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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25일 수요일

영원한 평화를 위해(Zum ewigen Frieden)


도서명 : 영원한 평화를 위해(Zum ewigen Frieden)
지은이 :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옮긴이 : 강영계
분야 : 철학, 정치학
출간일 : 2015년 2월 27일
ISBN :  979-11-304-6130-4 93160
가격 : 16,500원
규격 : 사륙판    제본 : 무선제본    쪽 : 117쪽




☑ 책 소개

인류가 행복할 수 있는 과정과 방법을 칸트가 제시한다.
21세기 지구촌에서는 하루도 그치지 않고 참혹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게다가 세계시민의 평화는 고사하고 국제평화마저도 위협하는 각종 분쟁, 예컨대 자본, 자원, 기술, 정보, 군사 등 무수한 영역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분쟁을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세계시민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에 대한 통찰이 절실히 요구된다.


☑ 출판사 책 소개

이 책은 두 장, 두 개의 보충 그리고 부록 I, II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국가들 간의 영원한 평화를 위한 예비 조항 여섯 개를 포함하는데, 조항 1, 5, 6은 엄격한 금지 법칙에 해당하고 나머지 셋은 시행이 유보될 수 있는 것들이다. 예비 조항 1: 장차 있을 전쟁 요소를 비밀리에 유보하고 체결한 어떤 평화조약도 평화조약으로 타당하지 않다. 예비 조항 5: 어떤 국가도 다른 국가의 체제와 통치에 폭력적으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 예비 조항 6: 어떤 국가도 타국과의 전쟁에서 장래의 평화에 대한 상호 신뢰를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 분명한 적대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제2장에서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위한 확정 조항 세 가지를 제시한다.
영원한 평화를 위한 첫째 확정 조항: 각 국가에서 시민적 체제는 공화적이어야 한다. 칸트는 비록 오늘날 우리가 알며 실행하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는 몰랐지만 민주적 공화제가 바람직한 체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물론 프랑스 혁명과 ≪실천이성비판≫을 기초로 삼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영원한 평화를 위한 둘째 확정 조항: 국제법은 자유국가들의 연방제를 기초로 삼아야 한다. 여기에서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확실한 국제국가의 성립을 배제하고 국가들 간 평화가 실현될 수 있는 국제연맹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영원한 평화를 위한 셋째 확정 조항: 세계시민법은 보편적 우호 조건들에 국한해야 한다. 칸트에 따르면 자연법의 권리는 “지구 표면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권리”로서 보편적 우호의 조건들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 바람직한 정치체제를 민주공화제라고 하지만, 그의 법 사상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법철학을 기초로 삼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법이 있고 신법에 따르는 우주만물의 자연법이 있으며 현실의 실정법은 자연법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칸트의 법 사상은 이와 같은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 책 속으로

함께 생활하는 인간들 사이의 평화 상태(Friedenszustand)는 결코 자연 상태(status naturalis)가 아니다. 자연 상태는 오히려 전쟁 상태다. 즉, 자연 상태는 비록 항상 적대 행위의 발생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적대 행위를 동반하는 끊임없는 위협이다. 그러므로 평화 상태가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
-18쪽

법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러한 체제는 그 자체가 모든 종류의 시민적 조직에 근원적 기초로 놓여 있는 체제다. 그런데 단지 다음과 같은 물음만 남아 있다. 과연 이 체제는 또한 영원한 평화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체제인가?
-21~22쪽


