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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2일 목요일

서하집(西河集)


도서명 : 서하집(西河集)
지은이 : 임춘(林椿)
옮긴이 : 진성규
분야 : 고려 / 문집
출간일 : 2015년 1월 30일
ISBN : 979-11-304-1597-0 03810
가격 : 48000원
규격 : 사륙판    제본 : 무선제본    쪽 : 864쪽




☑ 책 소개

죽림고회의 한 사람으로 무신정권 아래 벼슬 한 자리 하지 못한 채 평생 불우하게 살다 간 서하 임춘. 그러나 그의 문장은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 시를 읊으면서 마음으로 흠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고려 중기 문학을 대표하는 그의 문집을 모두 옮겼다. 가전체 소설의 효시(嚆矢)로 알려진 <국순전>·<공방전>도 만날 수 있다.


☑ 출판사 책 소개

임춘의 학문 세계는 백부 종비(宗庇)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7세에 육갑(六甲)을 외고 경서를 통달했다는 자신의 기록을 보아 재능이 풍부한 신동이었던 듯하다. 이런 재질 덕분에 백부 종비의 총애를 받아서 그의 학문 세계를 전수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어려운 고사(故事)를 많이 써서 자신의 의사를 진정(陳情)하거나 또는 하사(賀謝)하는 글인 “계(啓)”는 임종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이규보는 말하고 있다. 고사로 대구(對句)를 구성해 만든 사륙문은 그대로 임춘에게도 전달되어, ≪서하집≫에 수록된 계(啓)는 임종비의 문장과 같이 기본 구조가 사륙문이다. 이러한 스타일의 문체는 백부 종비의 영향이라 하겠다.
또한 당시 문단을 뒤흔든 풍조는 소동파(蘇東坡)·황정견(黃庭堅) 문체를 배우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파집(東坡集)≫ 등을 읽지 않고서는 문인 행세를 할 수 없었다. 임춘은 ≪동파집≫을 읽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말하듯 문체는 동파와 같다고 자랑함을 봐도 당시의 동파 존경이 어떠한가를 짐작하겠다. 망년우(忘年友)의 핵심인 이인로도 동파와 정견의 문집을 읽고서 시를 짓는 핵심을 얻었다고 했다.
≪서하집≫을 일별하면 당장에 느끼는 감정은 우선 고사투성이라는 것이다. 그의 시문 한 구절을 읽기 위해서는 고사를 모르곤 거의 불가능하다. 온통 고사로 얽어 놓은 느낌이다. 그러나 그는 탁월한 재예(才藝)로 그 고사를 잘도 주물러 놓았다.
최자는 ≪보한집≫에서 그의 문장을 이렇게 비평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고인(古人)의 문체를 얻었다고 하지만 그의 글을 보면 모두 옛사람들의 말을 빼앗아 썼다. 심지어는 수십 자를 따다가 자기의 말로 삼았으니 이것은 그 문체를 얻은 것이 아니고 그 말을 빼앗은 것이다.” 이러한 준엄한 비평은 그의 문장이 고사를 많이 인용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문체가 당시의 흐름이었다. 준엄한 비평을 한 최자의 ≪보한집≫도 고사를 많이 인용하기는 피장파장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비평한 것은 난삽(難澁)한 고사 때문이다.
이렇게 어려운 글을 쓴 이면(裏面)에는 그의 인생역정(人生歷程)이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발랄한 젊은 날을 보내며 장래가 훤히 보이는 그런 꿈을 꾸다가, 하루아침에 사회 체제가 바뀌면서 암담한 나날을 보낸 그의 비극적 운명은 이러한 고사를 인용해 심금을 달래고 때로는 집권자를 비난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문단의 조류가 고사를 인용한 문체가 풍미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 과정도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임춘의 문장에 대한 이인로의 비평은 최자와는 사뭇 다르다. “선생의 문장은 고문을 배웠고 시는 소아(騷雅)의 풍골이 있어서 해동에서 벼슬하지 않은 사람으로 뛰어난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그가 죽은 지 20년,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 시를 읊으면서 마음으로 흠모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장차 굴(屈)·송(宋)의 반열(班列)에 두려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상반된 비평은 두 사람이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 문단에는 탁자(琢字: 글자를 조탁함)와 연대(鍊對: 대구를 다듬음)에 몰두하면서 사어(辭語)와 성률(聲律)을 앞세운 이인로와 임춘 계열, 그리고 기골(氣骨)과 의격(意格)을 앞세운 이규보의 계열이 맞서고 있었다. 최자는 단연 이규보 계열을 편든 것 같다.
임춘은 문장에 대한 뚜렷한 견해를 갖고 있었으니 “문장은 기(氣)가 주(主)가 되니 심중에 감동해 말로 표현한 것이므로 아름다운 문구로써 자랑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문장의 묘미를 음미한 후에 묘(妙)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임춘의 작문에서 주요한 것은 기질이나 개성으로, ‘기(氣)’를 강조하고 있다. 즉, 주기사상(主氣思想)을 문장론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임춘의 견해가 이러할진대 최자의 비평은 무색하리라 본다. 최자의 말처럼 남의 글이나 빼앗아 옮겨 적었다면 당시 문단을 뒤흔들 수 있었을까?


☑ 책 속으로

·병중(病中)에 느낌이 있어서

해마다 과거 시험을 헛되이 보내나니,
늙어도 몸은 오히려 정정하다네.
과거는 예부터 준재를 뽑는 것.
공경이 누가 비재(非才)를 천거하랴!
큰 고래가 분격하려 하지만 파도는 말랐고,
병든 학이 날려 하지만 날개가 꺾였네.
예부터 강동에는 은거지가 있으니,
가련한 것은 백발 되어 돌아갈 내 신세.

病中有感

年年虛過試闈開 臨老猶堪矍鑠哉
科第由來收俊士 公卿誰肯薦非才
長鯨欲奮波濤竭 病鶴思飛羽翮摧
舊有江東隱居地 自憐頭白好歸來


·다시 서울에 도착해

유랑(劉郞)이 이제 백두옹이 되었으니,
지난 10년간이 꿈결 같아라.
애처롭다! 현도관(玄都觀)은
토규연맥(兎葵燕麥)이 춘풍에 흔들릴 뿐.

重到京師
劉郞今是白頭翁 一十年來似夢中
惆悵玄都仙舘裏 兎葵燕麥動春風


·회포를 쓰다

시인들은 예부터 시(詩) 때문에 곤궁했다지만,
나의 시는 아직 세련되지 못했는데.
무슨 일로 빈곤이 뼈에까지 사무칠까?
오랫동안 굶주린 것이 두릉옹과 같네.

書懷

詩人自古以詩窮 顧我爲詩亦未工
何事年來窮到骨 長飢却似杜陵翁


·순(醇)의 기국(器局)과 도량이 크고 깊어 출렁대는 만경창파와 같아 맑게 하려 해도 맑아지지 않고 뒤흔들어도 흐려지지 않아서, 일시에 그 풍미에 빠지면 자못 기운을 사람들에게 더해 주었다. 일찍이 섭 법사에게 나아가 하루 종일 담론이 진행되자, 한 좌석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절도하게 되어 이름이 드날려 호를 국(麴) 처사라 했다. 공경·대부·신선·방사로부터 머슴꾼·목동·오랑캐 외국인에 이르기까지 그 향기로운 이름을 맛본 사람은 모두 흠모해, 매양 성대한 집회가 있을 때마다 순(醇)이 이르지 않으면, 모두 서글피 말하기를 “국 처사가 없으면 즐겁지 않다” 하니 그 시속(時俗)에 사랑받음이 이와 같았다.


☑ 지은이 소개

임춘(林椿)
임춘(林椿)은 고려 후기로 넘어가는 의종(毅宗)·명종(明宗) 연간 인물로, 자는 기지(耆之)요 호는 서하(西河)다. 생몰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의종 연간에 태어나 40세 가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종래 30세까지 살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40세에 귀밑털이 희다고 하는(四十龍鍾兩鬢華) 자신의 기록으로 보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임춘은 관직(官職)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유학의 본령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현실을 감내했다. 임춘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현실적 고통을 문학을 통해 표출하는 것뿐이었다. 주로 강남을 떠돌던 시절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현존하는 ≪서하집(西河集)≫에는 현실적 관심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 시(詩)와 산문(散文)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불우한 문인으로 전락했지만 결코 현실을 거부할 수도 잊을 수도 없기에, 시문(詩文)은 강렬한 현실 지향적인 특징을 보여 주며, 특히 가전체 소설의 효시(嚆矢)로 알려진 <국순전(麴醇傳)>·<공방전(孔方傳)>도 타락한 현실을 비판한 강렬한 의식이 엿보인다. 죽림고회(竹林高會)의 멤버 중에 이인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아 있는 작품이 없는 점을 감안하면 ≪서하집(西河集)≫은 임춘의 불우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무신의 난을 전후한 시대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사료로서 의미 또한 크다.


☑ 옮긴이 소개

진성규
진성규는 경북 예천에서 출생했다. 은풍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당에서 3년 동안 한학을 공부했다. 경북 예천의 대창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3년여 공무원 생활을 했다. 중앙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및 중앙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문학석·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부산여대(현 신라대)를 거쳐 현재 중앙대 역사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진각국사 혜심 연구≫, 공저로는 ≪신라의 불교사원≫, ≪인물로 본 한국불교사상사≫, ≪한국사상사 입문≫ 등이 있다. 역서로는 ≪서하집(西河集)≫,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 ≪계와문집(溪窩文集)≫, ≪빈왕록(賓王錄)≫, ≪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 등이 있다.


