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수필비평선집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수필비평선집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2년 9월 12일 수요일

힌두 스와라지 Hindu Swarāj

힌두 스와라지 Hindu Swarāj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지음 / 김선근 옮김
분야 : 수필비평선집
출간일 : 2011년 11월 11일
ISBN : 978-89-6406-830-4 00890
18000원 /  A5 제본 / 176쪽



☑ 책 소개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 ≪자서전≫과 더불어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 중 하나인 ≪힌두 스와라지≫를 국내내에 처음으로 소개한다. ‘스와라지’는 ‘자치’를 말한다. 즉 ≪힌두 스와라지≫는 간디가 인도의 자치를 위한 실천 방법을 역설하는 글이며, 동시에 진정한 자치에 대한 간디의 이상을 밝히는 글이다.


☑ 출판사 책 소개

오늘의 인도를 알려면 인도의 독립운동사를 알아야 하고 독립운동의 역사를 알려면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도 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를 알아야 한다. 인도 국민회의를 알려면 국민회의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의 ≪힌두 스와라지(Hindu Swarāj)≫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간디를 중심으로 해 인도 국민회의의 자치 활동을 고찰해 보는 것은 오늘의 인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 효과적인 접근 방법인 것으로 사료되어 간디의 ≪힌두 스와라지≫를 번역하게 되었다.

인도 국민회의가 1907년 수라트 대회에서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열된 후 인도 전역에는 자치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정신이 남아프리카에서도 널리 퍼지고 있을 무렵 간디가 남아프리카 ≪인디언 오피니언(Indian Opinion)≫ 독자들에게 ‘인도의 자치’라는 주제를 <힌두 스와라지(Hindu Swarāj)>’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것이 본서다.

이 책은 1909년 12월 11일과 18일 ≪인디언 오피니언≫에 발표한 간디의 구자라트어 칼럼 <힌두 스와라지>를 ≪힌두 스와라지(Hind Swaraj)≫(The Navajivan Trust, 1938) 판본을 참조해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인디언 오피니언>은 트란스발(Transvaal)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대표하며, 일반적으로는 남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인도인들의 불평불만을 드러내는 매체였다. 간디는 독자들에게 진정한 인도의 자치란 무엇인가를 제시하려고 스스로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쓴 글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간디는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를 조국에 봉사하는 것, 진리를 찾는 것, 그리고 그 진리에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만약 간디가 주장한 논리가 옳다고 증명된다면 다른 사람들도 조국을 위해서 그의 견해를 채택하기를 바란다고 요청했다.
이런 간디에게 ≪힌두 스와라지≫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 글이 쓰인 것이 그의 나이 마흔 살 때(1909)다. 1893년부터 남아프리카에서의 ‘진리 실험’을 정리하고 진리 실험의 장을 인도로 옮겨 가기 5년 전 인생의 대 전환기에 쓴 것이다.
이 책의 주된 주제는 목차를 통해서 알 수 있으며, 그 주요한 메시지는 그의 글 결론 부분에서 주장한 다음의 원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진정한 자치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2.자치를 향한 길은 수동적 저항을 전개해야 합니다. 수동적 저항은 영혼의 힘이며 사랑의 힘입니다.
3.이런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스와데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4.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은 영국인을 반대하거나,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힌두 스와라지≫는 그의 ≪자서전≫과 더불어 간디의 주저(主著) 가운데 하나다. 인도의 자치라는 뜻의 ≪힌두 스와라지≫는 간디 개인에겐 인도 독립운동의 출사표이며, 인도인의 입장에서는 인도의 독립선언서에 해당하고, 인류 전체에게는 복음서라고 할 만하다. 이 글은 당시 식민지 인도의 긴급한 정치적 요청에 답한 글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의 세계사적 운명에 대한 그의 진단과 고심의 산물이다.


☑ 책 속으로

●옛날에는 다른 사람과 싸우고자 할 때, 육체의 힘을 겨루었습니다. 이제는 언덕에서 총을 갖고 있는 한 사람만으로 수천 명의 생명을 앗아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명입니다. 옛날에 사람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일하고 싶은 만큼만 일했습니다. 이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서로 모여 공장과 광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노동조건은 동물보다 더 못합니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주 위험한 상황에서 백만장자들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옛날에 사람들은 육체적 강제하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돈의 유혹과 돈으로 살 수 있는 사치품들에 의해 노예가 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질병들이 이제 생겨났고, 많은 의사들이 그 치료책을 찾기 위해 몰두하고 있으며, 병원들이 늘어났습니다. 이것이 문명의 시금석입니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바친 것입니다. 그들이 인도에 있는 것은 힘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명제를 입증할 수 있는지 살펴봅시다. 영국인들은 원래는 우리나라에 무역을 목적으로 왔습니다. 바하두르 회사를 상기해 보세요. 누가 그것을 바하두르로 만들었습니까? 그들은 당시 왕국을 수립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누가 그 회사 관리들을 도와주었습니까? 누가 그들의 은을 보고 유혹에 빠졌습니까? 누가 그들의 상품을 구입했습니까? 역사는 모든 것을 우리가 했다고 증언합니다. 갑자기 부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그 회사 관리들을 환영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도왔습니다. 만약 제가 대마초를 피우는 습관이 있는데, 어떤 상인이 그것을 제게 판다면 상인을 비난해야 하나요, 아니면 저 자신을 비난해야 하나요? 상인을 비난한다고 해서 대마초를 피우는 그 습관을 피할 수 있을까요? 만약 특정 소매인이 쫓겨난다 해도 다른 상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요? 진실한 인도인이라면 문제의 근원에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우리의 예속된 상황을 인도 전체의 탓으로 간주하는 것은 속 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가 스스로 독립하면 인도도 독립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생각에 스와라지의 정의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배울 때, 그것이 스와라지(Swarāj)입니다. 그러므로 독립은 우리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스와라지를 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묘사하고 싶은 스와라지란 일단 그것을 인식한 뒤에는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행동하도록 평생토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어 교육을 받음으로써, 우리나라를 예속시킨다는 것을 주시해야 합니다. 위선과 폭정 등이 증가했습니다. 영어를 아는 인도인들은 주저 없이 사기를 치고 사람들에게 테러를 가합니다. 지금 우리가 민중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들에게 진 빚의 일부라도 갚는 것입니다.

판사 앞에 서면 영어로 말해야 하고, 변호사가 되어도 모국어로 말하지 않고, 또한 누군가가 우리말을 영어로 번역해서 제게 한다는 것은 괴로운 것 아닌가요? 이것은 정말 불합리하지 않은가요? 이것이야말로 예속의 징표가 아닌가요? 그렇다고 내가 영국인들을 비난해야 하나요? 아니면 나 자신을 비난해야 하나요? 인도를 노예로 만든 것은 바로 영어를 아는 우리 인도인들이었습니다. 민족의 저주는 영국인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영어 교육이 불필요한가라는 당신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예”일 수도 있고, “아니오”일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예”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했는데, 이제 왜 “아니오”인지에 대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문명의 질병이 너무나 난무하기 때문에 영어 교육을 완전히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영어 교육을 이미 받은 사람들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서든 영어를 잘 활용할 것입니다. 영국인들과 또는 인도인들과의 거래에서 영국인들이 얼마나 자신의 문명에 혐오감을 느끼는지 알기 위한 목적으로만 영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영어를 공부한 사람들은 모국어를 통해서 후손들에게 도덕성을 가르쳐야 하며, 인도의 다른 지방 말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장성해서 영어를 배울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영어를 배울 필요가 없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영어로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은 사라져야 합니다. 이런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영어를 배움에 있어서도 배워야 할 것과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학문을 배워야 하는지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 능력에 등급을 매기는 일은 당장 그만두어야 하며, 위정자들은 이런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 지은이 소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
평범한 소년이었던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는 현 구자라트 주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카람찬드 간디는 상처를 거듭해 네 번 결혼했는데, 그 네 번째 아내인 푸틀리바이와의 사이에 얻은 3남 1녀 중 간디는 막내였다. 간디의 가문은 인도의 카스트에서 상인 계급인 바이샤에 속해 있었다. ‘간디’라는 말은 힌디어로 식료품상을 의미한다.
간디는 중산계급의 대두라는 역사적 물결과 종교적 개혁이라는 새로운 종교운동이 일고 있을 무렵 조부로부터는 고결한 성품을, 부친으로부터는 무욕의 실천인 무소유 정신을, 모친으로부터는 경건한 신앙심을, 비슈누파로부터는 아힘사(ahimsā, 비폭력) 정신을 이어받고 태어났다.
소년 시절의 간디는 몹시 수줍음 많고 외모나 재능도 특출한 데가 없었다. 그러나 양친에 대한 효성과 의무에 대한 헌신, 성실하고 정직한 마음씨와 타인의 결점을 꼬집기 싫어하는 성품 등은 학생 시절부터 나타났다. 이러한 성품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내용과 범위가 확충되어 갔다.
간디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1888년 9월 4일 열아홉 살에 영국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는 비슈누파의 신앙 속에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모친에게 육식과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하고 유학의 길에 올랐다. 간디는 영국 런던의 이너 템플 법학원에서 공부하는 3년 동안 이 세 가지 맹세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일생 동안 이 계명을 준수했다.
3년간의 영국 유학 생활을 통해 간디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다. 미래의 간디를 형성하는 기초적인 부분을 여기서 얻었다. 그는 영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새로운 종교와의 접촉을 통해 신지론자, 기독교인, 무신론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인도적인 요소, 유럽적인 요소, 인류적인 요소를 터득하게 되었다.
스물두 살의 간디는 변호사의 자격을 얻고 1891년 7월에 인도로 돌아왔다. 그는 봄베이로 나와 변호사 개업을 했으나 타고난 수줍음과 정직한 성격 때문에 변호 사업이 시원치 못했다. 그러던 차에 형의 지인이며 남아프리카에서 크게 사업을 하고 있던 포르반다르 출신의 회교도 상사로부터 고문 변호사로 초청을 받고, 1893년 5월에 운명의 땅 남아프리카 나탈의 더반 항에 상륙했다.
거기서 그는 약 7만 명의 인도 노동자들이 백인의 착취와 압제 밑에서 학대받고 고생하는 것을 보았다. 간디가 나탈에 이르자마자 위촉받은 소송사건 때문에 더반에서 프리토리아로 가던 중, 백인 차장이 그를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피터마리츠버그 역의 1등 찻간에서 그를 차 밖으로 쫓아냈다. 이 뼈저린 체험은 간디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그가 해야 할 의무를 생각했다. 그가 받은 모욕을 인종 편견이라는 뿌리박힌 질환의 한 징후로 생각하고 자신이 겪은 개인적 모욕을 전 인도인, 아니 전 인류의 모욕으로 전환했다. 그는 이 질병을 근절하기 위해 투쟁하기로 결심했다.
간디는 1893년 5월부터 1914년 7월까지 21년 동안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 동포를 위해서 헌신적인 투쟁을 했다. 그는 인간의 존엄과 인도의 민족적 자존을 위해서 투쟁의 생애로 들어갔다. 이것이 그의 사상인 사티아그라하 운동이다.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통해서 간디의 사상은 발전하고 그의 정신은 성장하고 그의 인격은 고매해졌다. 그는 개인이나 사회문제에 대해서 언제나 진리와 비폭력이라는 윤리적 원리를 사회의 일상 문제에 적용했다. 이 운동은 종교와 철학과 윤리가 하나가 된, 그의 일생에 걸친 활동이었다. 간디는 20년 이상이나 남아프리카에서 그의 운동을 수행해 1914년에 인두세 반대 투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7월 남아프리카를 떠나 런던을 거쳐 1915년 1월에 귀국했다. 그리고 민족의 지도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19년까지는 인도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주로 사회적인 개혁에 관심을 가지고 헌신했다. 그러나 1920년 틸라크가 예기치 않은 죽음을 당함으로써 그는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었고 1947년 인도가 해방되기까지 정치에 참여했다.