☑ 지은이 소개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이마누엘 칸트는 마구(馬具) 제작자인 요한 게오르크 칸트(Johann Georg Kant)와 아나 레기나(Anna Regina)의 넷째 아이로 1724년 4월 22일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에서 출생했다. 청소년 시절 콜레기움 프리데리키아눔(Collegium Fridericianum) 학교에 다니면서 고전 작가들과 라틴어에 치중했다. 목사이자 신학교수인 프란츠 알베르트 슐츠(Franz Albert Schulz)의 영향이 컸다.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 입학해 철학, 수학, 자연과학을 배웠으며, 마르틴 크누첸(Martin Knutzen) 교수와 친교를 맺고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746년 첫 논문 <생명력의 참다운 평가에 관한 사고>를 썼다. 그 후로 10년간 쾨니히스베르크 내 여러 가정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1755년 불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형이상학적 인식에 대한 첫째 원리>라는 논문으로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사강사(Privatdozent)가 되었다. 1756년 공개토론을 거치면서 <물리학 단자론>을 라틴어로 작성했다. 1764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서 시예술 교수 제의가 왔으나 적임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거절했다. 이듬해에는 쾨니히스베르크 성(城) 도서관의 정식 직원이 되어 고정 수입으로 생활의 안정을 찾고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1770년 형이상학과 논리학 담당 교수로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 정교수로 취임했다. 교수 취임 논문은 <감각계와 가지계의 형식과 원리>였다. 교수 취임 시부터 10년간 구상하고 작성한 ≪순수이성비판≫을 1781년에 출판했으나, 반응이 별로 없자 해설판으로 소책자 ≪모든 미래의 형이상학에 대한 서설≫(1783)을 출판했다. 1785년 ≪도덕형이상학의 정초≫를 출판하고 1786년 대학 총장이 되었다. 1787년 비로소 개인 소유 주택을 구입했고 1788년 두 번째로 총장이 되었으며 그해 ≪실천이성비판≫을 출간하고 2년 뒤 ≪판단력 비판≫을 출판했다.
말년의 저술들은 다음과 같다. ≪단지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1793), ≪공법론≫(1793), ≪영원한 평화를 위해≫(1795), ≪도덕형이상학≫(1797), ≪실용적 견지에서 저술한 인간학≫(1798). 73세 되던 해인 1797년 교수직을 사임한 뒤에도 노화로 쇠약해지는 신체를 이끌고 여전히 연구에 전념했다. 1800년부터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강의록들과 미발표 원고들을 정리해서 출간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1803년 10월, 쇠약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병석에 눕고 말았다. 약 4개월 이상을 병석에서 앓다가 1804년 2월 12일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 옮긴이 소개

강영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교에서 교환교수로 연구했고, 건국대학교 문과대학장, 부총장을 역임했다. 현재 건국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이며 중국 서북대학교 객좌교수이고 한국니체학회 이사다. 저서로는 ≪기독교 신비주의 철학≫(철학과현실사), ≪사회철학의 문제들≫(철학과현실사), ≪니체와 예술≫(한길사),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이야기≫(해냄), ≪헤겔, 절대정신과 변증법 비판≫(철학과현실사), ≪청소년을 위한 철학 에세이≫(해냄), ≪사랑학 강의≫(새문사), ≪행복학 강의≫(새문사), ≪죽음학 강의≫(새문사),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철학의 끌림≫(멘토프레스) 등이 있다. 역서로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서광사), 브루노의 ≪무한자와 우주와 세계 외≫(한길사),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지식을만드는지식),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지식을만드는지식), ≪도덕의 계보학≫(지식을만드는지식), ≪선과 악의 저편≫(지식을만드는지식),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서광사), 쾨르너의 ≪칸트의 비판철학≫(서광사),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고려원), 프로이트의 ≪문화에서의 불안≫(지식을만드는지식), ≪꿈의 해석≫(지식을만드는지식), ≪쾌락 원리의 저편≫(지식을만드는지식), 베르그송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삼중당) 등이 있다.


☑ 목차

영원한 평화를 위해 ················3

제1장. 국가들 사이의 영원한 평화를 위한 예비 조항 ··6
제2장. 국가들 사이의 영원한 평화를 위한 확정 조항 ·18

첫째 보충. 영원한 평화의 보장에 관해 ·······44
둘째 보충. 영원한 평화를 위한 비밀 조항 ······61

부록 I. 영원한 평화와 관련해서 본 도덕과 정치의 불일치에 관해 ·······65
부록 II. 공법의 선험적 개념에 의한 정치와 도덕의 일치에 관해 ·······89

해설 ······················103
지은이에 대해 ··················112
옮긴이에 대해 ··················115


2014년 7월 14일 월요일

경제문감 (經濟文鑑)


도서명 : 경제문감 經濟文鑑
지은이 : 정도전
옮긴이 : 조기영
분야 : 정치
출간일 : 2009년 11월 15일
ISBN : 978-89-6406-377-4
가격 : 12,000원
규격 : A5 제본 : 양장본 쪽 : 199쪽