☑ 목차

서(序)
임서하문집서(林西河文集序) ············3
서(序) ······················9
서하집중간서(西河集重刊序) ···········16
서하선생집서(西河先生集序) ···········21

제1권 고율시
1. 낭중(郎中) 이유의의 찻집에서 낮잠을 자다 2수 ··29
2. 붓·먹을 보내 준 이에게 감사의 뜻을 표함 ····30
3. 천원에 있는 유광식 집의 유자나무를 두고 ·····32
4. 칠석(七夕) 3수 ·················35
5. 반송가(盤松歌) ················37
6. 찾아온 이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43
7. 8월 15일 밤에 ·················44
8. 앞의 운(韻)을 이용해 연지에게 주다 ·······45
9. 꿈속의 일이 기억나서 ··············46
10. 미수에게 주다 ················48
11. 익원 상인에게 부치다 ·············49
12. 친구에게 부치다 ···············51
13. 산인 익원(益源)에게 부치다 ··········52
14. 조역락이 성남에 은거하려 할 적에 운을 나누어 귀(歸) 자를 얻음 ················57
15. 상서(尙書) 이윤수가 임금이 내린 약에 감사하며 잔치를 베풀다 ·················59
16. 담지에게 글을 보내어 먹을 빌림 ········60
17. 함자진이 사는 곳을 찾아서 ···········62
18. 누(樓) 위에서 술을 마시며 ···········64
19. 장난삼아 시를 지어 줌 2수 ···········65
20. 미수의 아우인 승려 찬지(纘之)에게 주다 2수 ···66
21. 한양에서 현량(賢良) 오세재가 찾아오자, 시를 지어 감사의 뜻을 표함 ··············68
22. 꿈을 읊다 ··················70
23. 어부 ·····················71
24. 함녕후가 손수 사계화를 족암(足菴)에 심었으므로 천(闡) 공을 대신해 시를 지어 감사의 뜻을 표함 ·72
25. 정 시랑의 서시(叙詩)에 차운함 ·········75
26. 은자(隱者)에게 주다 ··············86
27. 오강도를 두고 ················87
28. 사원 외벽(外壁)에 쓰다 ············88
29. 낭중(郎中) 이유의의 집에 모이다 ········88
30. 미수를 그리면서 4수 ··············90
31. 감악으로 돌아가 글을 읽으면서 박동준에게 부치다 94
32. 겨울날 길 가운데서 3수 ············98
33. 최문윤이 단주에 살 곳을 정하려 하다 ······100
34. 황보약수에게 주다 ··············102
35. 김군수에게 주다 ···············104
36. 송풍정의 운(韻)에 차운하다 3수 ········105
37. 조역락에게 육계(肉戒)를 깨어 버리라고 글을 보내다 ····················108
38. 법주사에 놀면서 존고 상인에게 주다 ······114
39. 이담지의 집 벽에 쓰다 ············116
40. 옛사람의 필적(筆跡)을 보고서 ·········119
41. 8월 15일 밤에 운자(韻字)를 찾다가 기(起) 자 운(韻)을 얻다 ··················120
42. 밤에 조역락의 집에서 묵다가 빗속에서 지음 ···122
43. 양국준의 집 울타리에 핀 붉은 목단을 보고 ···123
44. 황보(皇甫) 형제에게 주다 ···········125
45. 길 가다가 폭우를 만남 ············129
46. 느낌이 있어서 ················130
47. 담지·왕가훈 집에 있는 춘경산수도(春景山水圖)를 보고 ··················131
48. 연지에게 주다 ················133
49. 운을 따라 시를 지어 황보약수에게 주다. ····134
50. 갑오년 여름에 강남(江南)으로 피신하니 유랑의 탄식이 있어 장단가를 짓고서 <장검행(杖劒行)>이라 했다 ·135
제2권 고율시
51. 차운해 이각천 스님에게 줌 ··········145
52. 상국 이지명이 준 장구 2수를 차운함 ······147
53. 회포를 쓰다 ·················175
54. 북원의 계림선생에게 부침 ···········176
55. 김온규가 쓴 관음원(觀音院) 시의 운자를 빌려서 177
56. 월사에게 주다 ················178
57. 연화원 벽에 씀 ················181
58. 역락이 근래 시를 짓지 못한 것을 희롱함 ····185
59. 장단을 지나면서 ···············185
60. 장단호 위에 초당이 완성되자 시를 지어 이사(頤師)에게 보임 ··················186
61. 정 학사를 추도하며 ··············188
62. 9월 5일 벗과 함께 용흥사 해운방에서 놀 때 확사(確師)가 시를 요구하므로 운자를 나누다가 각(閣) 자(字)를 얻었음 ·······················189
63. 황보약수에게 주다 ··············192
64. 이미수가 언제나 언어를 조심했으므로 시를 지어 희롱함 ···················193
65. 다향(茶餉)을 겸 상인에게 부침 ········197
66. 겸 상인(謙上人) 방장(方丈)에게 희롱해 씀 ···198
67. 민원발의 방문을 받고 기뻐함 ·········200
68. 6월 15일 밤비가 개므로 달을 보고 감회가 생겨 6수 201
69. 김선을 유별하며 ···············209
70. 약수에게 희롱하며 줌 ·············211
71. 다시 앞 운을 사용해 계림(鷄林) 박인석 선생에게 부침 ····················212
72. 담지에게 주다 절구 2수 ············213
73. 급제한 황보항을 축하함 2수 ··········215
74. 자복사의 유제를 차운함 ············223
75. 9일에 홀로 앉아 제공(諸公)의 모임을 듣고 시를 지어 부침 ··················224
76. 종형 정옥(庭玉)이 상주(尙州)에 왔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지어 희롱함 ··············225
77. 밀주(密州)에서 놀며 일어난 일을 씀 ······227
78. 영남사를 시제(詩題)로 ············231
79. 영남사의 죽루(竹樓)에서 ···········234
80. 학사(學士) 정지원의 유제를 차운함 ······235
81. 향교의 학도들이 회음(會飮)에 초대하므로 시를 지어 사례함 ··················236
82. 지륵사에서 놀며 ···············238
83. 밀주 원에게 희증함 ··············239
84. 술 갖고 방문한 사람에게 감사하며 ·······241
85. 잉어 선물을 사례함 ··············242
86. 2월 15일 밤 달을 대해 ············243
87. 벗의 매화를 차운함 ··············245
88. 밀주태수에게 보냄 ··············246
89. 미수(이인로)가 개령에 있는 나를 방문해 아리지주를 마시게 했음 ················248
90. 상주 정 서기에게 보냄 ············252
91. 법주사에서 놀며 존고 상인에게 줌 ·······254
92. 정 서기가 보낸 시의 운(韻)을 따라 ·······256
93. 미수(이인로)를 보내며 ············258
94. 정 서기의 운을 빌려 장난삼아 짓다 3수 ·····258
95. 담지의 급제 소식을 듣고 시를 지어 축하함 ···260
96. 죽림사에서 쓰다 ···············261
97. 필률 소리를 듣고 ···············262
98. 이 상국 광진 만사 ··············263

제3권 고율시
99. 글을 대신 써서 김 수재에게 답함 ········269
100. 시를 지어 장원한 이미수를 축하함 ······270
101. 법주사의 당두가 종이와 붓을 보냈으므로 사례함 ·272
102. 미수(眉叟)와 함께 담지(湛之)의 집에 모여서 ··277
103. 밤에 담지(湛之)의 집에 모여 운(韻)을 고르다가 폐(閉) 자를 얻음 ··············278
104. 벗이 준 운(韻)을 차운함 ···········280
105. 제공(諸公)들은 중원의 서기로 임명된 황보약수를 전별했으나 나는 병을 앓고 있어서 가 보지 못했으므로 시를 지어 보냄 ····················283
106. 홍인연의 급제를 축하함 ···········287
107. 감악산 정각승사(正覺僧舍)에서 놀며 그 벽에 씀 288
108. 흥엄사 당두(堂頭)를 방문하고 겸해 김 수재에게 편지를 씀 2수 ················291
109. 종형에게 부침 ···············293
110. 초서를 구하기 위해 미수(眉叟)에게 부침 ····294
111. 최 사업을 모시고 오 선생의 별서를 방문함 2수 ··297
112. 미수가  화답하므로 다시 앞의 운을 써서 지음 3수 300
113. 가을날에 담지(湛之)를 방문하고 ·······310
114. 산인 연지의 청평산 척심정(滌心亭)이란 시에 화답함 ····················312
115. 우후가를 읽고 미수와 함께 짓다 ·······313
116. 조계벽(曹溪壁)에 씀 절구 2수 ········315
117. 원(園) 자(字)를 얻어 미수의 집에 드리운 버드나무를 읊다 ··················317
118. 오 선생의 별서를 방문하고서 ·········318
119. 담지(湛之)를 북조(北朝)에 사신으로 보내면서 ·320
120. 김열보를 애도하며 ·············322
121. 요혜수좌(了惠首座)가 식량을 베풀어 준 것에 대해 사례함 ··················324
122. 차운해 담지에게 줌 절구 3수 ·········327
123. 다시 상주에서 놀며 어느 사람에게 부침 ····329
124. 모춘에 꾀꼬리 소리를 듣고 ··········332
125. 세 학생의 방문을 받고 기뻐하며 ·······333
126. 선달 김온규와 담지(湛之)에게 편지를 보냄 ···334
127. 상주(尙州) 기생 일점홍(一點紅)을 희롱함 ···337
128. 상국(相國) 김부철의 “제사군산시(題使君山詩)”를 차운함 ··················338
129. 홍 서기의 잔치 요청을 받고 시로 사례함 ····340
130. 홍 서기에게 줌 ···············341
131. 황령사 당두 관체 스님에게 보냄 ·······342
132. 오이를 따서 홍 서기에게 보냄 절구 3수 ····343
133. 최백환이 보내 준 시에 차운함 ········346
134. 익령 가는 길에 구점함 ············347
135.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을 보내면서 ·······351
136. 대서로 황보연에게 답함 2수 ·········352
137. 다시 서울에 도착해 ·············353
138. 옛날에 놀던 일을 생각하며 2수 ········355
139. 이 상국(李相國)의 봉엄사 죽루(竹樓) 제운(題韻)을 차운함 ·····················356
140. 상국 최유청의 유제를 차운함 절구 4수 ·····358
141. 병중(病中)에 느낌이 있어서 ·········360
142. 천원 홍 교서에게 받들어 부침 ········361
143. 담지(湛之)에게 줌 ·············363
144. 앞 운을 차운해 받들어 답함 2수 ········364