☑ 옮긴이 소개

김선근
김선근은 1946년 경북 금릉에서 출생했다.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서 공부해 문학사와 문학석사,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도덕 및 종교교육 교육학석사, 2003년 인도 바나라스 힌두대학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철학과와 인도철학과 학과장으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인도 네루 대학교 한국학 담당 교환교수였고, 2005년 8월에는 일본 류코쿠대학에서 교환 강의를 했다. 1991년 외무고등고시위원(국민윤리),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인도철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인도철학회 고문과 한국불교학회 명예회장 겸 법인이사, 선진통일연합 공동대표다. 저서로는 ≪인도 정통철학과 대승불교≫(동국대학교 출판부, 2005), ≪모든 이웃을 부처님처럼≫(민족사, 1999), ≪The Philosophical Thoughts of Mahatma Gandhi≫(New Delhi: Vikas Publishing House, 1996), ≪마하뜨마 간디 철학연구≫(불광출판부, 1990), ≪베단따 철학≫(불광출판부, 1990), ≪여의주≫(삼화출판사, 1981) 등이 있으며, 지식이 삶에서 실천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 목차

제1장 국민회의와 그 의원들 ············3
제2장 벵골의 분할 ················14
제3장 불만과 불안 ················19
제4장 스와라지란 무엇인가? ············21
제5장 영국의 상황 ················26
제6장 문명 ····················32
제7장 왜 인도는 식민지가 되었는가? ········38
제8장 인도의 상황 ················44
제9장 인도의 상황: 철도 ··············50
제10장 인도의 상황: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56
제11장 인도의 상황: 법률가 ············67
제12장 인도의 상황: 의사 ·············73
제13장 어떤 것이 진정한 문명인가? ·········77
제14장 인도는 어떻게 독립할 수 있을까? ······83
제15장 이탈리아와 인도 ·············89
제16장 폭력 ···················95
제17장 수동적 저항 ···············107
제18장 교육 ··················122
제19장 기계 ··················133
제20장 결론 ··················140

해설 ······················153
지은이에 대해 ··················164
옮긴이에 대해 ·················175

2012년 9월 3일 월요일

연극에 대해 О театре


연극에 대해 О театре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 (Всеволод Э. Мейерхольд) 지음 / 이진아 옮김
분야 : 수필비평선집
출간일 : 2012년 8월 31일
ISBN : 978-89-6680-517-4 02680
18000원 / A5 제본 / 154쪽


☑ 책 소개

연극이란 무엇인가? 일상의 완벽한 재현인가? 아니면 일상을 재창조한 예술인가?
20세기 연출가 시대에 스타니슬랍스키와 더불어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연출가 메이예르홀트. 그의 연극 이론과 메소드는 반(反) 사실주의 연극의 흐름, 실험적인 아방가르드 연극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메이예르홀트 연극 이론의 핵심인 상징주의 연극관과 그로테스크 연극 및 마스크의 개념을 메이예르홀트 자신의 설명을 통해 만난다.

☑ 출판사 책 소개

≪연극에 대해(О театре)≫는 프세볼로트 에밀리예비치 메이예르홀트(Всеволод Эмильевич Мейерхольд)가 상징주의 연극과 양식화 연극을 실험했던 1905년부터 1912년까지의 작업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저서로, 191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연출가가 연출 작업을 해 나가면서 쓴 일련의 논문을 모은 이 책은, 일부는 여러 저널에 이미 발표했던 논문들이고 일부는 출판과 함께 처음으로 발표된 것들이다. 책을 출판하면서 “연극의 본질에 대한 나의 관점의 발전을 보여 준다는 의미가 있다”라고 저자 스스로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이 책은 모스크바에서 1968년 두 권으로 출간된 메이예르홀트의 전집 ≪논문들, 편지들, 연설들, 대담들(Статьи, письма, речи, беседы)≫ 중 제1권을 저본으로 해서, ≪연극에 대해≫에 실린 두 편의 논문, <연극의 역사와 테크닉에 대해>와 <발라간>을 번역한 것이다.
<연극의 역사와 테크닉에 대해>는 1905년부터 1907년까지의 상징주의 실험에서 얻은 연극관을 정리한 논문이다. 1905년은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떠났던 메이예르홀트가 스타니슬랍스키의 제안으로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와 스튜디오를 맡았던 해다. 당시 상징주의 작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스타니슬랍스키는 상징주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비물질성, 영적인 분위기, 존재의 비밀스러운 느낌, 미묘한 음악성 등을 기존의 연극 메소드로는 쉽게 무대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는데, 때문에 상징주의 연극 실험을 위해 ‘스튜디오’라고 부르는 특별한 공간을 마련했고 이를 메이예르홀트에게 위임한 것이다. 메이예르홀트는 이곳에서 상징주의 연극의 대표적 작가인 마테를링크의 <탱타질의 죽음>, 하웁트만의 <슐륙과 야우> 등 상징주의 연극 실험을 시작한다.
메이예르홀트는 현실에서 풀 수 없는 삶의 비밀과 신비, 리얼리즘이 우리에게 제시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들의 해답을 그로테스크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명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세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그로테스크만이 ‘창조적 예술가에게 경이로운 지평을 열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연극이 삶의 리얼리티를 그대로 무대 위에서 모방하거나 연극적 현실이 삶의 현실과 같은 차원의 것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메이예르홀트의 연극 이론과 연극 메소드는 반(反)사실주의 연극의 흐름, 실험적인 아방가르드 연극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며 연구되어 왔다. 특히 그러한 맥락에서 가장 크게 주목받는 것은 그의 구성주의 연극과 배우 시스템인 생체역학이다. 반면에 그의 초기 작업, 특히 상징주의 연극 실험을 하면서 우슬로브니 연극관과 그로테스크 연극 미학을 정립해 나갔던 시기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업은 그의 연출 작업 전체를 이해하고 그의 연극관을 관통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 시기에 싹튼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이후 그의 작업을 통해 발전되고 연극 이론으로 정리되어 나가면서 그의 연극관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연극에 대해≫는 바로 이 시기의 메이예르홀트의 생각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저서다.


☑ 책 속으로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배우가 연출가의 영혼을 통해 극작가의 영혼과 합쳐진 자신의 영혼을 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희곡 작가가 이미 준비해 놓은 것을 자신이 만들려는 형상으로 취한다는 것이 배우의 창조적 자유에 방해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그에게 연출가가 부여하는 것도 그의 창조적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다.
연극의 모든 수단들은 반드시 배우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무대예술에서 연기가 첫 번째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기에 배우는 반드시 완전히 관중을 지배해야 한다.