☑ 200자 요약

정도전이 쓰고 태조 이성계가 읽은 국가 경영 핵심 지침서
조선 왕조의 초석을 쌓은 삼봉 정도전의 고뇌를 담은 책이다. 태조 이성계에게 올린 국가 경영에 관한 핵심적인 지침서로 무엇이 올바른 정치인지를 깊이 고민하고, 어떻게 공명정대한 정치 체제를 만들지를 풀어냈다. 권근의 주해와 정총의 서문으로 더 풍부해진 이 책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올바른 정치이론을 읽어보고, 태조와 정도전이 이루고자 한 국가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 책 소개

경국제세(經國濟世)에 필요한 거울이 되는 글
“경국제세, 나라를 잘 다스려 세상을 구제한다.”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가 이 한마디에 모두 들어 있다. 정도전은 ≪경제문감≫을 씀으로써 세상을 구제하고자 했다. 그는 옛사람을 숭상했기 때문에 그들 직분 임무의 잘잘못과 인물의 잘남 못남을 널리 가려내어 우선 글로 기록했다. 이를 정리하는 작업을 통해 그가 세우고자 하는 바른 정치 체제를 알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선대 선비들의 학설을 인용하면서 그 사이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는데 매우 간단한 형태지만 소략하지는 않고, 상세하면서도 번잡하지 않다. ≪경제문감≫에서 주장하는 정도전의 정치 체제 및 통치 철학은 재상을 중심으로 하는 공명정대한 정치, 백성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민본주의, 경제적·물질적 성장과 절약을 강조하는 실용주의, 그리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룩하는 정치 이념이다. 요임금과 순임금 시대에도 그러했고, 오늘날까지도 새겨 읽을 만한 정도전의 정치에 대한 생각이 이 한 권 안에 있다.

무릇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군수와 현령은 백성의 근간이 된다
군군신신(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각자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이 책에서 제시한 각 직분에 맞는 태도와 정신은 오늘날 읽어도 하나 모자람이 없다. 정도전이 제시한 올바른 국가의 모습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었다.
재상은 위로는 음양(陰陽)을 조화하고, 아래로는 많은 백성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며, 안으로 백성을 평온하고 밝게 다스리고, 밖으로 사방의 오랑캐를 진정시키고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임금이 어질면 어질지 않은 사람이 없고 임금이 옳으면 옳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한 번 임금을 바르게 하면 나라가 안정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임금을 보좌하는 재상의 업무는 임금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태조가 즉위하면서 교시한 고과법(考課法)도 소개했는데, 이는 중국 고대의 전최법(殿最法)을 인용해 만든 것으로 선(善)·최(最)는 지방 수령(守令)의 근태를 조사해 등급을 정하는 명칭으로 선(善)은 덕의(德義)·청근(淸謹)·공평(公平)·각근(恪勤)이고, 최(最)는 옥송(獄訟)에 억울함이 없는 것, 납세를 독촉하되 백성을 불안하게 하지 않는 것, 부역을 균등하게 차출하는 것, 농토를 개간하고 뽕나무를 심는 것, 들을 넓히고 토지를 개간하는 것, 수리(水利)를 잘 다스리는 것, 간특함과 도적을 없애는 것, 곤궁함을 구제하는 것 등으로 했다.
조선왕조 창건에 초석이 되었던 정도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두뇌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방면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두 번의 유배와 10여 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통해 독서와 성찰로 자기 자신을 연마하고 국가 경영에 필요한 대도를 구상했다. 그리하여 전제(田制) 및 군제(軍制) 개혁은 물론이고 각종 정치 이론을 정립했다. ≪경제문감≫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난국을 해결하기 위한 정도전의 고뇌에서 나온 저서로서 시대를 통관하고 국운을 전망하고 국정을 계획한 삼봉 리더십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 책 속으로

君仁莫不仁 君義莫不義 一正君而國定 故曰 輔相之業 莫大於格君

임금이 어질면 어질지 않은 사람이 없고 임금이 옳으면 옳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한번 임금을 바르게 하면 나라가 안정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임금을 보좌하는 재상의 업무는 임금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 지은이 소개