제4권 서간
학사 이지명에게 올리는 편지 ···········369
이담지를 대신해 어사 권돈례에게 보내는 편지 ···375
앞과 같이 권돈례에게 답하는 편지 ·········378
박인석에게 답하는 편지 ·············382
이부낭중 이순우에게 서해를 천거하는 편지 ·····384
황보약수에게 보내는 편지 ············390
동파의 문장을 논해 미수에게 보내는 편지 ·····394
영사에게 답하는 편지 ··············395
이 학사에게 올리는 편지 ·············398
형부의 이 시랑에게 올리는 편지 ··········400
왕약주에게 주는 편지 ··············404
황보약수에게 주는 편지 ·············407
조역락에게 주는 편지 ··············410
다시 조역락에게 주는 편지 ············413
담지에게 주는 편지 ···············415
산인(山人) 오생에게 부치는 편지 ·········417
계사에게 주는 편지 ···············421
홍 교서에게 주는 편지 ··············423

제5권 서·기·전
추석에 술 마시는 모임을 노래한 서 ········429
스님 가일 명자 서 ················431
미수 이인로를 보내는 서 ·············432
익령으로 부임하는 함순을 보내는 서 ········435
충주로 부임하는 황보항을 보내는 서 ········437
중원 광수원 법회에 가는 지겸 스님을 보내는 서 ···439
묘광사 16부처님 기 ···············441
소림사 중수기 ··················447
화안기 ·····················454
일재기 ·····················455
족암기 ·····················467
동행기 ·····················473
국순전 ·····················480
공방전 ·····················492

제6권 계·제문
시랑 김천에게 올리는 계 ·············505
김 소경에게 감사하는 계 ·············512
새로 급제한 최영유를 축하하는 계 ·········517
오 낭중에게 올리는 계 ··············520
모 관에게 올리는 계 ···············543
학사 이지명에게 올리는 계 ············557
안부 학사에게 올리는 계 ·············564
왕 사인을 축하하는 계 ··············577
상주서기 정소에게 감사하는 계 ··········581
김선주 원을 대신해 진양 임 대판에게 올리는 계 ···585
종형에게 답하는 계 ···············592
방문에 사례하는 계 ···············595
장원한 이미수를 축하하는 계 ···········597
안서대판 낭중 진광수에게 올리는 계 ········600
상시 이지명에게 올리는 계 ············607
복원사리 제문 ··················616
상서 김신윤의 제문 ···············621
녹사 이유량 제문 ················626
황보원 제문 ···················628
안사열 제문 ···················630
이 추밀 제문 ··················632

부록
부 이미수가 쓴 임 선생 제문 ···········639
부 서하 열전(附西河列傳) ············647
후지(後識) ···················652
고려 서하 임 공 행장(高麗西河林公行狀) ·····655
발(跋) ·····················666

원문(原文) ···················669
찾아보기 ····················780

해설 ······················823
참고 문헌 ····················842
지은이에 대해 ··················844
옮긴이에 대해 ··················847

2015년 2월 9일 월요일

음빙실문집(飮冰室文集) 천줄읽기


도서명 : 음빙실문집(飮冰室文集) 천줄읽기
지은이 : 량치차오(梁啓超)
옮긴이 : 최형욱
분야 : 중국 / 문집
출간일 : 2015년 1월 26일
ISBN : 979-11-304-6088-8 03820
가격 : 18000원
규격 : 사륙판    제본 : 무선제본    쪽 : 170쪽




☑ 책 소개

무술변법의 주인공 량치차오. 그의 계몽 사상과 학술·문학계의 혁신 노력은 중국뿐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상을 잘 드러낸 글들을 뽑아 옮겼다. 서구 문명 수용을 제창하고 애국 계몽사상을 고취하는 글에서 열강의 유린에 직면한 조국을 지키려는 동아시아 지식인의 고뇌를 느낄 수 있다.


☑ 출판사 책 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는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량치차오는 격동의 중국 근대 전환기에 끊임없이 시대를 주도하며 유신파(維新派) 계몽주의 지식인의 대표 이론가이자 실천가 역할을 수행했다. 19세기에 들어서며 내적으로 극심한 체제 이완과 외적으로 서구로부터의 충격이라는 총체적 위기 상황에 처한 중국의 지식인들은 적극적으로 생존과 구국을 위한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특히 19세기 말엽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멸망의 위기로 치닫는 격심한 변화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며 정치·사상적 대응 논리를 정립했고, 그에 부응해 문화 전반에서도 새로운 기풍을 일으켰다. 1880∼1890년대 가장 중요한 진보 정치 세력이자 지식인 집단은 바로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 사제(師弟)를 비롯한 유신파 계몽주의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위기 속에서 수구파(守舊派)의 낙후성과 양무파(洋務派)·중체서용(中體西用)의 한계를 인식하고, 사회 변혁·경세치용(經世致用)의 경향에서 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특히 청일전쟁의 실패를 계기로 그러한 인식을 더욱 강화하며 일종의 개량주의적·계몽주의적 사회 사조(社會思潮)를 형성했다.
이러한 사조의 핵심 인물인 량치차오는 학술 사상적으로 경세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금문공양학(今文公羊學) 기반 위에 사회 진화론·민족주의·계몽주의를 비롯한 근대 서구 사상을 적극 수용해 그 개혁 운동의 중요한 근원으로 삼고, 봉건 왕조의 법제와 사회를 개량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서구 제국을 모델로 삼아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총체적으로 개혁을 추진해 부강한 민족 국가를 건립하자고 역설했다.
그러나 당시 량치차오를 중심으로 추진된 개혁은 결국 민중으로부터 개혁을 이끌어 내는 데 이르지 못하고 끝내 수구파에 의해 좌절했다. 1898년 무술정변(戊戌政變)으로 변법유신(變法維新)이 실패로 끝나자 량치차오는 일본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후 그는 오히려 정치적 실패를 교훈 삼아 국민 개혁을 위해 학술·사상 및 문화 전반에 걸쳐 계몽 운동을 전개해 당시에 이미 커다란 호응을 얻은 것은 물론이고 현대에까지 계속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시대 요구에 대응하고 시대를 이끌어 나간 량치차오의 초인적인 역량은 문사철(文史哲)을 중심으로 한 학술 연구에 기반을 두었다. 그의 학문 활동은 문학·역사·철학·정치학·경제학·사회학·교육학 등등 수많은 분야를 망라했고, ‘세계 제일의 박학가(博學家)’니 ‘저술가의 제일인자’니 하는 평가에 명실상부하게 다양한 방면의 깊이 있는 연구 성과를 방대한 저술 속에 담아내어 ≪음빙실전집(飮冰室專集)≫·≪음빙실문집(飮冰室文集)≫[합해서 ≪음빙실합집(飮冰室合集)≫]으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대표적인 작품들을 골라 맛만이라도 볼 수 있게 했다.
량치차오의 학문 활동이 매우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백과사전식의 연구와 저술로 말미암아 역량이 분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학술계 전 분야에서 그의 지위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근대 학술계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룩한 인물로는 그 외에도 스승인 캉유웨이(康有爲)와 왕카이윈(王闓運)·랴오핑(廖平)·류스페이(劉師培)·장타이옌(章太炎) 등을 꼽을 수 있지만, 문사철은 물론이고 정치·경제 등 분야까지 종합해서 본다면, 모두 량치차오를 능가하지 못한다. 문학 분야에서도 물론 량치차오의 앞뒤로 콩쯔전(龔自珍)·황쭌셴(黃遵憲)과 후스(胡適)가 있어, 기풍을 열고 집대성한 공을 세웠다고 하지만,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널리 실질적인 기반을 닦아 놓은 량치차오의 역할은 더욱 중대한 것으로 여겨진다.



