛내고 있다. 그가 담고자 했던 사람 사는 소소한 이야기들은 오늘날까지 남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뿐 아니라, 한국학 사료로서의 가치 또한 지니고 있다.


☑ 책 소개


국사가 기록하지 못한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이 책은 성현이 고려 때부터 조선 성종 때까지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모아 엮은 잡기류 문헌이다. 이야기는 인물 일화를 비롯해 사회 전반에 걸친 이야기들을 빼곡하게 담고 있는데, 아마 당대 문인들의 잡기류에 대한 관심이 성현으로 하여금 이 책을 짓게 한 듯하다. 이야기의 소재는 좋고 나쁜 것, 또는 중하고 경한 것을 가리지 않아 친구들 간에 담소했던 것은 비록 비리라 할지라도 기록했으며, 여러 곳을 다니며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말 그대로 ‘총화’가 되었는데 국사가 갖추지 못한 것을 고루 수용했다. ≪용재총화≫가 다른 잡기류와 다른 점이 바로 이야기의 유형에 대한 구분 없이 거의 모든 이야기를 담았다는 것이다.
특히 ≪용재총화≫에는 인물 일화가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이 실렸는데, 사대부의 일화는 물론, 장수·음악가·궁사·사냥꾼·독경사·맹인·성대묘사꾼 등 거의 모든 유형의 인물이 망라되었다. 중국 사신·야인·왜인의 풍속까지 기록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기록들은 국사에서 취급되지 않은 것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국사에 보탬이 될 만한 것들이다.

그중 놀 만한 곳은 삼청동이 가장 좋더라
≪용재총화≫에는 324편의 매우 다양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는 만큼 오늘날 읽어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한양의 경승지’ 편에서는 한양의 경치 좋은 곳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한양의 도성 안에는 경치 좋은 곳이 적다. 그중에서 놀 만한 곳은 삼청동(三淸洞)이 가장 좋고, 인왕동(仁王洞)이 다음이며, 쌍계동(雙鷄洞)·백운동(白雲洞)·청학동(靑鶴洞)이 그다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삼청동에 대해서는 “북쪽은 맑은 샘물이 어지러이 서 있는 소나무 사이에서 쏟아져 나온다.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산은 높고 나무들은 조밀한데, 깊숙한 바위 골짜기가 있다. 얼마 못 가서 바위가 끊어지고 낭떠러지를 이룬다. 바위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모두 진달래와 단풍잎이니 봄과 가을에는 붉은 그림자가 비쳐 사대부들이 많이 와서 논다”고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오늘날처럼 당시에도 삼청동은 물 맑고 놀기 좋은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고금의 풍속’에서는 풍속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 사치함을 경계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미 찬상을 마련하고도 또 찬반(饌盤)을 마련하니 좋은 안주와 맛있는 음식이 없는 것이 없다. 탕(湯)이나 구운 고기는 모두 쌓여서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술이 끝나기도 전에 번거롭고 조급한 관현(管絃)을 뒤섞어 날랜 장고와 빠른 춤을 추되 쉴 줄 모른다” 하는 부분을 보면 지나치게 차려 먹고 마시고 놀아 직무를 폐한 것을 꾸짖는 듯한 내용이 나와 오늘날에도 새겨 읽을 만한 내용이다.


☑ 책 속으로

若問大小豆花色, 則人皆曰, 大豆花黃, 而小豆花赤,
此徒見其子之色而言之, 其實小豆花黃, 而大豆花赤也,

사람들에게 콩과 팥의 꽃 색깔을 물으면 흔히 “콩의 꽃은 누렇고, 팥의 꽃은 붉다”고 할 것이다. 이는 다만 그 열매의 색깔을 보고 말한 것이다. 실제 팥의 꽃은 누렇고 콩의 꽃은 붉다.


☑ 지은이 소개


성현(成俔, 1439∼1504)
성현(成俔, 1439∼1504)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료층 문인이다. 1462년(세조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해 박사(博士)로 등용되었다. 1485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참판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다.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이 왔는데 이들과 시를 수작해 그들을 탄복하게 했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공조판서로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했다. 죽은 지 몇 개월 뒤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다. 뒤에 신원(伸冤)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그는 글씨를 잘 썼으며, 음률(音律)에도 밝아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고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해 음악을 집대성했다. 뿐만 아니라 왕명으로 고려가요인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북전(北殿)>을 개산(改刪)했다.


☑ 옮긴이 소개


홍순석
처인재 주인 홍순석은 용인 토박이다. 어려서는 서당을 다니며 천자문에서 소학까지 수학했다. 그것이 단국대, 성균관대에서 한문학을 전공하게 된 인연이 되었다. 지역문화 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강남대 교수로 재임하면서부터다. 용인, 포천, 이천, 안성 등 경기 지역의 향토문화 연구에 20여 년을 보냈다. 본래 한국문학 전공자인데 향토사가, 전통문화 연구가로 더 알려져 있다. 연구 성과물이 지역과 연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동안 ≪성현 문학 연구≫, ≪양사언 문학 연구≫, ≪박은 시문학 연구≫, ≪김세필의 생애와 시≫, ≪한국 고전문학의 이해≫, ≪우리전통문화의 만남≫, ≪이천의 옛 노래≫ ≪향토사연구의 이론과 실제≫ 등 40여 권의 책을 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 시리즈 가운데, ≪읍취헌유고≫ ≪봉래시집≫ ≪부휴자담론≫ ≪허백당집≫ ≪용재총화≫를 냈다. 짬이 나면 글 쓰는 일도 즐긴다. ≪탄 자와 걷는 자≫는 잡글을 모은 것이다.