정도전(鄭道傳, 1342∼1398)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 충혜왕 복위 3년에 3남 1녀 가운데 첫째로 태어났다. 삼봉(三峯)이라는 호는 단양팔경 가운데 하나인 도담 삼봉에 연유한다고 하는데, 정도전의 외가가 단양에 있고, 그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또한 정도전의 집이 삼각산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취한 호일 가능성도 있다.
상경한 뒤로 이색(李穡)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해 공민왕 11년(1362)에 급제해 하급 관리를 역임하다가 공민왕 15년에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내려가 학문과 교육에 전념했다. 공민왕 19년에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어 이색·정몽주·이숭인·이존오 등과 성리학을 강론했다. 1374년 우왕이 즉위한 이후 신진 학자들에게 시련이 닥쳐와 친원(親元) 정책에 반대했던 탓에 나주 근처로 유배되었다. 풀려나와 고향에서 4년간 지내고 삼각산 집으로 와서 살다가 권신들의 외압에 부평·김포 등지로 이사하는 등 굴욕과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그 뒤 우왕 9년에 함주로 가서 이성계를 만난 뒤로 왕조 건국에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게 되고, 우왕 14년(1388) 위화도 회군 이후에는 밀직부사를 맡아 전제(田制) 개혁부터 단행했다. 그리고 1392년 조선왕조가 창건되면서 1등 공신으로 책봉되고 새로운 왕조의 요직을 장악했다. 새로운 도읍지 결정과 경복궁 창건, 군제(軍制) 개혁과 병법 개혁 등 새로운 왕조를 위해 수많은 업적과 공적을 쌓았다. ≪조선경국전≫, ≪감사요약≫,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 ≪불씨잡변≫ 등을 지었으며, 태조의 창업을 기리는 <문덕곡>, <몽금척> 등의 노래도 지었다.
그리하여 당시 정도전의 권세는 왕이나 왕족을 능가할 정도였으며, 항상 이방원과 대립했다. 결국 태조 7년에 일어난 무인의 난에 역적의 누명을 쓰고 이방원의 칼날 아래 쓰러지고 말았다.



☑ 옮긴이 소개


조기영
무외정사(無外精舍) 주인 조기영(趙麒永)은 강원대 사범대학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홍만종 시학 연구>로 석사, <하서 김인후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도회 한문연수원과 중앙승가대학 불전국역연구원 등에서 공부했으며, 권우 홍찬유 선생과 연민 이가원 선생으로부터 지어재(之於齋)와 인재(仁齋)라는 아호를 받았다. 연세대 국학연구원과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했으며, 연세대·강원대·경찰대·공주교대·방통대·목원대·상지대·한성대·서정대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는 충북대 우암연구소 전임연구원 및 고려대 교육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있으며, 경희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그동안 조광조 평전인 ≪위대한 개혁≫을 비롯해 ≪삼봉 리더십≫·≪하서 김인후의 시문학 연구≫·≪하서시학과 호남시단≫·≪화랑세기≫·≪한문학의 이해≫·≪정보사회의 언어문화≫·≪한국시가의 정신세계≫·≪한국시가의 자연관≫과 ≪동몽선습≫·≪백련초해≫·≪명심보감≫·≪백유경≫·≪반야심경≫·≪초발심자경문≫·≪완역 명심보감≫ 등 90여 편의 논저를 냈다. 지금도 우리나라 한문학 및 동양고전 전반에 걸쳐 연구하고 강의하고 저술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경제문감서(經濟文鑑序)
경제문감(經濟文鑑) 상(上)
재상(宰相)
1. 재상의 명칭
2. 주의 관제
3. 총론
4. 재상의 직분
5. 재상의 업무
경제문감(經濟文鑑) 하(下)
대관(臺官)
1. 총론
2. 대관의 직분
간관(諫官)
1. 총론
2. 간관의 직분
위병(衛兵)
1. 총론
감사(監司)
1. 총론
2. 감사의 직분
주목(州牧)
1. 총론
군태수(郡太守)
1. 총론
현령(縣令)
1. 총론
2. 현령의 직분
경제문감후서(經濟文鑑後序)

옮긴이에 대해

2012년 2월 8일 수요일

당의통략


도서명 : 당의통략(黨議通略) 천줄읽기
지은이 : 이건창(李建昌)
옮긴이 : 이근호(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임연구원)
ISBN : 9788966802524
분야 : 역사
가격 : 12000원
쪽수 : 150쪽  




☑ 책 소개

조선시대 마지막 문장가 이건창의 당론서. 선조 대에 발생한 동인과 서인의 분당(分黨)부터 영조 대까지 약 180년간의 당쟁의 역사를 편찬했다. 이건창의 출신 가문과 정치적 행보 때문에 소론 중심의 당론서로 평가받지만,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공정성과 객관성을 유지한다. 우리는 조선 시대 정치사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정치 상황을 반추해 볼 수 있다.