☑ 책 속으로

·그러므로 옛날에 남의 나라를 멸함에는 쳐서 정벌하는 것으로 멸했는데, 지금 남의 나라를 멸함에는 가엾게 여기고 따뜻하게 해 주는 것으로 멸한다. 옛날에 남의 나라를 멸할 때에는 갑작스럽게 했는데 지금 남의 나라를 멸할 때에는 점진적으로 한다. 옛날에 남의 나라를 멸함에는 드러나게 했는데 지금 남의 나라를 멸함에는 은밀하게 한다. 옛날에 남의 나라를 멸함에는 그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알아서 대비하게 했는데 지금 남의 나라를 멸함에는 그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친해져서 끌어당기게 한다. 옛날에 남의 나라를 멸하는 자는 호랑이나 이리 같았는데 지금 남의 나라를 멸하는 자는 여우나 살쾡이와 같다. 통상으로 멸하기도 하고, 빚을 놓는 방법으로 멸하기도 하고, 군사를 대신 훈련시켜 주다가 멸하기도 하고, 고문을 두었다가 멸하기도 하고, 도로를 뚫어 주고 멸하기도 하고, 당쟁을 부채질해 멸하기도 하고, 내란을 평정해 멸하기도 하고, 혁명을 도와주어 멸하기도 한다. 그 나라의 정화가 이미 고갈되어 기회가 익으면 일거에 그 국명을 바꾸고 그 지도의 색깔을 바꾼다. 그 나라의 정화가 아직 고갈되지 않아 기회가 익지 않으면 비록 그 나라의 이름을 이어 가고 그 지도 색깔을 그대로 두더라도 백 몇 십 년 후에는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아! 서구 열강으로서 이런 새로운 법을 약소국에 시행하는 나라가 몇 나라인지도 모르겠다. 이 말을 믿지 못하겠는가?

·대체로 전 세계에서 개인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로는 조선이 그 으뜸이다[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조선 사람들은 말하기를 아주 좋아한다. 두세 사람이 서로 만나면 하루 종일 이야기로 날을 보낸다. 외국 사람으로 조선인의 성격을 조금 아는 자는 말하기를, “조선 사람이 하는 말은 하나도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없다”라고 한다[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조선 사람은 화를 잘 내고 일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한번 모욕을 당하면 곧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난다. 그러나 그 성냄은 얼마 안 가서 그치고 만다. 한번 그치면 곧 이미 죽은 뱀처럼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는다[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조선 사람은 미래에 대한 관념이 매우 박약하다. 서민들은 한번 배부르면 서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차를 달이며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한담으로 날을 보낸다. 내일은 또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할까 하는 생계 문제를 계획하지 않으니, 태곳적 복희씨 시대 사람들처럼 한가로이 얽매임이 없다. 벼슬하는 사람들도 또한 그러하다. 다만 오늘 벼슬을 하고 권세가 있으면 내일 나라가 망하더라도 본래 상관할 바가 아니다.

·넷째, ‘소매파(笑罵派)’, 즉 비웃고 욕이나 하는 파다. 이 파의 사람들은 방관파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후관파(後觀派)’, 즉 뒤에서 구경하는 파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늘 남의 등 뒤에 서서 비꼬는 말이나 욕설로 남을 비평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단지 스스로가 방관자일 뿐 아니라 또 남들로 하여금 방관자가 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저들은 수구(守舊)를 욕하고, 또 유신(維新)을 욕한다. 소인배를 욕하고, 또 군자도 욕한다. 노인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무기력이 이미 깊음을 욕하고, 청년들에 대해서는 경솔하게 일을 많이 벌인다고 욕한다. 일이 성공하면 보잘것없는 놈이 요행히 공을 세웠다고 말하고, 일이 실패하면 내가 진즉에 알았다고 말한다. 저들은 늘 지적할 수 없는 입장에 스스로 서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일을 하지 않는 까닭에 지적할 수 없고, 방관하고 있으니 지적할 수 없다. 자기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일을 하는 사람 뒤에 서서 자기와 다른 이를 배척해 비웃고 공격한다. 이것은 가장 교활한 술수로, 용기 있는 자로 하여금 기가 꺾이게 하고 겁쟁이로 하여금 절망하게 한다. 단지 사람들로 하여금 절망하게 하고 기가 꺾이게 할 뿐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일에 대해서도 저들은 비웃고 욕하고 가로막는다.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도 저들은 비웃고 욕하고 망가뜨린다. 그러므로 저들은 세상의 음험한 자들이다.

·나는 취미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 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떠해야 ‘취미’라고 할 수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든 해 나갈 때 취미와 상반되는 결과를 낳지 않을 수 있는 것, 그것이 곧 취미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나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돈내기하는 게 취미가 될까요? 지면 어쩌죠? 술 마시기가 취미가 될까요? 그러다 병나면 어쩌죠? 관리가 되는 게 취미가 되나요? 자리가 없으면 어쩌죠? (…) 어떤 것들은 비록 짧은 시간 내에는 취미가 되는 것 같지만, 결국 속담에서 말하는 “불행이 한꺼번에 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그것들을 취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무릇 취미의 성질은 결국 취미로 시작해 취미로 끝나야 합니다. 따라서 취미의 주체가 될 수 있는 항목은, 첫째 노동, 둘째 유희, 셋째 예술, 넷째 학문 등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이 말을 들으시고 내가 도덕관념에 따라 취미를 선택한 것으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도덕적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나는 결코 도박이 부도덕해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도박이 본질적으로 재미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재미없는 결과는 나의 취미주의를 망가뜨리기 때문에 도박을 배척합니다. 나는 결코 학문이 도덕적이기 때문에 학문을 제창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문의 본질은 충분히 취미로 시작해 취미로 마칠 수 있는 것으로, 나의 취미주의 조건에 가장 부합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학문을 제창합니다.


☑ 지은이 소개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자(字)가 탁여(卓如), 호(號)는 임공(任公)이며, 필명(筆名)은 음빙실주인(飮冰室主人)·음빙자(飮冰子)·만수실주인(曼殊室主人)·신민자(新民子)·소년중국지소년(少年中國之少年) 등등이다. 서구 열강의 침략과 대항의 최전방 지역이었던 광둥성(廣東省) 신후이(新會) 사람으로, 반경반독(半耕半讀)의 향신(鄕紳) 가정에서 태어났다. 동치(同治) 12년(1873), 즉 아편전쟁이 일어난 지 33년 뒤, 태평천국의 난이 평정된 지 10년 뒤, 서구의 충격이 한창 중국으로 물밀듯이 거세게 쳐들어오던 시기였다.
량치차오는 중국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 중요한 근대 전환기를 살면서 끊임없이 시대를 이끌어 간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신문·잡지 및 교육을 기반으로 변법유신(變法維新)을 도모하고, 근대화된 서구 문명을 선전함으로써 폐쇄되었던 근대 중국에 새로운 개혁의 기풍을 일으켰으며, 특히 탁월한 계몽주의 사상가·정치가·언론인·교육자·문학가로서 중국 문화사(文化史)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일반적으로 량치차오의 생애는 크게 수학(修學) 시기(1873∼1894), 유신 운동과 계몽 활동 시기(1895∼1903), 입헌 추진과 정치 재개 시기(1904∼1917) 그리고 강학(講學)과 저술 시기(1918∼1929) 등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의 인생 역정은 한마디로 중국의 근대화를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정계에서 은퇴한 1917년 무렵까지는 주로 정치가로서 학술 활동을 병행하면서 자신이 말한 학자의 임무인 ‘세상을 깨우쳐야 한다(覺世)’는 사명감 아래 근대 중국의 신문화(新文化) 창도자·실천자로서 소임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1918년 이후로는 학술 연구에 전념하면서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傳世)’ 전통문화의 수호자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도 그 변화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도록 1918년 이후의 작품도 일부 실었다.


☑ 옮긴이 소개

최형욱
최형욱(崔亨旭)은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양대 중문과를 졸업하고, 1988년 타이완 국립정치대학 대학원에서 <청대 양호파의 원류 및 그 문학 이론 연구(淸代陽湖派的源流及其文學理論硏究)>라는 논문으로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연세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1996년 <량치차오의 문학 혁명론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4년부터 한양대, 연세대 등에서 시간 강사를 역임하고, 1998년부터 2000년까지 경동대 전임 강사를 거쳐 현재 한양대 중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6년 여름부터 1년간 방문학자로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 중국학센터에서 연구한 바 있다. 주요 논문 및 저역서로 <조선의 량치차오 수용과 량치차오의 조선에 대한 인식>, <량치차오의 중국 국민성론 및 조선 국민성 비판 탐구>, <중국 근대의 계몽주의 문학 사조>, <량치차오의 시계 혁명론이 개화기 한국 시론에 미친 영향>, <량치차오의 추풍단등곡(秋風斷藤曲) 탐구>, <한중 전통문화 관련 디지털 인문 콘텐츠 실태 비교 및 수준 향상 방안 연구>, ≪신편 명심보감≫,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등이 있다.
역자는 평소 중국의 근현대 문학 이론, 근현대 한중 사상·문학 비교, 특히 중국 근대 문학과 현대 문학의 연계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대체로 1910년대 후반, 즉 5·4 운동 무렵을 기점으로 보는 중국 현대 문학사는 왕왕 이전의 장구한 중국 문학이나 역사와 단절시켜 논의하는 경향이 있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전통은 계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쉰(魯迅, 1881∼1936) 이전에는 마치 문학이 없다시피 한 것으로 보이게 했다. 중국 근현대 문학의 발전 양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또 그 가운데서 이전 문학과 연계된 흐름을 이해한다면, 중국 문학 특히 근현대 문학 연구에 새로운 시야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연구에 임하고 있다.
또한 중국 근현대 문학 및 사상에 대한 연구는 그 자체로서뿐만 아니라 이 시기 우리 문학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연구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근현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전통적인 관념들이 왜, 어떻게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해 갔는가, 문학을 비롯한 서구 문명이 밀려들어 중국과 충돌하고 또 융화되면서 어떤 양상을 보였는지 등에 관한 많은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우와 비교해서도 큰 관심을 갖게 한다. 즉, 우리나라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근대화 시기에 서구 열강 및 일본의 침탈을 겪음으로써, 부득이 우리의 본모습을 잃고 커다란 곤혹과 수모를 치르며 파행적인 근대화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근대화에서도 서구적 근대화에 대한 저항과 수용이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으며, 이로 인해 중국과 유사한 모습들이 보였다. 때문에 본서의 작업을 포함한 역자의 연구 과제들은 중국 근현대 문학 및 사상의 형성·연계와 그 본질을 살피는 데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에 대한 이해를 통해 또 다른 각도에서 중국과 우리나라 및 세계의 근현대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는 기반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목차