☑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용재총화 권1
역대의 스승
역대의 문장가
역대의 명필
역대의 화가
역대의 음악가
역대의 도읍지
한양의 경승지
고금의 풍속
처용희(處容戱)
관화(觀火)
구나(驅儺)
대관(臺官)과 간관(諫官)
감찰(監察)의 신참례(新參禮)
승정원(承政院)

용재총화 권2
집현전(集賢殿)과 홍문관(弘文館)
과거제도(科擧制度)
동궁(東宮)
삼관(三館)의 면신례(免新禮)
성균관(成均館)
약밥[藥飯]
세시풍속(歲時風俗)
전경법(轉經法)
권초지례(捲草之禮)
예조(禮曹)

용재총화 권3
강감찬(姜邯贊)과 호승(虎僧)
영태(永泰)의 광대놀이
신돈(辛旽)의 호색
미친 척하고 난세를 피한 조운흘(趙云仡)
최영(崔瑩)의 홍분(紅墳)
정몽주(鄭夢周)의 죽음
조반(趙胖)의 슬픈 사랑
이제현(李齊賢)의 변언(變言)
황희(黃喜)의 도량
정초(鄭招)의 총명
정씨(鄭氏)의 귀신 이야기

용재총화 권4
정갑손(鄭甲孫)의 기량
버림받은 여승의 복수
배후문(裴珝文)과 이석정(李石貞)의 활 솜씨
비문(碑文)의 글씨
화생(化生)의 이치
이학(理學)에 밝은 최지(崔池)

용재총화 권5
비둘기 소동
사승(師僧)을 속인 상좌
도수승(渡水僧)
바보 사위
이 장군(李將軍)의 호색담
아내를 연모하다 뱀이 된 스님
정절의 어려움
안생(安生)의 사랑
명통사(明通寺) 장님의 어리석음
호색 장님의 어리석음
풍산수(豊山守)의 어리석음
흉내를 잘 내는 사람들
사냥꾼 김속시(金束時)
봉석주(奉石柱)의 탐욕
어우동(於于同)
윤통(尹統)의 속임수
목 서방 거안(睦書房擧案)

용재총화 권6
지불배(池佛陪)의 인색함
처녀의 음란한 시
세 유생(儒生)의 꿈과 해몽
키다리 스님 원심(遠心)
닭중[鷄僧]
신수(信修) 스님의 기행(奇行)
박생(朴生)의 호색과 낭패
최세원(崔勢遠) 형제의 해학
홍녀(洪女)에 반한 서거정(徐居正)
이차공(李次公)의 재담
신모(辛某)의 비루함

용재총화 권7
임숙(任淑)과 이유한(李維翰)의 실수
이순몽(李順蒙)과 민발(閔發)의 발언
조수(潮水)
꿩의 맛
유사(類似)한 사물들
기우제
원각사(圓覺寺)
언문(諺文) 창제
유구(琉球) 사신이 본 세 가지 장관
활자의 종류와 주자법(鑄字法)
김종련(金宗蓮)의 우직함
박지번(朴之蕃)의 충직
토산물(土産物)
파리목사[蠅牧使]

용재총화 권8
승문원(承文院)
역대 문장가와 저술
향도(鄕徒)의 미풍
빙고(氷庫)
이름난 점쟁이들의 예언
속담 중의 격언
사람들의 억측

용재총화 권9
조선인과 중국인의 비교
온천(溫泉)
훈장(訓長)
승과(僧科)
독서당(讀書堂)
도성 밖의 원교(院橋)
기로연(耆老宴)과 기영회(耆英會)
제액(題額)
역대의 명장(名匠)

용재총화 권10
도자기
예조청사(禮曹廳舍)
궁궐 안팎의 샘과 못
종이
양잠
제단(祭壇)
시문선집(詩文選集)
삼포 왜인(三浦倭人)
여의(女醫)의 비술(秘術)
일본의 풍속
야인(野人)의 풍속
이정보(李廷甫)의 졸필
귀화인 설장수(偰長壽)의 가문
귀화인 명승(明昇)과 진리(陳理)
우리나라의 거족(巨族)

옮긴이에 대해

음애집 陰崖集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사림파 이자의 문집 

1754년에 간행된 조선 중기 사림파 인사인 이자의 문집. 분량은 모두 4권 2책 166판으로, 본서에서는 권1, 권2, 권3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원전의 30%가량을 발췌했다. 그중 본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룬 <일록>은 조선 당대사의 이해에 가장 중요한 사서인 실록에 수록되지 않은 사실이 기록되어, 당대 역사를 광범하게 살필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더불어 본서에 실린 이자의 다양한 글은 이자의 현실 인식과 시국관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 책 소개

≪음애집≫의 구성

≪음애집≫은 모두 4권 2책 166판으로 되어 있다. 권1에 시(詩) 178수, 부(賦) 2편, 권2에 책(策) 1편, 소(疏) 5편, 서계(書契) 1편, 서(書) 4편, 기(記) 3편, 발(跋) 2편, 잠(箴) 1편, 상량문(上梁文) 2편, 비문(碑文) 1편, 권3에 일록(日錄)과 잡저(雜著) 6편, 권4에 부록으로 행장(行狀)·묘갈음기(墓碣陰記)·기·상량문·소·제문(祭文) 각 1편, 축문(祝文) 2편, 언행척록(言行摭錄) 1편, 시 9수, 연보(年報) 등이 수록되어 있다.
본서에서는 권1, 권2, 권3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발췌했으며 서울대학교 규장각본(도서번호: 奎7158)을 저본으로 했다.