●연출가는 관객으로부터 배우에 이르는 다리를 놓아야 한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무대 위에 친구들, 적들, 연인들을 끌어냄으로써, 연출가는 관객으로 하여금 단순히 그들의 언어만을 듣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숨겨진 대화를 꿰뚫어 보게 도와줄 수 있는 움직임과 포즈들로 그린 그림을 반드시 제공해야만 한다. 그리고 만약 연출가가 작가의 테마를 심화해 가면서 내면적 대화의 음악을 듣게 된다면, 그는 연출가와 배우들이 듣게 된 그러한 내면적 대화를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데 유용한 율동적 움직임을 배우에게 제안해 주어야 한다.
제스처, 포즈, 시선, 침묵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진실을 정의해 준다. 언어는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관객을 예리한 관찰자의 위치로 이끄는, 두 명의 대화자들이 세 번째 사람에게 준 것과 같은 그러한 재료, 즉 등장인물들의 영혼의 경험을 짐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재료를 관객의 손에 쥐여 줄 수 있도록 무대에서는 움직임의 그림이 필요하다. 언어가 귀를 위한 것이라면 율동은 눈을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관객의 상상력은 두 개의 인상이 주는 압력하에 작용한다.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 그리고 낡은 것과 새로운 연극의 차이는 율동과 언어가 독립적인 것이라는 것, 각각 고유의 리듬을 가지고 있으며 두 개가 합일하에 놓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대의 배우들은 재현을 열망하면서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과제를 부여한다. 즉, 자신의 ‘나’를 없애고 무대 위에 삶의 환영을 가져오기 말이다. 무엇 때문에 공연 포스터에 배우들의 이름들을 쓰는 것인가? 모스크바 예술극장은 고리키의 <밑바닥에서>를 공연하면서 배우를 대신해 진짜 부랑자를 무대에 세웠다. 재현에 대한 열망은 완전한 환영을 재현한다는 과도한 과제로부터 배우를 놓아주는 것이 더 나을 그러한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무엇 때문에 공연 포스터에 테테레프 역할의 배우 이름을 써 놓는단 말인가? 무대에 진짜로서 등장한 사람을 ‘배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관객을 현혹하는 것인가?
관중은 인간의 예술을 보기 위해서 극장에 온다. 그런데 어떤 예술이 스스로 무대 위를 돌아다닌단 말인가! 관중은 상상력, 연기, 숙련된 기술을 기대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저 일상만을, 그것의 노예인 모방만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로테스크는 일상에 다르게 접근한다.
그로테스크는 일상이 자연주의적인 것으로만 나타나는 것을 그만두는 바로 그때, 그 경계에서 그것을 더 심화한다.
삶에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외의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영역이 있다. 초자연적인 것을 탐구하는 그로테스크는 모순들의 결과를 종합적으로 연결하고, 현상의 그림을 창조하고, 관객을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를 푸는 경험으로 이끈다.


☑ 지은이 소개

프세볼로트 에밀리예비치 메이예르홀트(Всеволод Эмилье-вич Мейерхольд, 1874∼1940)
프세볼로트 에밀리예비치 메이예르홀트(Всеволод Эмилье-вич Мейерхольд, 1874∼1940)는 러시아의 연출가이자 배우이며 연극 이론가, 연극 교육자다. 그는 스타니슬랍스키와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이루어 놓은 대중적인 사실주의 연극에 반기를 든 가장 대표적인 연출가이자 20세기 연출가 시대에 스타니슬랍스키와 더불어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연출가이기도 하다. 메이예르홀트는 1874년 펜자라는 작은 도시의 독일계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본명은 카를 카지미르 테오도르 메이예르골트(Карл Казимир Теодор Майергольд)였다.
그의 연극적 이력은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창단과 함께 배우로서 시작되지만, 그는 곧 사실주의
연극에 회의를 느끼고 1902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떠나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게 된다.
1917년 이후 혁명의 시기, 메이예르홀트는 가장 두각을 드러내며 선두에 섰던 연출가였다. 그는 공산당에 입당한 최초의 연출가였으며 10월 혁명의 이상을 연극을 통해 구현하기를 주장했던 가장 사회주의적인 연출가였다. 1920년대 들어 그는 구성주의 연극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실험하는 한편, 자신의 배우 시스템이라 할 ‘생체역학’을 정리한다. 이 시기의 연극을 그는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해 설명하는데, 노동은 예술과 유사한 것이라 이야기하기도 한다.
구성주의는 묘사적인 무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자 자유였다. 그는 구성주의적 비전을 통해 새로운 연극과 미래의 배우를 보았다. 생체역학에 의해 훈련된 배우는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배우의 모든 신체 기관은 수행되는 모든 작업의 매 순간 정확하게 통제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배우는 무대 위에서 명료하고 정확한 표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배우의 환경이라 할 무대미술에 대해서도 무대장치는 현실 묘사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기능적이거나 재료의 성질만을 전달하는 요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무대에 세워진 메이예르홀트의 구성주의 구조물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제시하지도 의미하지 않았다. 오직 작업의 공간이자 배우 움직임의 효용성을 극대화하는 기계일 뿐이었다. 이러한 아이디어에 입각해 메이예르홀트는 크롬랭크의 <마음이 넓은 오쟁이 진 남편>, 고골의 <검찰관>, 오스트롭스키의 <숲> 등, 구성주의 연극의 기념비적 작품들을 공연한다.
메이예르홀트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을 열렬히 환영했으며 사회주의의 이상에 깊이 동의한 예술가였지만, 리얼리즘을 거부하고 실험적 연극을 고수해 나가는 그의 성향으로 인해 결국 당 지도부에게 형식주의자로 비난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예술적 획일성에 반발하고 공식적으로 지도부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며, 결국 1938년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1940년 사형된다. 메이예르홀트는 오랫동안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금기시되다가 스탈린 사후 해빙기에 이르러 여러 예술가들과 함께 해금되었다.

☑ 옮긴이 소개

이진아
이진아(李珍妸)는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현대희곡문학을 전공했으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연극원에서 연극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연극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러시아 연극과 한국 연극에 대한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대표적 저서로는 ≪한국 근현대 연극 100년사≫(공저, 2009), ≪동시대 연극비평론의 방법론과 실제≫(공저, 2009), ≪가면의 진실≫(2008), ≪동시대 연출가론≫(공저, 2007) 등이 있으며, <근대적 예술관으로서의 한국연극미학의 형성>, <탈식민적 상황에서의 한국 연극의 자기 재현>, <도스토예프스키 연극과 페테르부르크 테마> 외 다수의 논문이 있다.



☑ 목차

연극의 역사와 테크닉에 대해············1
1. 시어터 스튜디오··············3
2. 자연주의 연극과 분위기의 연극·······26
3. 새로운 연극에 대한 문학적 조짐·······51
4. 우슬로브니 연극 수립의 첫 시도·······62
5. 우슬로브니 연극··············85
발라간·····················99
해설······················141
지은이에 대해··················148
옮긴이에 대해··················152




2012년 6월 22일 금요일

간이 산문선



☑ 책 소개
 
‘글이란 무엇인가’,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고민한 조선의 명문장가 최립. 당송문(唐宋文)만을 익혔던 시대, 시(詩)만을 문학으로 취급했던 시대에 문단의 흐름을 바꾼 최립의 산문. ≪간이 산문집≫에 최립의 산문 33제 34편을 실었다.
 
 
☑ 출판사 책 소개
 
≪간이집≫은 최립이 편찬한 원고를 바탕으로 1631년(인조 9년) 교서관에서 9권 9책의 활자본으로 처음 간행되었다. 이때 운문을 앞에 실었던 당시의 문집 구성 방식과 달리 최립의 공의(公議)를 반영해 산문을 앞에 배치한다.
고려 후기에 들어온 성리학은 정치나 사회뿐만 아니라 사유와 문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학자들은 어려서부터 송대(宋代)의 성리학서를 읽고 자랐고, 이른바 문장가라고 하는 이들 역시 당송문만 익혔다. 또한 16세기 후반까지 문학 하면 곧 시만을 의미했을 뿐 산문의 문학성에 대한 인식은 형성되지 않았다. 당시에도 뛰어난 산문 작품을 남긴 작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산문의 문학성에 대한 구체적 논의나 의식적 실천이 수반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시기에 등장한 최립의 산문은 문단에 선풍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송의 문장으로부터 선진(先秦)의 고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전적을 철저히 익히고 녹여낸 그의 글은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기이함과 난해함, 고아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글이란 모름지기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진부한 문장에 염증을 느끼던 이들에게는 새로운 이정표처럼 여겨졌다. 과감한 생략과 도치, 풍부한 비유와 인용으로 넘쳐난 그의 문장은 독자로 하여금 그 안에 감춰진 의미를 발견하도록 강요했으며, 그 지적 유희의 과정에 기꺼이 동참했던 독자들은 마치 낯선 세계에 발은 들여놓은 나그네처럼 긴장과 희열을 맛볼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최립의 글은 숙종 때 편찬된 관찬선본인 별본(別本) ≪동문선(東文選)≫은 물론 서유비(徐有棐)가 편찬한 ≪동문팔가선(東文八家選)≫, 송백옥(宋伯玉)의 ≪동문집성(東文集成)≫, 남공철(南公轍)의 ≪사군자문초(四君子文鈔)≫, 홍길주(洪吉周)의 ≪대동문준(大東文雋)≫ 등 사가(私家)의 선집에도 고루 수록되었다. 또한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안석경(安錫儆)을 비롯해 여러 고문가들의 논평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중국의 문장을 주로 다루어왔던 당시의 정황에 비춰보자면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최립의 글은 문체나 수사 등 형식미 못지않게 내용상으로도 훌륭했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은 외교문서는 그저 하나의 글이 아니라 국가의 존망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중차대한 것이었다. 외교문서를 전담했던 최립은 오해와 의심, 견제와 반목이 횡행하던 정국에서 민감한 현안을 간단명료하게 전하고 설득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글은 당대의 사유와 가치관을 정교하게 반영한 수준 높은 ‘작품’이었던 것이다.
 
 
 
☑ 책 속으로
 
1.문장의 도를 이루려면 어찌하여야 하겠는가. 옛사람과 같이 하여야 한다. 그러나 만약 옛사람과 똑같이 하려고만 한다면 문장의 도(道)에 가까움을 보기에 부족할 것이다.
 
2.말세의 습속은 귀로 얻어들은 것만을 귀하게 여기고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천시한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풍속은 지위와 명망으로만 저울질하니, 비록 경홍의 글씨로도 간혹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경홍은 물론 속으로야 흔들림이 없었겠지만, 겉으로는 승복하는 시늉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일찍부터 경홍을 위해 이러한 세태를 분하게 여겨왔다. 사람들이 경홍의 손에서 나왔음을 알기 때문에 제멋대로 비평을 가했던 것인데, 가령 경홍이 왕우군의 글씨를 임서한 것을 금석(金石)에 새겨 섞어 전한다면, 과연 이를 가려낼 자가 있을까. 대개 “눈빛만 스쳐도 도의 소재를 아는” 경우를 제외하면, 반드시 양자운과 같은 이를 기다려서야 알게 되는 문장의 오묘함과는 애초 같지 않은 것인데도 언제나 이처럼 인정받지 못하니 또한 이상하기도 하구나.
 