해설 ······················vii
지은이에 대해 ··················xv

1. 변법에 대해 두루 논의함(變法通議) ········3
2.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는 새로운 법(滅國新法論) ··6
3. 조선 멸망의 원인(朝鮮滅亡之原因) ·······11
4. 중국이 허약해진 근원을 논함(中國積弱遡源論) ··33
5. 국민에게 필요한 10대 원기를 논함(國民十大元氣論) 37
6. 서로 반대가 되고 동시에 보완해 주는 열 가지 덕성(十種德性相反相成義) ·············45
7. 과도기론(過渡時代論) ·············50
8. 방관자를 꾸짖노라(呵旁觀者文) ·········56
9. 신민설(新民說) ················65
10. ≪중국의 무사도≫ 서문(≪中國之武士道≫自敍) 94
11. 음빙실자유서(飮冰室自由書) ··········98
12. ‘이룰 수 없음을 알면서도 하는’ 주의와 ‘하되 가지지 않는’ 주의(知不可而爲主義與爲而不有主義) ·113
13. 학문하기와 사람 되기(爲學與做人) ·······119
14. 학문의 취미(學問之趣味) ···········133
15. 학문 연구에 관해(治國學雜話) ·········141

옮긴이에 대해 ··················146

2014년 12월 15일 월요일

정암 문집 靜庵文集


도서명 : 정암 문집 靜庵文集
지은이 : 왕궈웨이(王國維) 지음
옮긴이 : 류창교
분야 : 문집
출간일 : 2014년 12월 16일
ISBN : 979-11-304-5926-4   03820
가격 : 28000원
규격 : 사륙판     제본 : 무선제본    쪽 : 396쪽



☑ 책 소개

중국 최고의 국학자 왕궈웨이. 그가 직접 편찬 교정해 출간한 첫 학술 문집 ≪정암 문집≫을 소개한다. 중국 최초로 독일 철학을 소개하고 아울러 중국의 전통 철학과 서양 철학의 비교 연구를 시도했다. 그의 철학과 미학, 문학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보아야 할 책.  


☑ 출판사 책 소개

본서는 ≪왕궈웨이 유서(王國維遺書)≫(上海古籍出版社, 1983, 第一版, 16冊, 上海書店出版社, 1996, 第二次 印刷, 10冊)에 수록된≪정암 문집(靜庵文集)≫(제3책, 331∼552쪽)을 완역했다. ≪정암 문집≫은 왕궈웨이 자신이 직접 편찬 교정해 단행본으로 출간한 첫 번째 학술 문집으로 광서(光緖) 31년(1905) 9월에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1920년, 1921년에도 상하이의 상무인서관에서 대리 판매를 했고, 당시 ≪도서회보(圖書匯報)≫에도 ≪정암 문집≫이 그대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다가 1924년에 절판되었고, 그 후 왕궈웨이가 사망한 뒤에는 재판되지 않았으며, 사후에는 유서에 편입되어 전해지고 있다.
≪정암 문집≫은 ‘정안 문집’이라고도 일컫는다. 유서의 제1책(第一冊)에 나오는 총목차(海寧王靜安先生遺書總目)를 보면 “정안 문집 1권(靜安文集一卷) 속집 1권(續集一卷)”(제3책 329쪽)으로 되어 있고, 제3책 329쪽에는 “정암 문집(靜庵文集) 부(附) 속집(續集)”으로 되어 있다. 정안(静安)과 정암(静庵)은 모두 왕궈웨이의 자(字)이기 때문에 ≪정안 문집≫, ≪정암 문집≫ 두 가지 명칭 모두 틀리지 않다. 그러나 목차는 왕궈웨이 사후에 편집해 넣은 것이고, 왕궈웨이 자신이 생전에 출판할 때는 ‘정암 문집’으로 명명했으며, 해당 서책에서 ‘정암 문집’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본서에서는 ‘정암 문집’으로 명명했다. 유서에는 ≪정암 문집≫, ≪정암 시고(靜庵詩稿)≫, ≪정암 문집 속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암 시고≫는 고금체시(古今體詩) 50수를 부록으로 붙여 “정암 시고”로 명명한 것이고 ≪정암 문집 속편≫은 왕궈웨이 사후에 후대 사람이 명명하고 편집해서 넣은 것이다. 따라서 본서에서 말하는 ≪정암 문집≫은 부록과 속편을 제외한 ≪정암 문집≫만을 가리킨다.
≪정암 문집≫은 그가 주편을 맡고 있던 잡지 ≪교육 세계(敎育世界)≫에 발표한 글 12편을 모은 것으로 이 글들은 모두 1904년에서 1905년 사이에 발표한 것이다. 주로 철학과 교육학에 대한 글들로 연구 논문집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당시 왕궈웨이는 서양 철학을 공부하면서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의 설을 끌어와 철학, 미학, 문학, 교육학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슴없이 드러냈다. 여기에 수록된 12편의 글을 내용에 따라 분류해 보면 학술과 관련된 글로 <최근 몇 년의 학술계를 논함(論近年之學術界)>(1905), <새로운 학술 용어의 수입에 대해 논함(論新學語之輸入)>(1905), 철학, 미학과 관련된 글로 <철학자와 예술가의 천직을 논함(論哲學家及美術家之天職)>(1905),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교육학설(叔本華之哲學及其敎育學說)>(1904), <쇼펜하우어와 니체(叔本華與尼采)>(1904), <쇼펜하우어 유전설 후기(書叔本華遺傳說後)>[부록: 쇼펜하우어의 유전설(附叔本華遺傳說後), 1904], <현 왕조의 한학파 대진, 완원 두 사람의 철학 학설(國朝漢學派戴阮二家之哲學說)>(1904), <인성을 논함(論性)>(1904), <이치[理]에 대한 풀이(釋理)>(1904), 교육과 관련된 글로 <대중 교육주의를 논하다(論平凡之敎育主義)>(1905), <교육우감 4칙(敎育偶感四則)>(1904), 문학과 관련된 글로 <홍루몽평론(紅樓夢評論)>≫(1904) 등이 있다. 이 문집은 동서고금의 문화가 교차하던 근대 중국에 살았던 한 지식인의 치열한 고민과 사유의 산물로, 여기에는 나중에 국학대사이자 천재 지식인으로, 넓고 깊고 정예로운 학문 세계를 건설해 갈 젊은 왕궈웨이의 초기 사상이 그대로 들어 있다. 왕궈웨이는 이 문집에서 당시로는 대단히 파격적인 주장을 통해 중국의 신문화 창조에 이바지하려고 했지만 이 문집은 발표 당시 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정암 문집≫을 편찬할 당시에 왕궈웨이는 서양 철학에 대해 깊은 회의와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그 후 철학을 버리고 문학으로 전향했으며, 그 뒤에 다시 문학에서 국학 연구로 전향하게 된다.


☑ 책 속으로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으로는 하나는 선천적 지식이고, 하나는 후천적 지식이다. 선천적 지식은 공간과 시간의 형식 및 오성(悟性)의 범주처럼 경험할 필요 없이 생겨나 경험이 그것을 경유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으로 칸트의 지식론이 나온 뒤부터 오늘날 거의 정론이 되었다. 후천적 지식은 바로 경험이 나를 가르치는 것으로 무릇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이것이다. 양자의 지식은 모두 확실성이 있는데 다만 전자는 보편성과 필연성이 있고, 후자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 확실함은 다를 게 없다. 지금 시험 삼아 묻겠는데 본성[性]이라는 것을 과연 선천적으로 아는가? 아니면 후천적으로 아는가? 선천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지식의 형식이며 지식의 재질에는 미치지 못하는데 본성[性]은 진실로 지식의 한 재질이다. 만약 후천적으로 그것을 안다면 아는 것은 또한 본성[性]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으로 아는 본성[性]은 유전과 외부의 영향을 받는 것이 적지 않아서 본성[性]의 본래 면목이 아님이 진실로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언컨대 본성[性]이라는 것은 우리의 지식을 뛰어넘는다. 