☑ 출판사 책 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는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당의통략≫은 이건창이 조부 이시원이 지은 ≪국조문헌(國朝文獻)≫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이다. ≪국조문헌≫은 선인들이 국왕에게 올린 상소문이나 정승과 판서를 지낸 인물들의 행장이나 문장 등이 수록되었는데, 이건창이 이를 정리하고, 여기에 본인의 생각을 일부 보태어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서문을 시작으로, 1575년(선조 8) 우리 역사상 동인과 서인의 붕당이 생겨난 시기부터 본론의 서술이 시작되고 있다. 이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지는 과정,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집권한 뒤 일련의 정치 과정 및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지는 과정, 숙종 대 이후 영조 대까지 몇 차례 거듭된 정치적 변동인 환국, 그리고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탕평책 추진 등을 시간 순서대로 서술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원론(原論)이라고 해 저자가 생각하는 조선 시대 당쟁의 원인을 ‘도학태중(道學太重)’ 등 여덟 가지로 나누어 서술했으며, 끝으로 재종제 이건방(李建芳)이 쓴 발문이 첨부되었다.

이 책은 왕대별로 구성된 ≪당의통략≫에서 각 왕대별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을 40% 가량 발췌해 번역했다. 다만, 내용이 많지 않은 왕대의 경우는 해당 부분을 번역했으며, 서문과 마지막 부분의 원론, 그리고 발문은 전부를 수록했다. 또한 옮긴이는 필요한 부분에 주석을 작성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 책 속으로

자신을 이기는 데 용감한 것을 ‘굳세다[剛]’라고 하는 것인데 지금은 남을 맹렬히 책망하는 것을 ‘굳세다’고 하고, 이성으로써 욕심을 이기는 것을 ‘굳세다’고 하는데 지금은 힘으로 남을 굴복시키는 것을 ‘굳세다’고 하니 이것은 또한 진실로 ‘굳센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 103쪽.

대체로 마음은 한 치 가슴 속에 감추어져 있고 말은 깜짝할 사이에 나오는 것으로, 마음은 허물이 있더라도 사람들이 혹 다 보지 못하고, 말은 실수가 있더라도 또한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글이란 그렇지 못하여 한 번 먹물로 종이에 쓰면 오래도록 멀리 전해져서 이미 가리거나 마멸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 130쪽.


☑ 지은이 소개

이건창(李建昌, 1852~1898)

이건창은 1852년(철종 3) 강화도 사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고, 자는 봉조(鳳朝, 鳳藻), 호는 영재(寧齋)로, 그의 조부는 병인양요 때 자결한 이시원이다. 당대의 대표적인 문장가인 강위(姜瑋), 김택영(金澤榮), 황현(黃玹) 등과 교류했으며 조선시대 마지막 문장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두루 관직을 역임했으며, 1875년에는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의 비행을 낱낱이 들춰내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아 벽동(碧潼)에서 유배 생활을 하기도 했다. 관리 생활을 하면서는 강직한 성품으로 평가받았다. 강화학파의 일원으로 양명학자이기도 하다. 개화를 뿌리치고 철저한 척양척왜주의자(斥洋斥倭主義者)로 일관했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 ≪당의통략≫ 등이 있다.


☑ 옮긴이 소개

이근호
국민대에서 <조선후기 영조 대 탕평파의 국정운영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국민대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된 관심사는 조선후기 정치사 내지는 정치사상사로, 특히 국정을 주도한 관료층의 동향이나 경세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한 조선시대 문헌인 ≪승정원일기≫나 ≪비변사등록≫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그 역사적 성격 해명에 주력하고 있다. 아울러 대중과의 소통에도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 조선왕조사≫와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 사전≫, 그리고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위한 시론적인 작업으로 ‘우리 역사문화의 갈래를 찾아서’라는 주제 하에 안동문화권, 경주문화권, 지리산문화권 등을 연구한 공동작업의 결과물을 내놓았다.