 
☑ 지은이 소개
 
최립(崔岦, 1539∼1612)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 호는 동고(東皐)·간이당(簡易堂)이다. 아버지는 최자양(崔自陽), 어머니는 무송 윤씨(茂松尹氏)며, 예안 이씨(禮安李氏)와 결혼해 아들 동망(東望)과 딸 하나를 두었고, 서자로 동문(東聞)과 동관(東觀)이 있다.
1561년(명종 16년) 23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장연(長淵)·옹진(甕津) 현감과 재령(載寧) 군수를 지냈다. 1577년(선조 10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질정관으로 첫 번째 사행에 나섰으며, 귀국 후 재령 군수로 재차 부임했는데, 이때 해주(海州)에 은거 중이던 이이와 교유했다. 성천 부사(成川府使), 장례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 진주 목사(晉州牧使)를 거쳐,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원병을 청하는 문서를 짓는데 능문자(能文者)가 필요하다는 윤두수(尹斗壽)의 추천으로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에 발탁되었으며, 같은 해 주청사(奏請使)로 임명되었지만 직책에 걸맞지 않다 해서 부사(副使)의 신분으로 사행길에 올랐다. 이때 지은 글들이 중국 관료들로부터 크게 칭찬받았지만 가문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끝내 요직에 등용되지 못했다. 1596년부터 1602년까지 간간이 안변 부사(安邊府使), 공주 목사(公州牧使), 여주 목사(驪州牧使) 등의 외직을 얻어 나가기도 했으나 주로 승문원 제조로서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전담했다.
개성에 우거했을 때는, 그의 문(文)과 차천로(車天輅)의 시(詩), 한호(韓濩)의 서(書)를 일컬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62세 때는 평양으로 옮겨 간이당(簡易堂)을 짓고 머물렀다.
문집으로 ≪간이집≫ 9권 9책이 있으며,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과 ≪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십가근체(十家近體)≫ 등을 편찬했다.
 
 
☑ 옮긴이 소개
 
김우정
단국대학교 한문교육과를 졸업한 뒤, 지곡서당(芝谷書堂)으로 더 잘 알려진 태동고전연구소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 선생에게 사사했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정조의 문체정책과 문학론 연구>로 석사 학위를, <간이 최립 산문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한한대사전≫ 편찬원으로 근무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박사 후 연수 과정을 마쳤다. 현재 단국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교 시절 읽은 적벽부(赤壁賦) 한 구절과 조부의 유품 속에서 찾은 ≪대학(大學)≫의 글귀에 매료되어 한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지금까지 줄곧 한국과 중국의 한문 산문이 지닌 문학성을 탐구하는 작업에 매달려 왔다. 한문 산문을 분석하고 이와 관련된 여러 비평 자료를 검토하면서 고전이 오늘날까지도 공명하는 무한한 이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새삼 느끼고 있다.
한·중의 명편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과 이론과 창작 양 방면이 공평하게 고려된 새로운 한문 산문사를 집필하는 일이 최근의 관심사이며, 한자와 한문을 올바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강한 황경원의 고문론>, <월정 윤근수 산문의 성격>, <15세기 기서문의 성격과 의의>, <조선 중기 복고적 산문의 두 경향>, <유몽인 산문에 있어서 자득의 의미와 실현양상>, <선조·광해 연간 문풍의 변화와 그 의미>, <허균 산문의 연구>, <대학 교양 한자 교육의 현황과 과제> 등이 있으며, 공역서로 ≪국역 치평요람≫, 저서로 ≪최립 산문의 예술 경계≫가 있다.
 
 
☑ 목차
 
제1부 학문의 길, 문학의 길
박 수재와 헤어지며 남기다 留別朴秀才序
평양에서 판각한 ≪맹자≫ 대문의 발문 平壤刻板孟子大文跋
오 수재에게 주다 贈吳秀才序
양현사의 기문 兩賢祠記
고산구곡담의 기문 高山九曲潭記
여 장로 시권의 서문 如長老卷序
습재 권벽 시집의 서문 權習齋詩集序
사명을 받들어 중국에 가는 박 첨추를 전송하는 시서 送朴僉樞子龍奉使赴京師詩序
 
제2부 서화(書畵)에 담긴 뜻
<삼청첩>의 서문 三淸帖序
<낭간권>의 서문 琅玕卷序
한경홍 서첩의 서문 韓景洪書帖序
<산수병>의 서문 山水屛序
퇴계의 글씨를 붙여 만든 작은 병풍에 쓰다 退溪書小屛識
이아계가 시를 써넣은 산수도에 쓰다 李鵝溪題詩山水圖識
관동 지역의 승경을 시와 그림으로 엮은 책의 발문 關東勝賞錄跋
하대이의 대나무 그림에 쓰다 河大而畫竹識
금계수가 소장한 산수도에 쓰다 錦溪守所有山水圖識
이 소윤이 소장한 옛 그림에 쓰다 李少尹所有古畫識

제3부 전쟁의 상흔과 관리의 도리
권 원수가 행주에서 승리한 것을 기리는 비문 權元帥幸州碑
유 원외에게 사례하는 자문 咨謝劉員外
도총섭 엄 상인에게 준 시서 贈都總攝嚴上人詩序
표설 豹說
호남 관찰사로 가는 구 감사를 전송하는 글 送湖南具監司序
영남 관찰사로 가는 허초당 선생을 전송하는 글 送許草堂先生觀察嶺南序
도체찰사의 막부로 가는 이 응교를 전송하는 글 送李應敎赴都體察使幕府序
호서에 시관으로 가는 정랑 이자민을 전송하는 글 送李正郞子敏湖西試官序
 
제4부 인생의 뒤안길에서
열승정의 기문 閱勝亭記
금강산을 유람하며 엮은 권첩의 서문 遊金剛山卷序
<징영당십영>의 서문 澄映堂十詠序
고사리 진소에 부임하는 송 첨지를 전송하는 글 送宋僉知赴高沙里鎭序
<춘천별어첩>의 발문 春川別語帖跋
고 고려 통헌대부 추밀원 직부사 남공의 묘표 故高麗通憲大夫樞密院直副使南公墓表
절필문 絶筆文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2012년 6월 21일 목요일

잊을 수 없는 나날들



☑ 책 소개

우리와 꼭 닮은 과거를 가진, 그러나 우리와 정반대의 길을 택했던 베트남.
20세기의 나폴레옹으로 불리는 베트남 독립전쟁의 영웅 보응우옌잡 장군이 베트남의 가장 어려웠던 시절을 회고한다. 프랑스 제국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민들을 이끌고 투쟁했던 나날들, 그리고 저자가 직접 목도한 베트남의 아버지 호찌민의 진솔한 모습도 생생히 그려져 있다. 한−베 수교 2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베트남에 대해 알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


☑ 출판사 책 소개

≪잊을 수 없는 나날들≫은 베트남 인민군 사령관 보응우옌잡 대장의 회고록이다. 빼앗긴 독립과 자유를 되찾고 조국을 통일하고 주권을 지키기 위해 베트남은 20세기에만 무려 세 번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프랑스 식민 통치로부터의 독립 전쟁, 미국을 주축으로 한 세력과의 통일 전쟁 그리고 중국과의 국경 분쟁이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일본이 항복하자 베트남을 점령하고 있었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남부 베트남에는 영국군이, 북부 베트남에는 중국 장제스 군대가 진주했다. 프랑스는 일본의 베트남 점령으로 잃었던 식민지 종주권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영국과 중국 장제스 정부와 협상을 벌였다. 프랑스는 결국 베트남에서 식민 지배 국가의 종주권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물러갔던 프랑스가 베트남에 다시 진주하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베트남 민족은 강력히 저항했다. 이 저항이 바로 “8월 혁명”으로, 프랑스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의 도화선이 된 남부 인민의 무장봉기를 말한다. 베트남은 1945년 8월 혁명으로부터 1946년 12월까지 앞날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백척간두의 풍전등화와 같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남부 인민 무장봉기를 주도한 보응우옌잡 장군은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는 조국을 위한 호찌민 주석의 강렬한 이미지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잊을 수 없는 나날들≫은 현재의 베트남을 되돌아보고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기록이다. 베트남의 전설적인 영웅 보응우옌잡 장군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끈 사람으로, 베트남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리트엉끼엣 장군과 쩐흥다오 장군에 버금하는 위대한 장군이다. 그의 호찌민 주석에 대한 존경심, 애국심과 겨레 사랑 정신이 바로 오늘의 베트남을 있게 한 근원이었다. 호찌민 주석과 보응우옌잡 장군이 없었다면 베트남은 독립과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이 기록에서 두 위인의 조국 사랑과 겸손함을 엿볼 수 있다.


☑ 책 속으로

●섣달에는 호 큰아버지가 쓴 <자아비판>이란 제목의 기사가 여러 신문에 게재되었다.
“나를 믿고 신뢰했기 때문에 동포들은 국가의 운명을 나의 어깨에 맡겼습니다. 배의 키를 잡은 나의 임무는 조국이라는 배로 어떻게 하든 풍랑을 넘어 행복이란 부두에로 인민들을 안전하게 도착하게 하는 것입니다….”
“독립을 되찾은 지 5개월이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어떠한 나라로부터도 승인을 받지 못했습니다.”
“모든 전사들이 맹렬히 싸웠지만, 아직 우리의 항전은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행정부 관리들이 그들의 업무를 잘하고 청렴했지만, 부정부패가 아직 완전히 청산되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정부가 부단히 노력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행정이 이곳저곳에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 못합니다.”
“누군가 이런 부족한 점들에 대해 시간이 부족해서, 신생국이기 때문에, 또는 이런저런 이유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 점에 대해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에 언급된 부족한 점들은 우리 자신의 잘못인 반면에, 우리가 이룬 성공은 인민들의 단결된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일반 노동자들은 오늘의 국가를 바로 자신의 나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점은 매우 신기한 일이다. 베트남 역사상 봉건 조정과 소수 지배 계층이 항상 대다수인 노동자 계급을 지배하고 착취해 왔다. 그들은 항상 소수의 이익을 늘려 가며 다수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다. 오늘날 베트남은 다수의, 노동자 계급의 국가가 되었다. 국가는 인민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아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미래엔 꼭 쟁취하게 될 완전한 행복을 그들에게 안겨 주기 위해 날이면 날마다 항상 노력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은 인민의, 조국의, 혁명의, 새 정권의, 새 체제의 가장 숭고한 화신인 호 큰아버지와 함께하고 있다.