●칸트는 통상 이성이라고 말하는 것을 오성이라고 말하고, 이성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우리가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감각을 결합함으로써 직관을 이루는 것은 감성의 일이고, 직관을 결합해 자연계의 경험을 하는 것은 오성의 일이며, 경험의 판단을 결합해 형이상학의 지식을 만드는 것은 이성의 일이라고 했다. 이 특별한 해석으로부터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은 마침내 이성을 우리가 감각적 능력을 초월해 본체의 세계와 그 관계를 곧장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다만 셸링과 헤겔 무리는 유쾌하게 만족해서 이성의 체계를 조직했는데 그러나 우리의 지력 중에 과연 이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본체의 세계가 과연 이 능력으로 인해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두 따지지 않았다. 쇼펜하우어가 나타나 비로소 엄격하게 오성과 이성을 구별했다. 그는 <충족 이유의 논문>에서 직관 속에 이미 오성의 작용이 존재함을 증명했다. 우리에게 오성의 작용이 있어 이에 직관의 세계가 있고, 이성의 작용이 있어 비로소 개념의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 소위 이성이라는 것은 개념과 분석 종합의 작용을 만드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 작용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사업은 이미 충분히 동물을 훨씬 능가한다. 초감각의 능력은 우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그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충족 이유의 논문>에서 그것을 수천만 마디로 구별했고, 그런 뒤에 이성의 개념이 찬란히 다시 세상에 밝혀졌다. 맹자가 말했다. “마음이 똑같이 그러한 바는 무엇인가? 이(理)고, 의(義)다.” 정자(程子)가 말했다. “성이 곧 이다(性卽理也)”. 이(理)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비록 논리학적 가치 외에 또 윤리학적 가치를 부여했지만 그러나 그들이 이(理)를 마음의 작용으로 본 경우를 살펴본다면 진실로 이성(理性)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설에 따르면 비극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 비극은 극악무도한 사람이 그가 지닌 능력을 다 동원해 얽어 놓은 경우다. 둘째는 맹목적 운명에서 비롯한 것이다. 셋째 비극은 극 중 인물의 위치와 관계가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로 반드시 악독한 성질이나 뜻밖의 변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보통의 인물이 보통의 경우를 당해서 그를 핍박해 이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로 그들은 그 해악을 훤히 알아 번갈아 가하고 번갈아 받으며 각기 애를 다 써 보지만 각자 허물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러한 비극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앞의 두 가지 경우보다 훨씬 심하다. 왜 그런가? 그것이 인생의 최대의 불행이란 예외가 없고 인생 본래의 것임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앞의 두 비극의 경우 우리는 악독한 인물과 맹목적 운명에 대해 두려워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러나 그런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오히려 요행히 우리 인생에서 모면할 수 있으며 잠시 쉴 곳을 꼭 찾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셋째 경우에는 이 비상한 세력이 인생의 행복을 충분히 파괴할 수 있어서 때때로 우리 앞에 떨어지지 않음이 없으며, 또한 이와 같은 참혹한 행위는 때때로 자신이 받을 뿐만 아니라 혹은 다른 사람에게 가할 수도 있어 몸소 그 가혹함을 당하면서 불평의 소리를 낼 수가 없으니, 이것은 천하에서 지독한 참혹이라고 할 만하다. ≪홍루몽≫의 경우는 바로 셋째 비극이다. 여기서는 보옥과 대옥의 사건을 들어 말해 보겠다. 가모(賈母)는 보채의 아름다움과 유순함을 사랑하고 대옥의 괴팍함을 경계했다. 또한 금옥(金玉)의 사악한 말을 믿고 보옥의 병을 진정시킬 생각을 했다. 왕 부인은 진실로 설씨(薛氏)와 친하고, 봉저는 집안 살림을 돌보고 있기 때문에 대옥의 재주를 시기하고 그것이 자신을 불편하게 할까 봐 걱정했다. 습인(襲人)이 우이저(尤二姐)와 향릉(香菱)의 사건을 경계하다가 대옥이 “동풍이 서풍을 넘어뜨리지 않으면 서풍이 동풍을 넘어뜨리기 마련이다”라고 한 말(제82회)을 듣고는 재앙이 미칠까 두려워 스스로 봉저에게 붙은 것은 또한 자연의 형세다. 보옥은 대옥에게 날마다 맹세하면서도 그를 가장 사랑하는 조모에게는 말할 수 없었으니 보편적 도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물며 대옥 같은 일개 여자의 경우에랴? 이 몇 가지 원인으로 금과 옥이 합하고 나무와 돌은 헤어지게 되었으니, 또한 어찌 악독한 인물이 있었다거나 특이한 변고가 그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겠는가? 보편적 도덕과 보편적 인정 그리고 보편적 경우가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다. 이로 볼 때 ≪홍루몽≫은 비극 중의 비극이라고 할 만하다.