☑ 목차

해설
지은이에 대해
자서(自序)
선조조ᐨ광해조를 부기함(宣祖朝附光海朝)
인조조에서 효종조(仁祖朝至孝宗朝)
현종조(顯宗朝)
숙종조(肅宗朝)
영종조(英宗朝)
원론(原論)
당의통략발(黨議通略跋)
옮긴이에 대해

2011년 3월 5일 토요일

미국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삶에 관한 이야기 Narrative of the life of Frederick Douglass: an American Slave



미국 흑인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노예 출신인 더글러스의 자서전. 노예제 폐지론자로서 노예해방에 커다란 기여를 했던 더글러스는 대부분의 노예들이 겪어야 했던 일상과 같은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이 글을 배우는 사건을 기점으로 어떻게 노예제의 실상을 깨닫고 자유를 갈망하게 됐으며, 노예제폐지운동가가 됐는지에 대해 말한다. 19세기 전반기 미국 노예제의 끔찍했던 실상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종적 편견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 책 소개

노예로서의 삶, 자유를 위한 갈망
흑인 노예제의 폐해가 가장 극심했던 남북전쟁 이전에 미국 남부에서 태어난 더글러스의 삶은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노예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대부분의 노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재산으로 취급되고, 죽을 때까지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농장 주인이나 감독관에게 수시로 채찍질이나 체벌을 당하기도 했다. 노예는 재산을 소유하거나 글을 배우는 것도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법적으로 결혼을 할 수 없었다. 또한 백인 농장주의 성적 착취로 말미암아 흑인 여성 노예에게 자식이 생기더라도 그녀의 자식들은 노예로 취급될 뿐 백인 농장주의 자식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더글러스의 글공부의 경험은 그의 인생에서 엄청난 사건이었다. 노예면서 고아와 다름없는 유년기를 보낸 더글러스는 12세에 주인집에서 알파벳을 배웠다. 비록 얼마 뒤에 주인의 강력한 반대로 중단되고 말았지만 그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글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후 더글러스는 길거리에서 만난 가난한 백인 아이들을 통해 글을 익혔고, 휴의 집에 있는 책이나 신문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특히 더글러스가 잔돈을 모아서 직접 구입한 ≪미국의 웅변가≫는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는 더글러스에게 노예제의 실상을 깨닫게 하고 자유를 갈망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인간다운 삶을 얻기 위한 노력
더글러스는 인근 농장의 노예들과 함께 주일예배를 하면서 이들에게 신약성경을 통해 글을 가르치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당시 주인 토머스는 더글러스를 온순하게 만들고자 악명이 높았던 에드워드 코비의 농장으로 보냈다. 이미 글을 깨쳐 백인과 흑인 노예가 서로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자각을 갖게 된 더글러스는 어느 날 코비의 심한 매질에 저항하며 두 시간 가까이 몸싸움을 했다. 결국 코비가 더글러스에게 앞으로는 심하게 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몸싸움은 끝이 났고, 다행히 더글러스는 처형당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1년 뒤 더글러스는 비교적 친절한 농장주인 윌리엄 프릴랜드의 농장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더글러스는 이곳에서도 일요일이나 밤에 노예들에게 은밀하게 글을 가르쳤고, 그중 다섯 명의 노예와 북부로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의 계획은 보트를 훔쳐 체서피크 만 북쪽 끝까지 간 다음 자유 주인 펜실베이니아까지 가는 것이었다. 1836년 부활절 휴일 직전 계획을 실행할 예정이었으나 공모자 중 한 명이 이를 누설하는 바람에 모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더글러스는 석방된 후  조선소 견습공으로 선체의 틈을 뱃밥으로 메우는 일을 배우게 되었다. 숙련공이 된 더글러스는 임금을 많이 주는 곳을 찾아다니며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가 번 돈은 일주일에 한 번씩 주인에게 모두 갖다 바쳐야 했다.