≪음애집≫과 <일록>의 의의 및 가치 

본서에 실린 이자의 시(詩), 부(賦), 소(疏), 서(書), 기(記), 발(跋) 등은 이자의 예리한 시국관과 현실을 보는 안목이 반영되어 있다. 그중 본 역본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한 것은 권3에 수록된 <일록>이다. 이는 조선 중기 사림파 인사의 현실 인식과 역사관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주목된다.
<일록>은 이자가 30세 때인 중종 4년(1509) 윤 9월부터 시작하여 같은 왕 11년 12월까지의 사실 중 일부만을 기록한 일기체의 저술이다. 수록된 내용이 시정의 득실, 인물의 현부, 천재지변 등인 것을 볼 때, 당대의 정치·문화·사회·인물을 기록해 역사의 교훈을 삼고자 한 것이다.
<일록>에는 특히 조선 당대사의 이해에 가장 중요한 사서인 실록에 수록되지 않은 사실이 기록되어, 당대 역사를 광범하게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역사서(야사)의 성격을 견지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제까지 개인 문집에 수록된 기사가 실록의 편찬 자료로 이용되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일록>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중종실록>에 수록되었다는 점은 이러한 사실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일록>을 비롯해 ≪음애집≫에 수록된 전반적인 내용을 볼 때, 이자의 현실 인식은 상당히 예리하고 구체적이었다. 다만 훈구파 주도의 정치에서 야기된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대안을 제기하기보다는, 이들과 어느 정도 절충하려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일정 부분 한계점을 지니기도 했다. 그러나 치인(治人)의 입장에서 현실을 보는 감각은 훈구파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음이 분명하다.


☑ 책 속으로

父母有過 爲孝子者當下氣愉色 雖至於撻之流血 而起敬起孝 必置其親於無過之地然後已.

부모가 허물이 있더라도 효자는 마땅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유쾌한 얼굴빛을 하고 비록 종아리를 맞아 피가 흐르더라도 공경하고 효도하여 반드시 그의 부모를 허물 없는 곳에 있게 한 연후에라야 그만두는 것이다.


☑ 지은이 소개

이자

이자[李耔, 성종 11년(1480)∼중종 28년(1533), 호는 음애, 본관은 한산]는 고려 말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던 이색의 5대손이며, 아버지 예견과 어머니 선산 김씨(관안의 딸)의 셋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산 이씨는 고려 말 신흥 사대부 가문의 하나로, 이색이 조선 왕조의 건국에 지지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가문의 안정적 지위가 확보될 수 있었다.
종선계를 중심으로 가문의 성향이 훈구파에 경도된 것에 비해, 이자는 사림파 인사인 이심원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사림파 성향을 견지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예견의 부임지를 따라 관동과 영남 등지에서 살았다. 14세 때인 성종 25년(1494)에는 삼척의 두타산 중대사에 올라 ≪송사≫를 읽고 개연히 발분하여 <만언소>를 지어 상소하고자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거두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시정에 대한 명철한 혜안과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5세 때는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이며 태종의 현손인 주계군에게 나아가 이희보·김공량·송세충 등과 함께 수학했다. 22세 때인 연산군 8년(1502) 생원진사시에 이수정, 김안국에 이어 각각 열두 명 중 2등, 열여덟 명 중 2등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24세 때인 연산군 10년(1504) 식년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고, 이후 이조의 정랑과 좌랑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는 등 일찍부터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외직을 구해 나갈 정도로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강했다.
그는 훈구파 주도의 정국에서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다만 사림파의 이념과 사상에 완전히 경도되지 않고, 남곤과 김안로 등 훈구 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상황에 따라 사림파와 훈구파의 완충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학문적으로는 사장(詞章) 지향, 현실 대응 면에서는 수기(修己)보다 치인(治人)의 입장,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 의식을 바탕으로 한 대안의 마련에 고민하면서도 급진적이지는 않았던 인물이었다.


☑ 옮긴이 소개


김경수·권선길

김경수는 충남대학교에서 ≪조선 중종대의 사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청운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경화 임용순(任龍淳) 선생으로부터 유교 경전을 익혔다. 연구의 주요 관심 분야는 한국사학사와 사상사, 정치사 및 지방사와 지방문화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관찬 사서인 ≪조선왕조실록≫과 국정이 논의되는 자리에 입시하여 국왕의 언행을 비롯하여 시행사(施行事) 일체를 기록으로 남기는 사관(史官)에 대한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강의실이나 교과서에서 배우는 암기 지식으로서의 역사, 흥미를 위해 극화된 가십거리로서의 역사를 넘어, 일상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삶의 지침으로서의 역사 만들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를 바탕으로 연구를 거듭한 결과 ≪조선 시대의 사관 연구≫, ≪언론이 조선왕조 500년을 일구었다≫, ≪테마로 읽는 우리 역사≫, ≪한국사 테마전≫, ≪조선왕조사 전(傳)≫ 등의 연구물을 내놓았다.

권선길은 공주사범대학 한문학과에서 공부했다. 병주(屛洲) 이종락(李鍾洛) 선생과 경화(敬華) 임용순(任龍淳) 선생으로부터 무실과 궁행의 유학을 배우면서 실질적인 경전의 주석과 실용적인 유학의 진흥을 위해 부심해 왔다. 연구의 중심 분야는 경학사상과 한국사상사, 전통의례다. 현재 유교사상의 저변 확대를 위해 다각적인 교육과 교화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그동안의 연구물로는 ≪대록삼강실록≫(역주), ≪영성지≫(국역), ≪논어집주 부강설≫(공역) 등이 있다.