●지금 돌아보건대 우리나라 사회는 정의 사상의 결핍이 실로 놀라울 정도인데, 어찌 평민만 그러하겠는가? 설령 평소 개명한 신사라고 부르는 자라도 결국 멍청해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전에 어떤 부서에서 중학교를 세우려는 자가 있었는데 그 부지가 사찰과 인접해 있어서 결국 관력(官力)으로 사찰을 겸병(兼倂)해 소유하고 게다가 승려들에게 낭패를 보게 해 다른 곳으로 옮기고선 기쁘다고 말했다. 이는 도둑도 하지 않는 짓이다. 원래 이 사찰의 건립은 틀림없이 사회적 물리력에 의한 것이었겠지만 승려가 그곳에 거처하고 경영한 것이 수백 년이라면 그것이 개인의 재산이 된 것은 진실로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고 강한 힘으로 약자가 가진 것을 빼앗아 소유하고, 게다가 그들로 하여금 고발할 데가 없게 하니, 승려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것이 도적보다 심하다고 해도 정말 지나치지 않다. 가령 다시 강하고 힘이 있는 자가 나와 이 학교를 빼앗아 그것을 소유한다면 이 학교를 창설한 자의 감정이 또한 어떻겠는가? 저 생도한테 이런 강의실에 들어가 이런 기숙사에 살면서 정의의 덕성을 함양하게 한다면 어찌 물러나면서 앞으로 가고자 하고, 수레의 끌채는 남쪽을 향하게 하고 바퀴는 북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 지은이 소개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
마지막 황제 푸이(傅儀)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 자는 정안(靜安), 정암(靜庵), 백우(伯隅) 등이고 호는 예당(禮堂)이며, 만년에는 영관당(永觀堂)이라고 했다가 관당(觀堂), 영관(永觀)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했다]는 철학, 미학, 문학, 희곡사, 갑골문, 금문(金文), 고대 기물, 은주(殷周) 역사, 한대와 진대(晉代)의 목간(木簡), 한위(漢魏)의 비각(碑刻), 둔황(敦煌) 문헌, 서북지리(西北地理), 몽고사 등을 연구해 각 영역에서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
왕궈웨이는 1877년(청 광서 3년) 12월 3일(음력 10월 29일) 진시(辰時)에 저장성(浙江省) 하이닝[海寧, 지금의 하이닝시(海寧市) 옌관진(鹽官鎭)] 솽렌항(雙仁巷)에서 태어났다. 1892년(광서 18년, 만 15세) 7월에 주학(州學)에 들어가 하이닝주(海寧州)의 세시(歲試)에 참가해서 21등으로 합격해 수재(秀才)가 된다. 이때 왕궈웨이는 그 고을에서 이름을 떨쳐 천소우첸(陳守謙), 예이춘(葉宜春), 주자요우(褚嘉猷) 등과 함께 “하이닝의 네 재주꾼(海寧四才子)”으로 불렸다. 
1898년 2월에 왕궈웨이는 상하이로 가서 일을 찾던 중 친구의 주선으로 시무보관(時務報館)에 취직한다. ≪시무보≫는 진보적 저널리스트인 왕캉녠(汪康年)이 주필을 맡고 있던 유명 시사 잡지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서기와 교정 일을 보았다. 3월 22일에 뤄전위(羅振玉)가 세운 동문학사(東文學社)가 개학하자 왕궈웨이는 왕캉녠의 동의를 받아 이곳에서 매일 오후 몇 시간 동안 영어와 일어,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습득했는데, 주로 화학, 물리, 수학, 지리 등의 자연과학이었다. 동문학사에서 왕궈웨이는 평생의 후원자인 뤄전위를 만난다. 
1901년, 봄에 왕궈웨이는 친구 판빙칭(樊炳淸)과 함께 뤄전위의 요청으로 우창(武昌)의 후베이농무학당(湖北農務學堂)으로 가서 농업 관련 서적과 사건들을 번역하게 된다. 이해 5월에 뤄전위는 상하이에서 잡지 ≪교육 세계(敎育世界)≫를 창간해 왕궈웨이에게 주필을 맡겼다. 왕궈웨이는 이 잡지를 통해 자신의 글과 번역문을 많이 발표하게 되는데, 나중에 여기에 수록된 글의 일부를 모아 ≪정암 문집≫을 출간한다. 
1902년 2월 왕궈웨이는 뤄전위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다. 왕궈웨이는 일본에서 스승 후지타의 권유로 이과 공부를 하게 되는데 낮에는 영어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도쿄 물리학교에 가서 수학을 공부했다. 왕궈웨이의 일본 유학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도쿄에 머문 지 4, 5개월 만에 각기병이 재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뤄전위의 동의를 얻어 결국 여름에 귀국하고 말았다. 
1903년 3월 왕궈웨이는 퉁저우사범학당(通州師範學堂)에 부임했고 1904년 말에는 장쑤사범학당에서 심리학, 윤리학, 사회학 등을 가르쳤다. 이때 후지타 선생 역시 이 학교에 있었으므로 왕궈웨이는 틈나는 대로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06년(광서 32년, 만 29세) 봄에 청 정부는 학부(學部)를 신설한다. 이때 뤄전위는 돤팡의 추천으로 학부에서 일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정식으로 참사관(參事官)이 되었다. 이에 왕궈웨이 역시 뤄전위를 따라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왕궈웨이는 뤄전위의 집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교육 세계≫의 원고를 집필했다. 1907년 봄에는 뤄전위의 추천을 받아 학부총무사행주(學部總務司行走)가 되었고, 학부 도서관에서 편집과 교과서 등을 편역하고 심의하는 일을 맡는다. 
베이징에 온 이후 대략 이 시기부터 왕궈웨이는 철학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되는데, 대략 2, 3년 전, 즉 1904년경부터 이미 철학에 대해 번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형이상학적 염세주의의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체계가 자기 자신의 견식 있는 직관적 지식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철학에 대한 이와 같은 회의가 지속된 결과 1907년경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문학으로 전향하게 된다. 1907년은 왕궈웨이가 철학에 대한 사상적 번민을 거친 뒤 문학을 통해 ‘직접적 위로’를 얻기 위해 사와 희곡 연구로 학술 방향을 전환한 시기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이해 12월에 왕궈웨이는 뤄전위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다. 1911년 이후부터 뤄전위가 왕궈웨이의 학문에 끼친 영향은 특별하다. 뤄전위는 회의주의와 서양 관념의 영향으로 청조가 몰락했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이 줄곧 인정하고 지원했던 왕궈웨이와 같은 사람이 학자적 의무로서 국학을 하기를 희망했다. 뤄전위는 왕궈웨이에게 국학 연구에 최선을 다해 보자고 권유했고 왕궈웨이는 이때부터 “이전의 학문을 다 버리고 오로지 경학과 역사학을 연구했다”. 
1916년 1월 2일 왕궈웨이는 4년 동안 머물던 일본을 떠나 상하이로 돌아왔다. 1916년 초에 하둔이 새로 만든 잡지 ≪학술 총편(學術總編)≫의 편집인으로 고용되어 학술 잡지를 편집하면서 교토에서와 마찬가지로 학술 연구에 매진했다. 그 후 1918년부터 창성밍즈대학(倉聖明智大學) 교수를 겸임했다. 왕궈웨이는 상하이에서 약 7, 8년간을 머물렀다.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했지만 학술상의 업적은 풍요로웠으니 그의 유명한 논저는 모두 이 시기에 쓰였고, 명성도 점점 높아만 갔다.
1923년 음력 3월 1일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양종시(楊鍾羲), 징팡창(景方昶), 원쑤(溫肅), 왕궈웨이를 모두 남서방 행주로 임명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직무는 학문 강론, 서적 조사, 시 낭송, 그림 그리기, 골동품 감상 등으로 청반(淸班), 즉 소위 문학(文學) 시종지신(侍從之臣)에 속했다. 그러나 황제의 신임을 얻어 초안 작성을 돕거나 정무를 처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서방 행주라는 직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924년 펑위샹(馮玉祥)의 국민군이 베이징을 침략해 새로운 내각을 만들고 푸이를 자금성에서 내쫓았다. 황제가 일본 영사관으로 피신한 뒤 왕궈웨이는 후쓰의 추천을 받아들여 1925년부터 칭화대(淸華大) 국학연구원의 교수가 되었다. 칭화대학에서 왕궈웨이의 생활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무엇보다 연구소에서 그는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둘러싸였으며 그들은 모두 그를 학자로서 인간으로서 존경해 주었다. 왕궈웨이는 이곳에서 그 자신의 지적 흥미를 추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후에 그는 초기 몽골 시기의 역사와 지리 연구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 이 시기에 왕궈웨이는 또한 국가적 사업으로 서북 변경 지리(西北邊疆地理)와 요(遼), 금(金), 원(元)의 역사를 연구했다. 당시 그는 학계의 거두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이 되었는데, 거의 쉰이 다 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와 고대 소수 민족 문자에 정통한 소장학자 뤄쥔추(羅君楚, 당시 20여 세)와 천인커(陳寅恪, 당시 30여 세)에게 찾아가 배움을 청할 정도로 학문에 정열을 쏟았다.
청화원에서 조용한 생활을 보내던 그는 1926년 말엽 일련의 심각한 사건을 겪으면서 우울해졌다. 1926년에 그의 장남이 사망한 데다 장례 문제로 그의 아내와 며느리(뤄전위의 딸)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오랜 후원자인 뤄전위와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하게 된다. 게다가 1927년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시대의 불안감은 극대화되었고 그는 나라의 미래와 황제의 안전에 대해 낙담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해 대단히 비관적이었고 자살하기 바로 전날인 1927년 6월 1일에 삶의 허무와 체념을 드러낸 글을 남기고, 다음 날 오전 이허위안(頤和園) 쿤밍호(昆明湖)에서 투신자살했다. 그의 몸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이 세상의 변화를 겪게 되었으니, 옳음으로 다시는 욕되지 않으리라”라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 황제 푸이는 왕궈웨이에게 “충각(忠悫)”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 옮긴이 소개

류창교
류창교는 안동 하회에서 태어나 한국고등 교육재단에서 한학연수 장학생으로 사서삼경을 수학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왕국유(王國維) 문예 비평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동아시아어문과 특별연구원, 중국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방문학자, 숙명여자대학교 인문학부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미국(美國)의 중국 문학(中國文學) 연구(硏究)≫(2003), ≪세상의 노래 비평, 인간사화(人間詞話)≫(역주서, 2004),≪왕국유 평전≫(2005), ≪완역 설도 시집≫(2012), ≪완역 어현기 시집≫(2013) 등이 있고, 중국 고전 문학과 중국 여성 문학에 대한 논문이 여럿 있다.


☑ 목차

자서(自序) ····················3
1. 인성을 논함(論性) ···············5
2. 이치에 대한 풀이(釋理) ·············39
3.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교육학설(叔本華之哲學及其教育學說) ·················74
4. 홍루몽 평론(紅樓夢評論) ···········116
5. 쇼펜하우어와 니체(叔本華與尼采) ·······184
6. 현 왕조의 한학파 대진, 완원 두 사람의 철학 학설(國朝漢學派戴阮二家之哲學說) ·········215
7. 쇼펜하우어 유전설 후기(書叔本華遺傳說後) ··240
부록: 쇼펜하우어의 유전설(附: 叔本華氏之遺傳說) ·259
8. 최근 몇 년의 학술계를 논함(論近年之學術界) ··284
9. 새로운 학술 용어의 수입에 대해 논함(論新學語之輸入) ····················298
10. 철학자와 예술가의 천직을 논함(論哲學家與美術家之天職) ··················309
11. 교육우감 4칙(教育偶感 四則) ·········316
12. 대중 교육주의를 논하다(論平凡之教育主義) ··329

해설 ······················335
지은이에 대해 ··················341
지은이 연보 ···················384
옮긴이에 대해 ··················388


2014년 5월 30일 금요일

청허당집 淸虛堂集


청허당집 淸虛堂集
휴정 지음 / 배규범 옮김
분야 : 문집
출간일 : 2011년 9월 28일
ISBN : 978-89-6406-825-0
18000원 / A5 제본 / 232쪽


☑ 책 소개


일흔의 나이에 승병대를 이끌어 조선을 임진왜란의 불구덩이에서 건져낸 애국선사, 사명대사 유정, 정관대사 일선, 소요대사 태능을 길러 낸 조선 불교계의 태두, 서산대사 휴정. 그러나 다만 한 벌 옷과 한 바리때 밥으로 산중에서 살기를 바란 소탈한 산승의 진면목을 그의 문집에서 만날 수 있다.