●1946년 정월 초엿새, 모든 시와 마을 곳곳은 깃발과 등과 꽃으로 뒤덮였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인민들이 기꺼이 투표소로 향했다.
그들의 투표권은 하루아침 하룻저녁에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투표의 자유는 기나긴 투쟁과 수많은 피와 눈물의 대가로 얻어진 것이었다. 바로 이 투표 때문에 어제까지도 피를 흘려야 했던 것이다. 선거운동을 하는 도중 42명의 간부들이 남부 지역에서 살해당했다.
이날은 국가의 새 주인이 실제로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는 날이었다. 푹옌 읍에서는 거의 100세에 가까운 노인이 손자에게 투표소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는 선거 관리 위원에게 각 후보자들의 약력과 업적에 대해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투표용지를 조심스럽게 손에 쥐고서는 최종 결정을 하기 전까지 오래도록 고민했다. 젊은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투표용지에서 발견했다. 노인들은 기나긴 식민 통치 기간 동안 노예 생활로 겪었던 굴욕감에서 벗어나는 자유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본인 스스로가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는 충만한 기쁨을 누리고자, 심지어 눈이 먼 장애인들조차도 투표소에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오늘 아침의 회담에서 프랑스 대표단에게 말했다. “베트남의 모든 전사들은 조국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수많은 난관을 겪었기에 오로지 명예와 형평 속에서 평화적인 방법만 수용할 것이오. 수천 년 동안 한 민족의 이름 아래 투쟁과 노동으로 단련되었기에 나는 당신들에게, 남부가 베트남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한 언제고 때가 되면 모든 베트남 사람들이 남부를 조국의 품안으로 되찾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할 것이라는 걸 확언할 수 있소. 만약 우리의 목소리에 응답이 없거나 협정이 존중되지 않는다면, 나중에 발생하게 될 그 어떠한 것에도 우리는 책임질 수 없소이다…. 우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게 될 것이오.” 우리는 프랑스인들에게 우리가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여전히 식민주의자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우리는 반동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할 수 있었다. 이 회담을 통해 깨달은 것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이 정의의 투쟁을 요구하고 있고, 외교적 활동은 반드시 인민의 무장 역량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우리 민족은 강해져야 한다. 우리나라는 강해져야 한다. 외교적인 업무는 그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어느 날에 행한 큰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겨 본다면, “힘은 징과 같고, 외교적 활동들은 징 소리와 같다. 징이 크면 소리도 큰 것이다”.


●적은 남부 득호아에 대규모 공격을 위해 9월 22일 비행기, 탱크, 장갑차로 구성된 2000명의 군을 투입했다. 아침부터 밤늦도록 하루 온종일 우리의 군과 유격대는 적을 방어해, 수십 대의 탱크, 수송차를 파괴하고, 수많은 적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고, 적기 1대를 격추했다(이것이 아마 베트남 전장에서 보병이 격추한 첫 번째 적기가 아닐까 싶다). 빈록에서는 적군이 12지구의 일부 병력을 포위하려고 했다. 적의 정보를 미리 입수한 우리는 부대를 은밀히 외곽으로 이동하고, 적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역으로 적을 포위해 공격함으로써 적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중남부에서 우리 군과 인민들은 대오까, 안케, 꼰뚬에서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우리는 또한 적이 새로 구축한 초소를 공격해, 특히 낌버라이 전투, 반자 전투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떠이응우옌에서도 우리의 세력이 상당히 확장되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 지은이 소개

보응우옌잡(Vo Nguyen Giap, 1911∼ )
중부 베트남의 꽝빈 성 레투이 현 록투이 면 안싸 마을에서 1911년 8월 25일 출생했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통치를 반대한 반식민주의 학자의 아들로 1926년 학생 시절 베트남 청년혁명당에 가입했고 1930년에 학생파업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수개월 후에 석방되었다. 1938년 결혼해서 공산당에서 활동했으나 1939년 공산당이 불법으로 선고되어 부인과 처제가 체포되었다. 처제는 단두대로 보내져 처형되고 부인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15년 형으로 감형되었으나 3년 뒤에 감옥에서 죽었다. 보응우옌잡 장군은 베트남의 민족 지도자 호찌민과 함께 베트남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호찌민을 도와 1945년 9월 2일에 프랑스 식민 통치로부터의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1946년 12월 19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총사령관 겸 총군사위원회 비서로 9년간에 걸친 독립 전쟁을 지휘해 승리로 이끌었다. 잡 장군은 어떤 군사학교도 다니지 않았고, 군대의 어떤 직함도 가져 본 적이 없었으나 1948년 5월 28일 37세의 나이로 베트남 최초의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 8월에는 새로 설립된 최고국방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9년간에 걸친 프랑스와의 장기전에서 탁월한 전술을 개발하고 장병들을 훈련해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베트남의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고, 베트남은 완전한 독립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 뒤 제 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도 미국을 물리치고 베트남 전쟁을 승리를 이끌어 1975년 4월 30일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을 통일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4년부터 1976년까지 정치부 위원, 중앙군사위원회 비서, 베트남 인민군 총사령관, 국방부 장관을 계속 맡았고, 1955년부터 1991년까지 국방위원회 부주석을 지냈다. 잡 장군은 50년간의 정치 및 군사 활동 가운데 30년간을 베트남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재직한 불세출의 영웅으로, 군신으로까지 여겨지는 베트남 민족 영웅이다.1961년 자신의 전쟁 경험을 토대로 하여 게릴라전에 관한 ≪인민의 전쟁, 인민의 군대≫를 집필했다.


☑ 옮긴이 소개

안경환
안경환은 195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했으며, 베트남의 국립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어문학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외국어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생활 베트남어회화≫, 역서로는 호찌민의 ≪옥중일기(獄中日記)≫, 응우옌주의 ≪쭈옌끼에우≫, 당투이쩜의 ≪지난 밤 나는 평화를 꿈꾸었네≫, 권정생의 ≪몽실 언니≫와 김동인의 단편집 공동 번역이 있다. 베트남 정부로부터 친선문화진흥공로훈장, 평화우호훈장을, 호찌민 시로부터 휘장, 응에안 성으로부터 호찌민 휘장을 수훈했고, 베트남 문학회로부터 외국인 최초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2012년 4월 17일 화요일

동몽선습 외



☑ 책 소개

조선시대에 가장 ‘핫’한 조기교육 교재는 무엇이었을까? 아래로는 동네 서당의 꼬맹이들부터 위로는 왕세자까지 누구나 앞다투어 배웠던 문학 교재를 소개한다. 바로 ≪동몽선습≫이다. 문장, 도덕, 역사를 모두 아우르는 종합교재다.

이 책은 박세무의 ≪동몽선습≫과 함께, ≪동몽선습≫의 영향을 받아 찬술되고 간행된 조종호의 ≪동몽의학≫, 지송욱의 ≪유몽선습≫ 그리고 이정순의 ≪유몽선습≫을 최초로 번역하고 주석하여 읽기 쉽도록 구성됐다. 이 책은 ≪동몽선습≫의 이본들을 서로 비교하여 우리나라 몽학의 전개과정 및 역사를 조망하는 동시에 당시의 정치·문화·교육의 상관성까지 고찰할 수 있게 한다.




☑ 출판사 책 소개

≪동몽선습≫은 박세무(1487∼1554)가 중종 36년(1541)에 저술했으며, 3년 뒤인 중종 39년(1544)에 이르러 간행되었다. ≪동몽선습≫은 원래 박세무가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제자 문인 등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여 왕세자는 물론 사림의 자제들이 몽학의 기초 교재로서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현종 11년(1670)에 노론의 영수 송시열(1607∼1689)이 ≪동몽선습≫의 발문을 쓸 정도로 조선 시대 사림에게서 몽학에 유용한 교재로 인정받게 되었다. 조선 시대 사림들은 성리학적 윤리도덕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조정에서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구현하고, 향촌에서는 삼강오륜의 풍속을 바로잡고자, ≪주자가례≫·≪소학≫·≪동몽선습≫ 등을 보급했던 것이다. 궁실에서는 박세무의 제자인 노수신(1515∼1590)이 세자들을 가르치는 서연(書筵)에 참여하던 1580년 무렵부터 처음 소개하여 사용했으며, 송시열이 세자 교육을 담당했던 1670년 무렵을 거쳐, 영조 18년(1742)에 영조가 직접 쓴 서문을 붙인 ≪동몽선습≫이 간행되면서 당당하게 국정 교과서로 자리하게 되었다. 고종 17년(1880)에도 세자에게 가르칠 교재 목록 가운데 ≪동몽선습≫을 포함시켰다.

일찍이 심수경(1516∼1599)은 ≪동몽선습≫이 오륜의 내용을 기술하고 역대의 사실을 기술하여 경사지략(經史之略)을 아우르고 있어 동몽이 마땅히 익혀야 할 책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동몽선습≫의 내용은 1742년에 영조가 쓴 서문과 1670년에 송시열이 쓴 발문을 제외하면, 서론에 해당하는 내용을 시작으로 부자유친·군신유의·부부유별·장유유서·붕우유신의 오륜의 내용을 서술하고, 뒤이어 총론에서는 먼저 모든 행실의 근본인 효순(孝順)의 중요성을 강조한 뒤, 중국 상고시대의 삼황오제부터 명나라까지의 역대 사실을 기술했으며,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단군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역사를 간략하게 기술했다.