☑ 목차

해설
지은이에 대해

권지일(卷之一)
시(詩)
부(賦)

권지이(卷之二)
소(疏)
서(書)
기(記)
발(跋)

권지삼(卷之三)
일록(日錄)
잡저(雜著)

옮긴이에 대해

2011년 2월 26일 토요일

원매 산문집 袁枚 散文集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다. 청나라 중기의 문인인 원매의 대표적 산문을 담고 있다. 원매는 조용히 은신하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자신이 좋아했던 것을 펼치고 살았던 이채로움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책은 원매를 읽어가는 가장 중요한 밑절미인 ‘감정’을 움직이는 산문들과 원매의 취미나 학술 연구, 그리고 삶의 지향점들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 산문들을 선별해 원매의 다양한 글을 맛보는 데 손색이 없도록 구성했다. 원매의 자유로운 사상을 통해 지금까지의 중국 고전에서 느껴보지 못한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책 소개

깊이 병든 데카당스와 감추어진 가능성의 인물, 원매
일본의 중국 문학 연구자인 이나미 리쓰코(井波律子)는 ≪중국의 은자들≫[파주(坡州), 한길사, 2002]에서 그에 대해 “깊이 병든 데카당스와 감추어진 가능성에 대한 과감한 도전, 평생 이 양극단을 오간 원매는 중국의 수많은 은자들 중에서도 유난히 스케일이 크고 일종의 요기를 발산하는 괴물 은자”라고 평가했다. 그녀의 평을 통해서 우리는 원매라는 인간이 가진 이채로움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그녀는 두 가지를 축으로 원매의 인생을 갈무리하고 있다. 우선 깊이 병든 데카당스는 원매가 호화로운 원림, 곧 수원(隨園)에서 거듭 만찬을 열어 강남 명사들과 교류하고 수많은 첩을 거느리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던 것, 그리고 전통 사회에서 서른 명이 넘는 여제자를 두었던 것과 여색뿐만 아니라 남색 또한 즐기며 화려한 애정 행각을 벌였던 그의 인생을 함축하는 것일 테다. 사실 이나미 리쓰코는 양극단의 또 다른 축으로 감추어진 가능성에 대한 과감한 도전을 거론하지만, 깊이 병든 데카당스에는 어느 때건 또 다른 탈주를 감행할 무궁한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원매의 당시 전통에 대한 부정, 사회적 금기에 대한 거부의 정서는 그런 점에서 그의 과감한 도전이면서 동시에 데카당스로 간주될 수 있는, 역시 원매를 구성하는 질료들이다. 18세기 중국 사회에서 원매는 어느 쪽으로건 쉽게 계열화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원매의 다양한 글들을 두루 접할 수 있는 진정한 선집
옮긴이는 자신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글들, 원매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글들을 주된 선정의 기준으로 삼았다. 옮긴이가 자신 있게 추천하는 글은 <만남, 그리고 이별>에 담긴 것들이다.
원매의 산문은 여태껏 우리말로 소개된 적이 없다. 국내에서도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은 길잡이의 역할도 떠맡아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글들,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된 글들도 함께 선정했다. 더불어 적은 분량의 책이나마 원매의 글을 맛보는 데 손색이 없도록 하기 위해 다양한 글들을 소개하는 데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 책 속으로

卒時, 召枚訣曰, “吾將歸去.” 枚不覺失聲而慟, 太孺人訶曰, “人心不足, 兒癡耶? 天下寧有不死人耶? 我年已九十四矣, 兒何哭爲?” 擧袖爲枚拭淚而逝. 嗚呼痛哉! 人世以百齡爲上壽, 再假六年, 太孺人便符此數. 天下吝此區區者, 而不肯賜與耶? 抑去來有定, 未可强留耶? 不然, 則終是枚調護無方, 奉養有缺, 而致太孺人之沈綿不起也!

어머니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나를 부르시더니 “나는 돌아가련다”라고 작별을 고하셨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목메어 흐느꼈다. 당신께서는 “사람의 마음은 만족을 모른다더니, 어리석구나. 하늘 아래에 죽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어? 내 나이 이미 아흔넷인 걸, 무엇하러 울어?”라고 말씀하시고, 소매를 들어서 내 눈물을 훔쳐주시더니 멀리 떠나셨다. 아! 원통하구나! 세상 사람들은 백 세를 장수 중 으뜸이라고 여기니, 여섯 해만 더 허락해 주셨어도 어머니께서 이 나이를 채우셨을 텐데. 하늘은 어이하여 이 얼마 안 되는 것을 인색하게도 내려주시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오고 가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 있어서 억지로 이승에 남겨둘 수 없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결국 내가 잘 보살피지 못하고 소홀히 모셔서 어머니를 병마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 것이리라!