  볼티모어는 도시였기 때문에 노예 주인 메릴랜드에 있으면서도 자유 흑인들이 비교적 많았다. 이들은 동(東)볼티모어 정신향상협회라는 일종의 교육 모임을 만들었는데, 더글러스는 이 모임에 참석해 애나 머리를 만나 1838년에 약혼했다. 애나는 교육을 받지 못한 수수하고 평범한 자유 흑인 여성이었다. 더글러스는 애나를 만나 사랑에 빠진 뒤 다시 한 번 자유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를 깨닫고 두 번째 탈출을 시도했다.
  더글러스는 애나에게 돈을 빌려 필라델피아행 기차표를 구입했으며, 자유 흑인 친구에게 자유 흑인 선원임을 증명하는 선원증을 구해 선원 복장을 하고 북부행 기차에 올랐다. 메릴랜드 주를 넘어 델라웨어 주에 도착한 더글러스는 페리를 이용해 필라델피아까지 갔다. 하지만 이곳 역시 도망 노예를 포획하려는 백인들이 많은 곳이라 그 즉시 기차를 갈아타고 1838년 9월 4일 뉴욕 시에 도착해 꿈에도 그리던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더글러스의 또 다른 전기
뉴욕에 도착한 더글러스는 흑인을 받아 주는 하숙집을 중심으로 도망 노예 추적자들이 활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며칠간 길거리를 배회한 끝에 어느 흑인 선원의 도움으로 뉴욕자경단위원회의 일원이자 뉴욕 지하철도망을 관리하던 흑인 노예제 폐지 운동가 데이비드 러글스를 만나 잠시 그의 집에서 머물게 된다. 그사이 더글러스는 약혼자 애나를 뉴욕으로 불러 1838년 9월에 결혼했다. 더글러스 부부는 러글스의 추천으로 뉴욕보다는 반노예적 정서가 강해 노예 추적자들의 손길이 잘 미치지 않을뿐더러 일자리도 얻기 쉬운 매사추세츠 주의 뉴베드퍼드로 이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노예 시절의 성인 ‘베일리’를 ‘더글러스’로 바꾸었다.
  뉴베드퍼드에서의 생활은 더글러스에게 또 다른 전기가 되었다. 우선 그는 조선소에서 숙련공으로 일하고자 했으나 북부 사회에도 만연해 있던 인종차별로 말미암아 일용 노동자로 일해야만 했다. 애나는 볼티모어에서 그랬듯이 가정부와 세탁부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러던 중 더글러스는 당대에 가장 유명하고 극렬한 노예제 폐지 운동가인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이 발행하던 주간지 ≪해방자≫를 읽게 되었다. 개리슨은 노예제의 무조건적이면서도 즉각적인 폐지를 주장했고, 흑인들의 아프리카로의 식민 계획에도 반대했으며, 노예제를 옹호하는 헌법에 입각한 정부에도 반대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더글러스는 개리슨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노예제 폐지 운동가의 모임에도 정기적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더글러스가 개리슨을 처음 본 것은 1841년 8월 뉴베드퍼드의 노예제 폐지 운동가 모임에서였다. 며칠 뒤 더글러스는 미국노예제반대협회의 매사추세츠 지부의 연례 회합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 더글러스의 연설을 지켜본 개리슨은 그의 자질을 즉석에서 알아보고 더글러스를 협회의 순회 연설자로 고용했다. 연설자로서의 더글러스의 역할은 다른 노예제 폐지 운동가와 북부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자신의 노예 시절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해방자≫를 비롯한 노예제 폐지 운동 관련 신문 구독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이후 더글러스는 10년간 개리슨파의 일원으로 노예제 폐지 운동에 헌신하게 되면서 19세기 미국의 가장 큰 논점 중 하나였던 노예제 폐지와 흑인 인권 향상을 위해 평생토록 일관되게 투쟁했다.