몽학의 교재로서 그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한 영조는 ≪동몽선습≫ 언해본도 간행하도록 명하여 널리 보급시켰는데, 그 결과 개화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동몽의 교학을 위한 필수적인 교재로서 자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당 교육에서 ≪동몽선습≫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민족정신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 책 속으로

●이 책은 바로 우리나라 선비가 지은 것이다. 첫머리에 오륜(五倫)을 모아 묶고, 다시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벗과 벗 사이의 도리를 차례대로 늘어놓았으며, 태극이 비로소 가름하던 때부터 삼황오제(三皇五帝)와 하·은·주 삼대와 한·당·송나라를 거쳐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왕조의 지나온 계통을 자세하게 남김없이 갖추어 기록하고, 무릇 우리나라에 미쳐서는 단군으로부터 시작하여 삼국시대를 거쳐 우리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기록했다. 글이 비록 간략하나 기록한 범위가 넓고, 책이 비록 작으나 포함한 내용이 크다.

●그러므로 벗을 고름에 반드시 단정한 사람으로 하며, 벗을 가림에 반드시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해야 한다. 마땅히 착한 일을 권장하여 믿음을 쌓아야 하며, 매우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권면하고 격려하면서 충실하게 알려 주고 착하게 인도하다가 안 맞으면 사귐을 멈춰야 한다. 만일 혹시라도 사귈 때 실력을 쌓고 학문을 연마하면서 서로 권면(勸勉)하고 격려하지 아니하고, 다만 즐기고 붙어 다니면서 장난하고 농담하는 짓을 서로 친숙하게 한다면 어찌 오래 사귄다 한들 멀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모님께서 자기를 사랑해 주시거든 기뻐하여 잊지 않으며, 미워하시거든 두려워하되 원망하지 않는다. 부모님께서 잘못이 있으시거든 말리는 말씀을 드리되 거스르지 아니하고, 세 번 말리는 말씀을 드렸는데도 듣지 않으시거든 울면서 따르며, 부모님께서 화가 나서 매질하여 피가 흐르더라도 감히 미워하고 원망해서는 안 된다. 살아 계실 때에는 공경함을 다해야 하고, 늙어 봉양할 때에는 즐거움을 다 드려야 하고, 병들어 아프실 때에는 근심을 다해야 하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슬픔을 다해야 하고, 제사를 지낼 때에는 엄숙함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무릇 사람이 사람으로 더불어 서로 사귐에 반드시 예의로 서로 대접할지니 예모란 자는 사람을 높이는 도나 곧 자기를 높이는 바라. 스승과 어른과 붕우에게는 무론이거니와, 곧 내가 부리는 종과 서로 알지 못하는 장사에게도 또한 마땅히 서로 마땅한 예모로써 대접할지니, 내가 능히 예모로 사람을 대접하면 사람이 또한 예모로 나를 대접하나니 이것이 자기를 높이는 도가 아니냐? 만일 거칠고 속된 말과 오만한 모양으로 사람에게 더하면, 사람은 진실로 손상됨이 없고 한갓 스스로 가르침을 잃는 증거로 사람에게 나타나서 사람으로 하여금 경천히 여기게 할 따름이니, 사람을 만홀히 함은 곧 자기를 만홀히 함이라. 경계하고 경계할지어다.


☑ 지은이 소개

박세무(朴世茂, 1487∼1554)

≪동몽선습≫의 지은이 박세무(1487∼1554)는 성종 8년에 태어난 조선 시대 사림가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신동(信童)이고,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 중검(仲儉)이며, 어머니는 부사 이관식(李寬植)의 딸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자는 경번(景蕃)이며, 호는 소요당(消遙堂)이다. 중종 11년(1516) 생원시에 합격한 뒤 조광조, 김정 등 신진사림들과 교유하기도 했으나 기묘사화가 있은 다음 크게 상심하고 실의해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러다가 중종 26년(1531)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가 헌납을 거쳐 사관(史官)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곧은 성정과 직필(直筆)로 말미암아 최고의 권신이던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받아 중종 34년(1539)에 오늘날 경상남도 하동인 마전군수로 밀려났다가 곧바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중종 39년(1544)에 전적(典籍)·참교(參校)가 되어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그는 조광조의 신원(伸寃)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며, 그해에 ≪동몽선습≫을 간행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던 이듬해 사복시정이 되었다가 안변부사로 나갔으며, 그 뒤에 내자시정·내섬시정·군자감정 등을 두루 거쳤다.

조종호(趙鍾灝)

≪동몽의학(童蒙宜學)≫의 지은이 조종호(趙鍾灝)는 조선 말기의 문인으로서 본관이 한양(漢陽)이고, 자가 광지(光之)이며, 호가 서애(書崖)다. 야곡(冶谷) 조극선(趙克善)의 후손으로 명문가의 가업을 계승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학문에 전념하고 자제들의 교육에 열의를 다했다. 그리하여 고종 30년(1893)에 ≪야곡선생집(冶谷先生集)≫을 간행했고, 1899년에는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동몽의학(童蒙宜學)≫을 찬술했다.

지송욱(池松旭)

≪유몽선습(幼蒙先習)≫의 지은이 지송욱(池松旭)은 일제 강점기에 서점을 운영하면서 출판업에도 종사하던 지식인으로, 소설가 박종화의 집에서 신구서림(新舊書林)이라는 서점을 운영하면서 ≪유년필독≫·≪대한역사≫·≪동국사략≫·≪월남망국사≫ 등의 역사서와, ≪구운몽≫·≪춘향전≫·≪숙영낭자전≫ 등의 고소설 및 ≪귀의성≫·≪치악산≫·≪금수회의록≫ 등의 신소설을 발행했다. 그리고 1915년에 몽학 교재인 ≪유몽선습(幼蒙先習)≫을 발행한 이래로 1916년에는 ≪진수당감정시행간례휘찬(進修堂監定時行簡禮彙纂)≫을 간행해 관혼상제(冠婚喪祭)와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에 관해 설명했으며, 또한 ≪통감언해(通鑑諺解)≫(1920), ≪고문진보후집(古文眞寶後集)≫(1920), ≪상밀주석사략언해(詳密註釋史略諺解)≫(1921) 등을 발행했다.

이정순(李正淳)

≪유몽선습(幼蒙先習)≫의 지은이 이정순(李正淳)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일제 강점기에 경기도 안성에서 광안서관(廣安書館)이라는 출판사 겸 서점을 운영하면서 1917년에 ≪천자문≫, 1926년에 ≪유몽선습≫ 등을 간행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 옮긴이 소개

조기영

무외정사(無外精舍)의 주인 조기영(趙麒永)은 강원대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홍만종 시학 연구>로 석사, <하서 김인후 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도회 한문연수원과 중앙승가대학 불전국역연구원 등에서 한문 공부를 했고, 권우 홍찬유 선생으로부터 지어재(之於齋), 연민 이가원 선생으로부터 인재(仁齋)라는 아호를 받았다. 연세대 국학연구원과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했으며, 연세대·강원대·공주교대·상지대·한성대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충북대 우암연구소 전임연구원 및 고려대 교육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있으며, 경희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조광조 평전인 ≪위대한 개혁≫을 비롯해 ≪삼봉 리더십≫·≪하서 김인후의 시문학 연구≫·≪하서시학과 호남시단≫·≪화랑세기≫·≪한문학의 이해≫·≪한국시가의 정신세계≫·≪한국시가의 자연관≫·≪동몽선습≫·≪백련초해≫·≪명심보감≫·≪백유경≫·≪반야심경≫·≪초발심자경문≫·≪경제문감≫ 등 90여 편의 논저를 냈으며, 국문학 및 동양고전 전반에 걸쳐 연구하고 강의하고 저술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 목차

동몽선습(童蒙先習)

박세무(朴世茂)

어제동몽선습서(御製童蒙先習序) ··········3

서론(緖論) ····················9

부자유친(父子有親) ···············11

군신유의(君臣有義) ···············13

부부유별(夫婦有別) ···············15

장유유서(長幼有序) ···············18

붕우유신(朋友有信) ···············20

총론(總論) ···················23

동몽선습발(童蒙先習跋) ·············45


동몽의학(童蒙宜學)

조종호(趙鍾灝)

동몽의학서(童蒙宜學序) ·············53

동몽의학서(童蒙宜學序) ·············58

천도(天道) ···················61

지리(地理) ···················63

인사(人事) ···················65

친속(親屬) ···················67

오륜(五倫) ···················69

일용(日用) ···················71

행실(行實) ···················73

동물(動物) ···················74

학문(學問) ···················77


유몽선습(幼蒙先習)

지송욱(池松旭)

서론(緖論) ···················81

부자유친(父子有親) ···············83

군신유의(君臣有義) ···············85

부부유별(夫婦有別) ···············87

장유유서(長幼有序) ···············89

붕우유신(朋友有信) ···············91

총론(總論) ···················93


유몽선습(幼蒙先習)

이정순(李正淳)

제1과 총론(總論) ················113

제2과 천상(天象) ················115

제3과 지리(地理) ················120

제4과 물상(物象) ················125

제5과 인륜(人倫) ················133

제6과 부자유친(父子有親) ············136

제7과군신유의(君臣有義) ············138

제8과 부부유별(夫婦有別) ············140

제9과 장유유서(長幼有序) ············142

제10과 붕우유신(朋友有信) ···········144

제11과 결론(結論) ················146


해설 ······················153

지은이에 대해 ··················162

옮긴이에 대해 ··················165

릴케의 편지


☑ 책 소개


진로를 고민하는 시인 지망생과 삶이 고된 젊은 여인에게 릴케가 보낸 편지를 책으로 엮었다. 모든 인습적 통념을 떠나 각자의 내면적 필연성을 삶의 지표로 삼으라는 시인의 조언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