☑ 지은이 소개

원매(袁枚, 1716∼1797)
중국 절강성(浙江省) 전당현(錢塘縣) 출신으로 지금의 항주(杭州)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외지에서 일을 하며 집으로 생활비를 부쳐주었지만 그마저도 끊기는 경우가 많아 어머니가 혼자 힘들게 가정을 꾸려갔다. 빠듯한 살림살이 속에서도 어머니는 원매의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원매는 책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했다. 스무 살에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 예비시험에 합격했으나 이듬해 실시된 본시험에 낙방한다. 처음으로 큰 좌절을 겪었고 젊은 나이의 호기와 자존심으로 인해 당시 명사들에게 비웃음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수도에 계속 머물러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향시 준비를 했고, 23세의 나이로 순천향시(順天鄕試)에 합격했으며, 연이어 이듬해 봄에 회시(會試)까지 합격했다. 같은 해 4월에 300명의 합격자들과 함께 치른 전시(殿試)에서는 5등의 성적을 거두어 결국 한림원(翰林院) 서길사(庶吉士)로 선발되는 영예를 안았다. 큰 뜻을 이룬 원매는 이듬해에 고향으로 돌아와 왕씨(王氏)와 결혼했다. 서길사의 연수 기간을 마치고 치른 시험에서 만주어에 불합격해 최하위의 성적을 기록, 하루아침에 지방 현령직으로 밀려난다. 이때 겪은 아픔은 과거 시험 문장과 만주어에 대한 비판적 시선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33세에 수원(隨園)을 사들이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았다. 그는 수원에서 조용히 은신했다기보다는 ‘마음 가는 대로 살았다. 공경대부에서 상인, 촌로, 여제자들까지 폭넓게 교류했고 이렇게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매문이나 쾌척 등을 통해 욕망의 향유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했다. 지나친 쾌락의 추구는 당시에도 이미 비판을 받아 교우 중 한 명인 정진방(程晉芳)은 수원을 떠나는 것이 어떠냐고 조언하기도 했다.


☑ 옮긴이 소개

백광준
서울대 중어중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 중국 남경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 서울시립대, 한국사이버대학교 등에 출강했고, 현재는 전북대 쌀·삶·문명연구소 HK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최근 들어 역사와 텍스트를 종횡하면서 그간 잊히거나 간과되었던 것들을 찾아내는 데 재미를 들이고 있다.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인간 군상들이 만들어낸 자취와 그 사이 결들을 재구성하면서 역사를 도톰하게 읽어보려고 노력 중이다.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텍스트들에서 벌어지는 수사의 변화, 예컨대 담론의 변화나 번역어의 탄생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저서 및 논문으로는 ≪중국 근대의 풍경≫, <변발에 얽힌 역사와 노신>, <19세기 말 중국 담론의 수사와 번역>, <명대 과거 시험 참고서 출판과 출판시장의 발전>, <엄복의 번역어 탄생과 그 운명> 등이 있다.

백련초해 百聯抄解



≪백련초해≫의 현대어 버전이다. 이전의 번역본과는 달리 번역문, 한문 원문, 한자의 풀이, 원본 언해, 참고자료로 구성했다. 한시의 멋과 맛을 느낌과 동시에 한자·한문 학습교재로도 훌륭하다. ≪백련초해≫와 영향을 주고받은 시구(詩句)들도 함께 수록해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백련초해≫는 아이들이 한자와 문장을 익힐 수 있도록 칠언시 가운데 연구(聯句) 100개를 뽑아 언해를 붙여 편찬한 한시 학습 입문서이다.


저자 소개

김인후(金麟厚, 1510∼1560)는 조선 중종·명종 때 문신으로서 본관은 울산이고 자는 후지(厚之)며,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다. 전라남도 장성 출신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향촌 출신의 신진 사림에 속하는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조원기·김안국 등을 만나 사림의 기풍을 배웠으며,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서는 퇴계 이황(李滉) 등 신진 사림들과 교제했다.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에 등용됐고, 이듬해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한 뒤 홍문관 저작이 됐다. 1543년에는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어 세자를 가르치는 소임을 맡았다. 그러나 중종이 죽고 인종이 죽은 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뒤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인종에 대한 충의를 지키면서 학문과 교육에 힘쓰며 여생을 보냈다. 1600수에 이르는 한시를 남겨 호남 시단에서 주요한 역할을 차지했고, 주리(主理)적인 입장에서 도학을 개진하며 후학을 이끌었으며,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 등에도 밝았다. 제자로는 정철·양응정·변성온·기효간·조희문·오건 등이 있다. 정조 20년(1796)에 문묘에 배향됐고,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됐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옮긴이 소개 

무외정사 주인 조기영(趙麒永)은 어려서부터 한문을 읽었다. 대학에서 한문교육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전공하여 <홍만종 시학 연구>로 석사학위, <하서 김인후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도회 한문연수원과 중앙승가대학 불전국역연구원 등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권우 홍찬유 선생과 연민 이가원 선생으로부터 지어재(之於齋)와 인재(仁齋)라는 아호를 받았다. 연세대 국학연구원·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연세대·강원대·경찰대·공주교대 등에 출강했으며, 잠시 서정대 교수로 재직했다. 지금은 충북대 우암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동안 조광조 평전인 ≪위대한 개혁≫과 ≪삼봉 리더십≫을 비롯하여 ≪하서 김인후의 시문학 연구≫·≪하서 시학과 호남 시단≫·≪한국시가의 정신세계≫·≪한국시가의 자연관≫·≪한문학의 이해≫·≪정보사회의 언어문화≫·≪화랑세기≫·≪동몽선습 외≫ 등 90여 편의 논저를 냈다. 우리나라 한문학과 동양고전 전반에 걸쳐 관심을 갖고서 연구하고 강의하고 저술하는 즐거운 두뇌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백련초해

옮긴이에 대해


책 속으로

花含春意無分別
物感人情有淺深

봄뜻을 머금고 있는 꽃들은 분별하는 마음이 없는데
경물을 느끼는 사람의 감정에는 얕고 깊음이 있도다.