☑ 책 속으로


진정 하나님이 있단 말입니까? 저는 왜 노예인가요? 나는 도망칠 거야. 나는 그것을 참지 않을 거야. 붙잡히든 탈출에 성공하든 나는 그것을 시도할 거야. 열병에 걸리나 학질에 걸리나 죽기는 매한가지야. 내가 잃을 건 이 한 목숨뿐이야. 이렇게 살다 죽으나 도망치다 죽임을 당하나 죽기는 마찬가지야. 오로지 이것만 생각하자. 160킬로미터만 북쪽으로 곧장 가면 나는 자유란 말이다! 시도해 봐?


너희들은 정박장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되었구나. 나는 사슬에 꽉 매인 노예란다! 너는 순풍에 즐거이 이동하고, 나는 피비린내 나는 채찍 앞에서 슬프구나! 너희들은 세계를 두루 날아다니는 자유라는 날랜 날개 달린 천사들이고, 나는 무쇠 족쇄를 차고 있구나! 아, 내가 자유롭다면!


어린 백인 소년들 사이에서조차도 ‘깜둥이’를 죽이는 데는 반 센트의 값어치만 있고, 묻어 버리는 데도 반 센트의 값어치밖에는 없다는 말이 돌았다.

☑ 지은이 소개

프레더릭 더글러스(1818?∼1895)
1818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프레더릭 오거스터스 워싱턴 베일리라는 이름으로 미국 남부 메릴랜드 주 해안의 이스턴 인근 애런 앤서니 소유의 농장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더글러스는 여러 주인의 손을 거치며 유년기에는 주인의 아이 돌보기와 심부름, 청소년기에는 밭일과 조선소 일 등을 거치며 노예가 겪어야 했던 채찍질과 극심한 구타를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주인의 아내로부터 알파벳을 배운 이래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일이 자유를 향한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글을 읽고 쓰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더글러스는 이후 동료 노예들과 함께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1838년 단독으로 북부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탈출 직후 뉴욕에서 자유 흑인 애나와 결혼해 매사추세츠 주의 뉴베드퍼드에 자리 잡은 뒤 미국노예제반대협회의 인사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의 권유로 반노예제 집회에서 노예로서의 경험담을 강연한 것을 계기로 노예제반대협회 소속 연사가 되어 흑인 노예제 폐지 운동가로서 명성을 날리게 된다. 이로 인해 동료 백인 노예제 폐지 운동가로부터 질시를 당하기도 했다.
이후 더글러스는 신문 편집인, 연설가, 저술가, 정치인, 외교관, 그리고 개혁가로서 1895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자립심을 지키며 흑인 인권 향상을 위해 초지일관한 삶을 살았다.
더글러스는 세 권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각각의 제목과 출간 연도는 다음과 같다. ≪미국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삶에 관한 이야기≫(1845), ≪내 속박과 내 자유(My Bondage and My Freedom)≫(1855),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생애≫(1881). 더글러스는 노예제 폐지 운동 신문 발행인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발간한 신문을 연도순으로 정리하면, 가장 유명한 ≪북극성≫(1847∼1851)을 비롯해서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주간지(Frederick Douglass Weekly)≫,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신문(Frederick Douglass' Paper)≫(1851∼1860) 등이 있다.

☑ 옮긴이 소개

손세호
손세호는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했으며,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서양사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주립대학교(SUNY at Albany)에서 박사 후 연수 과정을 수료했고, 루이지애나주립대 풀브라이트 미국학 연수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최근에는 스탠퍼드대학교 사학과에서 풀브라이트 방문 교수로 미국사를 연구했다. 서강대·연세대·이화여대·건국대 등에서 서양사와 미국사에 관한 강의를 했으며, 현재 평택대학교 미국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학회 경력으로는 한국미국사학회, 한국아메리카학회, 한국서양사학회, 역사학회 이사 등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미국사학회 회장으로 재임 중이다. 또한 미국사 및 미국학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미국의 미국사학회(OAH)와 아메리카학회(ASA)의 연례 학술대회에서 논문을 발표한 바 있으며, 한국아메리카학회가 수여하는 우암논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하룻밤에 읽는 미국사≫(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눈으로 본 세계 역사 20: 미국의 독립과 발전≫(교원, 2006), ≪눈으로 본 세계 역사 22: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의 발전≫(교원, 2006), ≪세계사 인물 오디세이≫(공저, 서해문집, 2010), ≪역사 속의 소수자들≫(공저, 푸른역사, 2009), ≪영화로 생각하기≫(공저, 방통대출판부, 2005), ≪미국 역사학의 역사≫(공저, 비봉, 2000)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뒤를 돌아보면서: 2000∼1887≫(지만지, 2008), ≪서양 문명의 역사(하)≫(소나무, 2007),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공역, 휴머니스트, 2005), ≪영화로 본 새로운 역사≫(공역, 소나무, 1998)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에드워드 벨라미의 “뒤를 돌아보면서”를 뒤돌아보며>, <“미국 역사 표준서”와 개정판을 둘러싼 논쟁>, <미국 대학의 자국사 교육의 역사와 현실>, <영미 노예제 폐지 운동과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 <미국 중등학교 미국사 교과서에서의 베트남전쟁 서술>, <에드워드 벨라미와 산업국유화운동>, <에드워드 벨라미의 공화적 사회주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