☑ 출판사 책 소개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릴케를 대선배로 흠모하고 있던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Franz Xaver Kappus, 1883∼1966)가 릴케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20년 동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릴케가 죽은 후 바이마르에 설립된 릴케 문서박물관에 기증한 것을 1929년 인젤 출판사에서 출판한 것이다. 생전에 1만 통이 넘는 편지를 쓴 릴케는 스스로 ‘자기 본성의 풍부한 수확’을 편지에 담았다는 고백에 덧붙여 자기가 쓴 모든 편지의 출판은 인젤 출판사의 제안에 따라 수신인 마음대로 결정해도 좋다는 유언을 남겼다. 인젤 출판사는 이 유언에 따라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출간했는데, 독자들이 좋은 호응을 보이자 곧이어 릴케가 1919∼1924년 사이에 리자 하이제에게 보낸 편지를 묶어서 ≪젊은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를 인젤 문고로 출간했다. 릴케는 통신 기술이 발달해서 빠른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20세기에도 18, 19세기에 만개했던 ‘느린’ 소통 수단인 편지로 수많은 사람들과 내밀한 교류를 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카푸스 자신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적성에 맞지 않은 진로를 두고 고민하는 후배에게 선배로서 성심성의를 다해 조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카푸스에게 첫 답장을 쓰던 당시 릴케 자신이 그의 인생과 문학에서 중요한 전환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은 단순한 조언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에는 릴케 자신의 새로운 인생관과 문학론에 대한 모색 과정의 고백도 들어 있다. 고독과 성숙과 사랑, 이 세 가지 의미의 긴밀한 연관 관계야말로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릴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떠받치는 중심 주제다. 고독은 내면 성숙을 위한 집중의 순간이고, 사랑은 내면 확장의 계기이므로, 서로 상대방의 고독을 지켜 주는 사랑을 통해 자연을 포함한 세계 전체와 내적으로 소통하는 창조적 인간, 그것이 릴케가 카푸스에게 권하고 스스로도 추구한 목표였던 것이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번역은 ≪Briefe an einen jungen Dichter≫(Insel Verlag, Leipzig, 1929)를 원전으로 삼았다.

릴케의 ≪젊은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는 ‘시인과 젊은 여성’의 관계에서 흔히 추측할 수 있는 로맨틱한 꿈과 연애 감정 교환의 기록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혼란한 역사의 격동기에 극심한 궁핍 속에서도 어떻게든 삶의 한 귀퉁이를 지탱해 보려고 애쓰던 한 여인에게 보내는 시인의 위문편지일 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며 삶의 절망적 의미에 공감하는 고독한 자의 동지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번역은 호르스트 날레브스키(Horst Nalewski)가 인젤(Insel) 출판사에서 2003년에 펴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여성과의 서신 교환(Rainer Maria Rilke. Briefwechsel mit einer jungen Frau)≫ 중에서 릴케의 편지를 옮긴 것이며, 시가 첨부된 릴케의 마지막 편지는 이 판본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 책 속으로

●아무도 당신에게 충고하거나 당신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말입니다.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십시오.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령하는 그 근거를 탐구하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글쓰기가 좌절되었을 때 과연 죽을 수밖에 없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무엇보다도 이것이 중요합니다. 깊은 밤 가장 조용한 시간에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나는 글을 써야 하는가? 깊은 답을 찾아 당신의 내면으로 파고드십시오. 그리고 그 답이 긍정적이라면, 당신이 그 심각한 질문을 강력하고 단순하게 “나는 써야만 한다”라는 말로 응답할 수 있다면, 당신의 인생을 그 필연성에 따라 세우십시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계산하거나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 나무처럼 성숙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무는 수액을 재촉하지 않고, 봄날의 폭풍 속에도 안심하고 서서, 그 폭풍 뒤에 여름이 오지 않을까 봐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여름은 그래도 옵니다.

●어쩌면 모든 용들이 언젠가 한 번은 우리를 아름답고 용기 있게 볼 순간을 기다리는, 우리 삶의 공주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끔찍한 것들은 모두 그 가장 깊은 근본에서는 우리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곤경에 빠진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냇물은 아무 악의도 없건만

그 물살 끝없이 부딪쳐 시달리는 한 떨기 꽃이여.

산만하고 급한 물살이 그 꽃 헤집어 놓을지언정

그것이 시냇물의 본뜻은 아니건만….

아아, 소용돌이치는 감정에 내던져진

우리의 신세도 다르지 않거늘.

그 감정들 우리와 관계있는가? 그래도

세계내존재가 이 넘치는 우연에 균형을 맞추나니.


☑ 지은이 소개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는 지난 세기 전환기의 격동 속에서 실존의 고뇌를 온몸으로 겪으며, 그 치열한 삶을 문학적 형상으로 승화시켜 ‘현대의 고전’ 반열에 올려놓은 시인이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실의 직할지였던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불우한 환경을 딛고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독일어권 시인의 한 사람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모친은 그에게 여섯 살까지 여자아이의 옷을 입혔고, 부친은 그를 장트[聖] 푈텐 육군유년실과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렇게 그의 어린 시절은 각각 첫딸을 잃은 모친과 장교가 되지 못한 부친의 대리 보상을 위한 제물이 되었고, ‘잃어버린 어린 시절’은 훗날 그의 작품에 중요한 모티프로 나타나게 된다.

릴케는 육군고등실과학교를 중퇴하고, 백부의 후원으로 인문고등학교 졸업 시험에 합격한 후 1895년 겨울 학기부터 프라하대학교에서 문학, 역사, 미술, 법학 등을 공부했다. 그는 사관생도 시절부터 부지런히 시를 써서 발표했으며, 대학입시 준비 중에 첫 시집 ≪인생과 노래(Leben und Lieder)≫(1894)를 출판했다. 그러나 그의 본격적인 문학 수업은 뮌헨대학교로 옮긴 후,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1861∼1937)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릴케보다 14년 연상이었던 루는 릴케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쳐 주고, 두 차례나 러시아 여행에 동행해 톨스토이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평생 동안 릴케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

그 후 릴케는 북독일의 예술가 마을인 보릅스베데의 풍경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그 결과를 ≪형상시집(Buch der Bilder)≫(1902)으로 펴냈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여기서 만난 조각가 클라라를 아내로 맞이했으나(1901), 딸 루트가 출생한 직후 백부의 유산에서 받아 왔던 지원이 갑자기 끊기는 바람에 신혼부부는 생존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릴케는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1840∼1917)에 대한 평전 집필을 청탁받고 파리로 갔는데 릴케의 파리 체험은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그는 로댕으로부터 ‘끝없는 작업과 인내’라는 예술가의 자세를 배웠고, 그것을 ‘사물시(Ding Gedicht)’로 구현하려 했다.

이후 릴케는 덧없음과 고립으로 요약되는 삶의 부정적 의미에 시달리면서 ‘정처 없는 떠돌이’처럼 유럽의 전 지역을 돌아다니는 한편, ‘눈으로 본 시’가 아닌 ‘마음으로 느낀 시’를 쓸 방법을 찾아 헤맸다. 마침내 릴케는 1922년 초 불과 두 달 사이에 두 개의 장편 연작시 ≪두이노의 비가(Duineser Elegien)≫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Sonette an Orpheus)≫를 완성했다. 필생의 과업을 마친 그는 4년 후 오랫동안 앓아 온 출혈성 백혈병으로 스위스의 발몽 요양원에서 51세에 눈을 감았다.


☑ 옮긴이 소개

안문영

안문영은 서강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독문학을 전공하고 독일 본대학교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후기 시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4년 이후 충남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독어독문학회,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주요 관심 분야는 현대 독일 시와 번역 이론, 그리고 릴케와 괴테의 작품에 나타난 동양적 요소 등이다. 괴테, 릴케, 첼란, 구체시, 문학 용어 번역 등에 관한 논문이 다수 있으며, 역서로 ≪릴케: 두이노의 비가/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문학과지성사, 1991/1994), ≪제니 에르펜베크: 늙은 아이 이야기≫(솔출판사, 2001), ≪로버트 슈나이더: 오르가니스트(원제: 잠의 형제)≫(북스토리, 2006) 등이 있다.


☑ 목차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1

젊은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 ············73

해설 ······················127

지은이에 대해 ··················140

옮긴이에 대해 ··················143

2012년 3월 7일 수요일

풍자화전



☑ 책 소개


친자식이라 해도 그릇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
김제동 씨도 탄복한 예능계의 비전, 여기 그 비밀이 밝혀진다.
가부키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 예능인 ‘노’에서 “꽃”을 피우기 위한 연기 비결, 훈련 방법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미는 그런 기술적인 노하우가 아니라 연기의 꽃을 피우기 위한 마음가짐, 평생의 수양에 있다.
연기자뿐 아니라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인생 지침서다.


☑ 출판사 책 소개

『풍자화전』은 일본의 극 노의 대성자 제아미가 저술한 최초의 노 이론서다. 걸출한 노의 작자일 뿐만 아니라 연출가이자 배우이기도 했던 제아미는, 그의 오랜 실전적 경험과 아버지 간아미로부터의 유훈 등을 토대로 하여 이 명저를 지어 남겼다.

≪풍자화전≫의 주제는 무대 위에서 예술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 연기자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수련’의 태도를 제시하고 강조하는 데에 있다. 제목 중의 ‘풍자(風姿)’라는 말은 ‘예술적으로 표현된 연기의 모습’이라는 뜻을 지녔으니, 그러한 ‘연기 모습에 예술적 매력으로서의 꽃을 개화시키기 위해서 연기자들이 알아야 할 비결을 써서 전한다’는 뜻이 ≪풍자화전(風姿花傳)≫이라는 책명에 담겨 있다고 보면 되겠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이 ≪풍자화전≫이라는 작품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연기 이론서로서, 이후에 나온 제아미의 이론서들의 토대 역할을 한 것으로 간주된다. 오늘날의 노 연기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시사를 던져 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역작으로 평가되며, 노뿐만 아니라 그 밖의 예능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 명저로서의 평가가 자자하다.