2011년 2월 16일 수요일

서경잡기 西京雜記

유흠 劉歆(중국, BC 53~AD 23)

유흠은 서한(西漢)의 문학가이자 목록학자(目錄學者)로서, 자는 자준(子駿)이며 유향(劉向)의 아들이다. 나중에는 이름을 수(秀), 자를 영숙(穎叔)으로 고쳤다. 부친 유향과 함께 비서(秘書)를 교정하라는 칙명을 받고 육경(六經)·전기(傳記)·제자(諸子)·시부(詩賦)·술수(術數)·방기(方技) 등의 서적을 두루 연구했다. 황문랑(黃門郞)·중루교위(中壘校尉)·시중태중대부(侍中太中大夫)·기도위(騎都尉)·봉거광록대부(奉車光祿大夫) 등을 역임했으며, 왕망(王莽)이 제위를 찬탈한 뒤에 국사(國師)로 모셔졌다. ≪서경잡기≫ 외에 부친 유향의 ≪별록(別錄)≫을 개편하여 ≪칠략(七略)≫을 지었는데,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는 바로 이것을 바탕으로 완성된 것이다.

해설            

∙이 책은 ≪사고전서(四庫全書)≫본 ≪서경잡기≫(上海: 上海古籍出版社影印, 1991)를 저본으로 하였으며, 기타 여러 판본을 참고하였습니다.

∙원전은 6권에 걸쳐 총 132조의 고사가 실려 있는데, 이 책은 전체 내용을 균형 있게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고 각 권의 주요 고사 100조를 가려 뽑아 실었습니다.

≪서경잡기(西京雜記)≫는 한(漢)나라 유흠(劉歆)이 짓고 진(晉)나라 갈홍(葛洪)이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전형적인 잡록식의 필기저작으로, 총 132조의 고사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 짤막한 고사지만 그 내용은 매우 복잡하고 광범위하다. 기록된 인물은 제왕장상·공경대신·비빈궁녀·문인학사·명공명장(名工名匠)·일반백성 등등이며, 기록된 내용은 궁중야사·궁원진기(宮苑珍器)·문인일화·학술저작·전장제도·풍속습관·기인묘기(奇人妙技) 등등이다. 따라서 ≪서경잡기≫를 통하여 한나라 도성인 서경 장안(長安)의 정치·경제·문학·학술·문화·민속 등 여러 방면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서경잡기≫의 작자에 대해서는 종래로 여러 설이 분분하여 아직까지 정론(定論)이 없는 상태이지만, 대체로 유흠이 짓고 갈홍이 모은 것으로 판단된다.
유흠(BC 53?∼AD 23)은 서한의 문학가이자 목록학자로 자는 자준(子駿)이며 유향(劉向)의 아들이다. 나중에는 이름을 수(秀), 자를 영숙(穎叔)으로 고쳤다. 어려서부터 시서(詩書)를 암송하고 문장을 잘 지었다. 성제(成帝) 때 함께 황문랑(黃門郞)이 된 왕망(王莽)과 친교를 나눴다. 하평(河平) 4년(BC 26)에 부친과 함께 비서(秘書)를 교정하라는 명을 받고 육경(六經)·전기(傳記)·제자(諸子)·시부(詩賦)·술수(術數)·방기(方技) 등의 서적을 모두 연구했다. 왕망이 제위를 찬탈한 뒤 그를 국사(國師)로 모셨다. 나중에 왕망이 그의 세 아들을 죽이고 남양(南陽)에서 병란이 일어나자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왕망 주살을 모의했다가 일이 발각되어 자살했다. 그는 부친 유향의 ≪별록(別錄)≫을 개편하여 ≪칠략(七略)≫을 지었는데,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는 바로 이것을 바탕으로 완성된 것이다.
갈홍(284∼364)은 동진의 문학가이자 도교이론가·의학가·연단술가(煉丹術家)로서, 자는 치천(稚川)이고 자호는 포박자(抱朴子)이며 단양(丹陽) 구용(句容: 지금의 강소성 구용현) 사람이다. 갈홍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나 집이 가난하여 땔감을 팔아서 어렵게 공부했다. 그는 유학에 뜻을 두는 한편으로 신선양생술을 좋아했고 의학에도 정통했다. 만년에 그는 연단을 통하여 장수할 생각을 품고 구루령(句漏令)을 자청하여 광주(廣州)로 갔는데, 그곳 자사(刺史)인 등악(鄧嶽)이 머물기를 청하자 곧장 나부산(羅浮山)으로 올라가 연단술을 익히면서 계속 저작에 임했다. 그의 저작으로는 ≪신선전(神仙傳)≫·≪포박자(抱朴子)≫·≪금궤약방(金匱藥方)≫·≪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 등이 있다.
≪서경잡기≫가 지니고 있는 가치와 후대에 미친 영향은 크게 문학적인 측면과 사학적인 측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우선 ≪서경잡기≫는 잡기체(雜記體) 필기소설의 대표작으로 위진남북조 지인소설(志人小說)과 지괴소설(志怪小說)은 물론이고 멀리 명청대 소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한 한대 부(賦)의 대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양웅(揚雄) 등의 작부(作賦) 능력과 창작과정 및 작품에 얽힌 일화가 많이 수록되어 있어서, 한대 문인들의 문학 견해를 엿볼 수 있으며 문학 사료도 비교적 풍부하게 담겨 있다. 그리고 일부 고사는 후대의 시인·사인(詞人)·희곡가(戱曲家) 등 여러 문인들이 제재와 전고로 즐겨 사용하여 그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에 중국문학의 여러 제재 근원 가운데 하나를 밝히는 데에도 매우 유용한 가치가 있다.
사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서경잡기≫는 종래로 정사(正史)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다는 사료적인 특성이 부각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 기술된 내용의 사실성이 입증되면서 그 가치를 주목받고 있다.
≪서경잡기≫가 언제 처음으로 국내에 전래되었는지 그 정확한 시기는 규명하기 어렵지만, 대략 고려 선종(宣宗) 때인 약 1100년경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보다 분명한 기록은 조선 숙종(肅宗) 46년(1720)에 간행된 ≪오륜전비언해(伍倫全備諺解)≫의 인용서목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사역원에서 역관의 양성을 위하여 간행한 교과서 가운데 하나로, 명나라 구준(丘濬, 1421∼1495)의 전기(傳奇) ≪오륜전비기≫를 역관 고시언(高時彦, 1671∼1734) 등이 우리말로 언해하고 주를 달아 놓은 것인데, 역주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인용서목 중에 ‘서경잡기(西京雜記), 진 갈홍(晉葛洪)’이라는 분명한 기록이 있다. 한편 고시언의 서문에 따르면, 이 ≪오륜전비언해≫는 숙종 22년(1696)에 언해에 착수하여 24년 뒤인 숙종 46년(1720)에 완성되었다. 따라서 ≪서경잡기≫는 1696년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사고전서(四庫全書)≫본 ≪서경잡기≫(上海: 上海古籍出版社影印, 1991)를 저본으로 했으며, 기타 여러 판본을 참고했다. 원전은 6권에 총 132조의 고사가 실려 있는데, 이 책은 그중에서 각 권의 주요 고사 100조를 뽑아 전체 내용을 균형 있게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엮은이          

갈홍(葛洪, 284∼364)은 동진(東晉)의 문학가이자 도교이론가·의학가·연단술가(煉丹術家)로서, 자는 치천(稚川)이고 자호는 포박자(抱朴子)다. 유학에 뜻을 두는 한편으로 신선양생술을 좋아했고 의학에도 정통했다. 승상(丞相)·사도(司徒) 등을 역임했으며 민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가 나중에 자의참군(諮議參軍)으로 전임되었다. 만년에는 연단을 통하여 장수할 생각을 품고 구루령(句漏令)을 자청하여 광주(廣州)로 가서 연단술을 익히면서 계속 저작에 임했다. ≪신선전(神仙傳)≫·≪포박자≫·≪금궤약방(金匱藥方)≫·≪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 등을 지었다.

역자 소개      

김장환은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세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에서 <세설신어 연구(世說新語硏究)>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에서 <위진남북조 지인소설 연구(魏晉南北朝志人小說硏究)>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강원대학교 중문과 교수와 미국 하버드 옌칭 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객원교수(Visiting Scholar)를 지냈다. 전공 분야는 중국 문언소설과 필기문헌이다.
그동안 쓰고 번역한 책으로는 ≪중국문학입문≫, ≪중국문언단편소설선≫, ≪중국연극사≫, ≪중국유서개설(中國類書槪說
≫, ≪봉신연의(封神演義)≫(전5권), ≪열선전(列仙傳)≫, ≪서경잡기(西京雜記)≫, ≪세설신어(世說新語)≫(전3권), ≪고사전(高士傳)≫, ≪태평광기(太平廣記)≫(전21권),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전8권), ≪중국역대필기(中國歷代筆記)≫ 등이 있으며, 중국 문언소설과 필기문헌에 관한 다수의 연구논문이 있다.

편집자 리뷰      

중국 4대 미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왕소군을 원제(元帝)가 흉노의 왕비로 보내고 저잣거리를 온통 화공의 피로 물들였던 사연, 기원전 동중서가 밝혔던 기후에 대한 견해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후대 중국문학의 전고가 되었던 잡기체 필기소설 ≪서경잡기≫에는 짧지만 울림이 큰 이야기들이 봄날 꽃처럼 흐드러지다.

2011년 2월 14일 월요일

기노 쓰라유키 산문집

일본 가나 산문의 개척자, 기노 쓰라유키 


삶과 예술을 말하다. 


도서명 : 기노 쓰라유키 산문집
지은이 : 기노 쓰라유키
옮긴이 : 강용자
분야 : 예술 > 일본 문학 > 시
출간일 : 2010년 9월 15일
ISBN : 978-89-6406-599-0
가격 : 12,000원
규격 : A5    제본 : 양장본    쪽 : 116쪽




이 책은 일본 헤이안 시대의 문인 기노 쓰라유키의 산문 작품을 엮었다. 쓰라유키는 ≪고금와카집≫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와카에 대한 최초의 평론으로 일본 문학사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도사 일기≫라는 기행문을 써서 수필 문학을 개척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은 모두 ‘가나’로 된 산문인데, 쓰라유키 덕에 당대의 문학 언어로서 가나의 위상이 한층 높아진 것이다. 이 책은 시인으로 잘 알려진 쓰라유키의 산문 세계를 조망하고 있다.

이 책은 헤이안 시대의 문인 기노 쓰라유키의 산문인 ≪고금와카집 가나 서문≫과 ≪도사 일기≫를 엮은 것이다. 전자는 쓰라유키의 시론이며 후자는 여행 중의 일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역자인 강용자는 일본의 고대문학을 전공한 학자로, 쓰라유키의 산문문학을 살펴보기 위해서 두 작품을 한 데 엮었다. 특히 옛 일본어를 오늘날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옮기는 데 힘을 쏟았다.

기노 쓰라유키는 일본 헤이안 시대의 고쿠후(國風) 문화를 대표하는 문인이다. 고쿠후 문화는 고대국가의 성립 단계에서 중국의 문물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던 일본이 자신들 나름의 문화를 자각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화를 말한다. 헤이안 시대에 이르러 와카는 한시와 대등한 위치를 차지했고, 가나가 한자와 더불어 문학작품을 표현하는 언어가 되었다.