☑ 책 속으로

●이하, 내가 젊은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보고 들은 예능 연마 관련의 비결들을 대략 적어 두는 바다.

一. 호색, 도박, 과음, 이 세 가지는 엄금할 것. 이는 선인들의 계율임.

一. 수련은 철저히 하되, 자만심으로 인한 강퍅함은 경계해야 할 것임.

●나이 든 고참 배우가 예술적 꽃을 잃고 시들해져 있는 틈을 타, 젊은 배우가 젊었을 동안에 잠시 갖추게 되는 신선한 일시적 꽃으로 이길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안목이 있는 관객은 이를 간파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연기 경연의 경우에는, 관객의 비판적 안목의 유무 여부에 그 승패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긴 하나 이 경우 유의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다. 나이 오십이 지날 때까지 예술적 꽃을 잃지 않고 간직하고 있을 정도의 명인은, 그 어떠한 젊은 배우의 일시적 꽃으로도 이길 수가 없다. 진정한 명인급에 이르지 못한 고참 배우가 햇병아리 배우에게 지는 것은 예술적 꽃을 이미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무릇 상수에게도 단점이 있게 마련이고, 하수에게도 반드시 장점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간파하는 관객은 별로 없으며, 배우 스스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상수는 명성에 의지하며, 숙달된 것에 자만해 자신의 단점을 알지 못한다. 하수는 애당초 수련과 연구를 게을리하기에 하수인 것이어서, 단점도 깨닫지 못할뿐더러 어쩌다 있는 자신의 장점도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니 상수도 하수도 모두 제삼자에게 비판을 구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수련과 연구를 제대로 다 한 배우는 이를 잘 알고 있다.

아무리 하찮은 배우일지라도 장점이 있다고 인정되면, 상수라도 그것을 보고 배워야 한다. 이것이 실력 향상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만일 장점을 발견하고도 나보다 하수에게서 무슨 배울 것이 있겠느냐며 자만심을 갖는다면, 그 만심에 속박되어 스스로의 단점까지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만심은 궁극적 경지에 이를 수 없는 마음가짐에 다름 아니다.

또한 하수도 만일 상수의 단점을 발견한다면, ‘상수에게도 단점이 있구나. 하물며 나는 초심자이니, 단점이 자못 많을 것이다’라고 여기어, 이를 경계해 남에게도 비판을 구하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수련의 축적으로 이어져 실력이 빨리 향상될 것이다.

●노를 알고 있는 연기자는 스스로의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바도 자각하고 있기에, 중요한 무대에서는 잘 못하는 연기를 삼가고 자신 있는 연기만을 내세워서 하며, 그 연출상의 성과가 좋으면 관객들로부터의 갈채는 필연일 것이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작은 무대나 벽촌에서의 노 흥행 때 자주 공연해 수련을 쌓아 두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수련을 해 간다면, 잘 못하는 부분도 경험이 쌓여 감에 따라 저절로 잘하게 될 때가 올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노의 예술적 중량감도 더해지고 결점도 없어져, 개인적 명성도 좌의 번창도 갈수록 더해지면, 그의 예술적 꽃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남게 될 것이 틀림없다. 이는 초심자 적부터 노를 제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를 제대로 아는 총명함으로 연구에 진력하다 보면, 예술적 꽃의 씨까지도 알게 될 것이다.


☑ 지은이 소개

제아미(世阿彌, 1363∼1443)

제아미(世阿彌, 1363∼1443)는 일본 중세 무로마치(室町) 초기에 활약했던 인물로, 일본이 자랑하는 전통 예능 노(能)를 대성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노의 연기자임과 동시에 연출가이기도 했으며, 노의 대본인 요쿄쿠(謠曲)의 명작을 다수 써서 남기기도 해, 당대를 대표하는 예능인이자 문호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당시 대표적 노 극단 중 하나였던 간제좌(觀世座)의 창시자로 지목되는 아버지 간아미(觀阿彌, 1333∼1384)가 출세의 발판을 막 다졌을 무렵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연 무로마치의 아시카가(足利) 막부 정권이 제3대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 1368∼1394 재위)의 통치하에 정치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다지던 시기였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재능이 남달랐고 외모 또한 출중해, 뛰어난 예능인이자 문호로서의 자질을 천부적으로 타고났던 듯하다. 그가 열두 살 되던 무렵, 그러한 그의 모습이 당대 최고 권력자인 제3대 쇼군 요시미쓰(義滿)의 눈에 들었고 요시미쓰는 43세의 나이로 생을 마칠 때까지 제아미의 절대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제아미와 그의 극단 간제좌는 다른 경쟁 극단 사람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절대 우위의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이 같은 요시미쓰의 비호하에 그가 필생의 과제로 삼았던 예술적 지향점은 관객이나 독자가 최대의 감동을 느끼는 매력적 포인트를 가리키는 개념인 ‘꽃’의 완성이었다. 쇼군 요시미쓰도 예술적 안목이 무척 높아, 그 안목의 수준에 맞추려 제아미도 필사적으로 노력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불교적 선(禪) 개념에 입각한 이 꽃 이론을 토대로 해서 ≪풍자화전(風姿花傳)≫, ≪화경(花鏡)≫ 등의 뛰어난 이론서를 써서 남겼다. 이들 저술들의 책 이름에도 ‘화(花)’ 자가 들어 있음을 보아도 이들 저술들의 중심에 ‘꽃’의 이론이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제4대 쇼군 요시모치, 제6대 쇼군 요시노리(義教)는 제아미를 탄압하여 급기야 늙은 몸으로 사도(佐渡)라는 외딴섬으로 유배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그 같은 시련의 후반생이 잉태해 낸 산물이기라도 하듯, 여기서 번역해 소개하는 ≪풍자화전≫을 위시한 대부분의 그의 역작들이 이 후반생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앞에서 소개한 ≪제아미십륙부집(世阿彌十六部集)≫에 수록된 이론서들이 거의 이 시기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흡사 속살과 껍질의 틈새에 끼어든 불순물의 아픔을 진주로 승화시켜 낸 진주조개처럼 그는 이 암울한 후반생 속에서도 시련에 굴하지 않고 주옥과도 같은 그의 노 작품들 대부분을 지어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의 깊이를 사색의 깊이로 승화시킴으로써, 그가 필생의 과제로 삼았던 연기자로서의 ‘꽃’의 개화를 인생의 무대 위에서도 이룩해 냈던 것이다.


☑ 옮긴이 소개

김충영

김충영(金忠永)은 1985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를 졸업하고, 그해 가을에 일본 쓰쿠바(筑波)대학 대학원에 유학해 제아미(世阿彌)의 노(能)를 연구했다. 1994년에 제아미의 무겐노(夢幻能)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했으며, 같은 해 3월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려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로 봉직해 왔다. 무겐노(夢幻能)란, 노 작품 중에서도 주인공이 유령이나 신 등의 초현실적인 존재인 작품군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여인이 주인공인 작품들을 이전 문학과의 영향 관계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노 이론서 쪽으로도 관심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일본학회 산하 일본문학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 일본학회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서는 ≪일본 고전의 방랑문학≫(고려대학교 출판부, 1997), ≪일본문학 속의 여성≫(공저, 제이엔씨, 2006), ≪한중일 문화코드 읽기/비교문화 상징사전 [난초], [국화], [대나무], [소나무]≫(공저, 도서출판 종이나라, 2005∼2006), ≪일본 고전문학의 배경과 흐름≫(고려대학교 출판부, 2007) 외에 제아미의 노 작품론에 관련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 목차

서언 ·······················1
제1편 각 연령에 따른 수련법의 갖가지
칠 세 ·······················7
십이삼 세부터 ···················9
십칠팔 세부터 ··················11
이십사오 ····················13
삼십사오 ····················16
사십사오 ····················18
오십 넘어 ····················20
제2편 연기 수련법 갖가지
여인 ······················27
노인 ······················29
맨얼굴 ·····················31
모노구루이(物狂) ················32
법사 ······················35
수라 ······················36
신 ·······················38
오니(鬼) ·····················39
가라고토(唐事) ·················41
맺는말 ·····················43
제3편 문답 갖가지
노(能)의 길흉 예지와 그 대책 ···········47
서(序)·파(破)·급(急) ··············51
경연에 대한 대책 ·················53
젊은 배우의 꽃과 고참 배우의 꽃 ··········55
상수는 하수의 본보기, 하수는 상수의 본보기 ····58
수준 차 ·····················61
대사에 맞춘 연기 동작 ··············64
시든 정취 ····················66
꽃은 마음, 씨는 기술 ···············69
제4편 사루가쿠의 기원 전설
신대(神代)의 기원 ················75
인도에서의 기원 전설 ···············77
일본에서의 기원 전설 ···············79
헤이안(平安) 시대의 사루가쿠 역사 ·········82
당대(當代)의 역사 ················85
사루가쿠 제좌(諸座) ···············87
제5편 오의(奧義)
이 책 저술의 취지와 서명의 유래 ··········91
모든 예풍을 두루 섭렵해 익힐 것 ··········93
중인애경(衆人愛敬)과 수복증장(壽福增長) ·····99
발문(跋文) ···················103
제6편 꽃을 체득하는 비결
노의 대본을 짓는 일 ···············107
작자가 유의해야 할 사항 ·············111
강한 것·유현한 것·약한 것·거친 것 ·······114
노를 아는 것 ··················119
제7편 별지 구전
꽃을 안다는 것 ·················125
상수의 꽃 ····················130
닮으려는 의식이 없는 경지와 노목의 꽃 ······132
십체(十體)와 연년 거래(去來)의 꽃 ········134
고정되지 않기 위한 경계심 ············138
비밀스러워야 피는 꽃 ··············139
인과(因果)의 꽃 ·················142
사람들 마음속에 피는 꽃 ·············145
발문 ······················147
해설 ······················149
지은이에 대해 ··················158
옮긴이에 대해 ··················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