쓰라유키의 작품들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에 모두 해당하는 인물이다.
  
우선, ≪고금와카집≫은 천황이 당대에 전해지던 와카를 모아 편찬할 것으로 명하여 만들어진 노래책인데, 쓰라유키는 편찬자로서 책을 만드는 데 참여해 가나 서문을 썼다. 가나 서문은 일종의 평론으로, 와카에 대한 최초의 시론으로 알려진 것이다. 중국의 시론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그의 견해를 덧붙여 일본 와카의 기원과 역사, 유명했던 시인들의 작품을 평하고 있다. 한자로 쓰인, 또 다른 서문인 마나 서문과 내용은 비슷하나 보다 심오한 이해를 보여 준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한자로 쓰인 작품보다 가나로 쓰인 작품이 더 훌륭하니, 문학 언어로서 가나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도사 일기≫는 쓰라유키가 도사 지방관 임무를 마치고 귀경하는 길에 쓴 기행문으로, 허구적인 장치를 사용해서 높은 문학성으로 보여 준다. 작자의 경험과 느낌을 사실적으로 기술하는 보통의 기행문과는 달리 가공의 여성 화자를 내세워 뱃길의 여정과 배 안에서의 풍경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쓰라유키 자신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관찰해서 묘사하는 등, 다양한 문학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쓰라유키의 훌륭한 작품들 덕에 여성들의 언어였던 가나는 문학 언어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일본의 독자적인 문학이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 책은 쓰라유키의 산문 세계에 대한 좋은 안내자가 될 것이다.

책 속에서

天雲のはるかなりつる桂川袖をひでてもわたりぬるかな.
도사 지방에서는 하늘 구름처럼 아득히 멀게 생각한 가쓰라 강을 지금
소매를 적시며 마침내 건너는구나.
지은이 소개


기노 쓰라유키(紀貫之, 868?∼946)는 헤이안시대 전기의 가인이다. 기노 모치유키의 아들로, 890년대부터 문인으로 활동했다. 905년 다이고 천황의 명령으로 기노 도모노리, 오시코치노 미쓰네, 미부노 다다미네와 함께 ≪고금와카집≫을 편찬했다. 교토에서 몇몇 직위를 거친 후에, 도사 지방의 지방관으로 임명되어 930년부터 935년까지 재직했다. 스오 지방(周防國)의 자택에서 연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후 스오 지방 장관으로 재임한 적도 있는 듯하다. 그는 후지와라노 긴토에 의해 36가선으로 선정되었으며, ≪고금와카집≫의 편자로 잘 알려져 있다. ≪고금와카집≫의 두 가지 서문 중 하나인 <가나 서문>을 썼는데, 이것은 와카에 대한 최초의 비평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서문에서 와카의 신화적 기원부터 동시대 와카까지 서술했으며, 그것을 분류하고 주요한 시인들을 언급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옮긴이 소개

강용자(姜容慈)는 서울 출생으로 일본 고쿠가쿠인대학교(國學院大學校)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쳐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는 창원대학교와 동의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그간 ≪인터넷시대의 종교≫(도서출판 역락) 외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는 ≪풍토기≫, ≪일본의 종교≫, ≪고사기≫, ≪양생훈≫, ≪만엽집≫ 등을 번역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고금와카집 가나 서문 (古今和歌集假名序)
1. 와카의 본질과 효용
2. 와카의 기원
3. 와카의 모습
4. 와카의 역사
4-1. 만엽집의 찬미
4-2. 6가선의 노래
5. 고금와카집의 편집 과정

도사 일기 (土佐日記)

옮긴이에 대해

2010년 12월 28일 화요일

2010년 12월 지만지 <한유 서간문>




진실한 마음을 담은 편지가 드문 시대, 
한유의 편지로 마음을 전합니다.


손편지 자주 쓰시나요? 전 작년 친구 생일에 짧은 카드를 쓴 것이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트위터다 문자메시지다 해서 편지 쓸 일이 별로 없습니다. 쉽고 편하기는 하지만, 어쩐지 예전만큼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대와 헤어진 지 오래되었는데,
제가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을 통해
그대가 늘 저를 잊지 않고 생각하고 있음을 압니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한유의 편집입니다. 받는 사람에 따라 다른 말투와 형식, 구성을 사용해 변화의 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대문장가이니 만큼 유려하고 섬세한 문장은 말할 것도 없죠. 특히 스승으로서 질문에 답하는 편지가 인상 깊습니다. 한 수 알려준다면서 거드름피우는 태도가 아니라, 대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견해를 진솔하면서도 정성스럽게 쓰고 있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지는데, 아마 편지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유(韓愈)는 고문운동(古文運動)을 통해 형식일변도의 문학을 비판하고, 글 속에 충실한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개혁한 산문 문체는, 송대 이후 중국 한문 문체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서간문은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크게 부행하서, 이를 통해 문학을 담론하는 것이 문인이나 학자 사이에 크게 유행했습니다. 당시의 문학 주장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서간문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의 서간문은 현재 50여 편이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유 서간문>에서는 그의 문집 원본에 들어 있는 서간문 50편 전부를 번역하고 간단한 작품 해설과 주석을 붙였습니다. 옮긴이 이종한은 산문 연구를 계속해 왔는데, 한유의 산문에 대해 다수의 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원문의 틀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쉬운 우리말로 옮기고자 노력했습니다.

단아한 글씨체로 조용한 편지지 위에 써내려간 편지가 참 그립습니다. 빠른 호흡으로 순간을 살아가야 하는 요즘, 한유가 긴 호흡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고심해 쓴 편지글을 당신에게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