☑ 출판사 책 소개

청허당 휴정은 조선이 배출한 최고의 승려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 건국 이래 처음 맞이하는 전란의 시대였다. 수도가 유린되고, 임금이 중국으로 망명을 가느냐 마느냐 하는 처지였다. 그 속에서 이 땅의 백성은 왜적의 발굽 아래 철저하게 유린되었다. 또한 휴정은 억불(抑佛)의 시대를 살았다.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아 그 외의 종교는 배척되었다. 당시의 승려는 유가 문사들에게 이른바 공공의 적이었다. 그들은 국가정책의 방향을 억불에 맞추어 나갔다. 승려는 사회적 신분이 저하되고, 그것은 승려 집단의 질적 저하로 이어졌다. 산사 불교 시대가 도래하면서 승단(僧團)이 받은 질적 양적 타격은 엄청났다. 이 모든 악조건 속에서 휴정은 조선조 불교를 부흥시켰다. 산중 승가의 풍토를 바꾸어 놓은 중흥조(中興祖)였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수많은 불제자들은 한국 불교를 지탱한 기둥이었다. 휴정은 제자들을 그들의 깜냥에 맞게 길러 냈다. 유정(惟政)은 실질적인 법의 계승자였지만 당시 나라가 처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승병장 생활을 통해 불교계의 바람막이 역할을 수행했다. 반면 일선(一禪)은 청정 구도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그는 지리산에 은거하며 평생을 참선과 염불로 일관했다. 출가승의 본분을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태능(太能)은 유정이 떠난 교단을 수호하며 교단 정비에 나섰다.
휴정은 종파가 사라진 뒤 교리적인 면에서 그 맥을 이은 분이다. 1424년 세종(世宗)은 기존 한국 불교의 종파를 선교(禪敎) 양종(兩宗)으로 인위적으로 묶음으로써 불교계를 견제했다. 즉, 조계종·천태종·총남종을 합쳐서 선종이라 하고,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을 합쳐서 교종이라 했다. 그리고 이마저도 1565년(명종 20)에 오면 아예 종 자체가 사라졌다. 각 종들은 나름대로 교의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 특징이 사회적 위축과 함께 사라져 갔다. 각 종파의 종지가 서지 않고서는 교단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리가 만무했다. 한국 불교 사상사에서 휴정의 주된 업적은 바로 이 흩어져 사라질 위기에 놓인 종지를 일신(一新)해서 정리했다는 점이다. 휴정의 사상은 조사선(祖師禪) 중심의 선교일치론(禪敎一致論)과 염불 정토관(淨土觀)의 강조라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현존하는 서산대사의 비문과 ≪동사열전(東師列傳)≫에는 모두 ≪청허당집(淸虛堂集)≫을 8권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 현행본 ≪청허당집≫에는 2권본·4권본·7권본만이 있다. 7권본은 현재 숭정 3년(崇禎三年) 경오(庚午, 1630) 경기도 삭녕(朔寧) 용복사(龍腹寺) 간본이 남아 전하며, 4권본은 간년을 알 수 없는 묘향장판(妙香藏板)이 전해지고, 2권본은 강희(康熙) 5년 병오(丙午, 1666) 동리산 태안사(泰安寺) 개판 및 간년을 알 수 없는 몇 가지가 현존하고 있다. 각 판본들은 내용적으로 볼 때 부분적인 첨삭이 있어 혼란을 줄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종합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7권본을 대본으로 삼아 그 혼란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청허당집≫은 한국 불교의 큰 획을 그은 청허휴정의 문집이다. 승속을 넘어 많은 이에게 읽힘으로써 청허대사의 정신이 우리의 삶 속에 계승되는 데 일말의 도움이라도 된다면 이 책은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 책 속으로

●하하하 웃으며 천지간에 섰으니
푸른 물결 아득히 배 떠나가네.
아침나절 국화는 눈물 머금었고
한밤중 단풍잎은 가을을 흐느끼네.

●삶은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은 모두 헛된 이름일 뿐.
결박을 벗으니 어젯밤 꿈과 같은데
살길이 트이고 또 트이는구나.
하늘과 땅을 쥐락펴락하면서
해와 달을 삼켰다 토했다 했지.
바리때 하나와 한 벌 옷으로
씩씩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네.

●맑은 연못 텅 비었으니
산 그림자 환하게 비치었네.
새를 보고 또 물고기도 보니
날고 잠기는 것도 제 본성인걸.

저 샘물 콸콸 흘러내리니
빛과 그림자 모두 환히 비었도다.
분명히 다른 물건이 아니거늘
놀랍게도 하늘이 한 번 웃는 소리로다.

●천 가지 만 가지 생각들이
붉은 화로에 한 점 눈과 같네.
진흙 소가 물 위를 걸어가니
대지와 허공이 다 찢어진다.


☑ 지은이 소개

휴정(休靜, 1520∼1604)
휴정(休靜, 1520∼1604). 조선 중기의 승려·승군장(僧軍將). 본관은 완산(完山)이고, 속성은 최(崔)씨이며, 자는 현응(玄應)이고, 호는 청허(淸虛) 또는 서산(西山)이며, 아명은 여신(汝信)으로, 안주(安州) 출생이다. 1534년 진사시에 낙방하자 지리산에 입산, 일선(一禪)에게 구족계를 받고 영관(靈觀)의 법을 계승했다. 1552년 승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 때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16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이 되어 승병(僧兵)을 모집,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1594년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냈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부도가 서고, 해남(海南) 표충사(表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청허당집(淸虛堂集)≫이 있고, 편저에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운수단(雲水壇)≫, ≪삼가귀감(三家龜鑑)≫, ≪심법요(心法要)≫, ≪설선의(說禪儀)≫ 등이 있다.


☑ 옮긴이 소개

배규범
배규범은 1998년 문학박사 학위(<임란기 불가문학 연구>)를 받은 이래, 한국학 및 불가 한문학 연구에 전력하고 있다. 한자와 불교를 공통 범주로 한 ‘동아시아 문학론’ 수립을 학문적 목표로 삼아, 그간 한국학대학원 부설 청계서당(淸溪書堂) 및 국사편찬위원회 초서 과정을 수료했으며, 수당(守堂) 조기대(趙基大) 선생께 사사했다.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에서 지난 10여 년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및 한자 강의를 진행했으며, (사)한국한자한문능력개발원의 한자능력검정시험 출제 및 검토 위원으로 재임 중이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 학술진흥재단의 고전 번역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2000년부터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고·순종≫ 교열 및 교감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경희대(학진연구교수), 동국대(학진연구교수), 북경 대외경제무역대학(KF객원교수)을 거쳐 현재 중국 북경공업대학 한국어과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중국 학생들에게 한국어 및 한국 문화를 강의하고 있다. 편역자는 해외에서 우리의 말과 문화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연구와 전파라는 새로운 뜻을 세우고 활동 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불가 잡체시 연구≫, ≪불가 시문학론≫, ≪조선조 불가문학 연구≫, ≪사명당≫, ≪한자로 배우는 한국어≫, ≪요모조모 한국 읽기≫, ≪외국인을 위한 한국 고전문학사≫, ≪외국인을 위한 한국 근현대문학사≫, ≪속담으로 배우는 한국 문화 300≫, ≪관용어로 배우는 한국 문화 300≫ 등이 있고, 역저로는 ≪역주 선가귀감≫, ≪한글세대를 위한 명심보감≫, ≪사명당집≫, ≪허정집≫, ≪허응당집≫, ≪청허당집≫, ≪무의자 시집≫, ≪선가귀감≫, ≪역주 창랑시화≫ ≪정관집≫, ≪초의시고≫ 등이 있다.


☑ 목차

임하사 林下辭 ···················3
산중사 山中辭 ···················5
청허가 淸虛歌 ···················7
회포를 읊다 詠懷 ···················8
봄날의 회포를 읊다 春日詠懷 ···················10
약산의 띳집 정자 藥山茅亭 ···················12
입춘 立春 ···················14
감사 이식의 시를 빌려 次李監司拭韻 ···················16
벽천 스님에게 贈碧泉禪和子 ···················18
유정 스님에게 贈惟政大師 ···················20
욱 스님에게 贈昱禪子 ···················22
인수 스님과 헤어지며 贈別獜壽禪子 ···················24
명감·상주·언화와 여러 문도에게 示明鑑尙珠彦和諸門輩 ···················25
밤이 되어 동호에서 머물며 東湖夜泊 ···················28
저녁 되어 남쪽 바다에서 머물며 南溟夜泊 ···················29
초가 草屋 ···················31
젓대 소리를 들으며 聞笛 ···················32
숭의 스님께서 찾아왔기에 崇義禪子訪淸虛 ···················33
감흥 感興 ···················34
준 스님 俊禪子 ···················35
요천을 지나며 過蓼川 ···················36
어부 漁翁 ···················37
북쪽 변방에서 遊塞北 ···················38
화개동 花開洞 ···················40
옛 절을 지나며 過古寺 ···················41
벗을 만나 會友 ···················43
일암 一巖 ···················44
도중 유감 途中有感 ···················45
누각에 올라 登樓 ···················46
채옹정에 묵으며 宿蔡邕亭 ···················47
단군대에 올라 登檀君臺 ···················48
행주 스님에게 示行珠禪子 ···················49
세월 감을 탄식하며 歎逝 ···················51
봄 감상 賞春 ···················52
봄을 슬퍼하며 傷春 ···················53
망고대 望高臺 ···················54
불일암 佛日庵 ···················55
가야산을 노닐며 遊伽耶 ···················56
조실 스님을 찾아가다 訪祖室 ···················57
청학동 폭포 靑鶴洞瀑布 ···················58
서산을 노닐며 遊西山 ···················60
일 스님에게 贈一禪子 ···················61
홍류동 紅流洞 ···················63
목암 題牧庵 ···················65
중양절에 남루에 올라 重陽上南樓 ···················66
탐밀봉 探密峯 ···················67
양양 가는 길에 襄陽途中 ···················68
느낀 바가 있어 남해옹에게 답하다 答南海翁因事有感 ···················69
이 수재에게 贈李秀才 ···················70
무릉동을 노닐며 遊武陵洞 ···················71
혜은 스님 惠訔禪子 ···················72
성오 가는 길에 省塢途中 ···················73
고개에 올라 두류산을 생각하며 登嶺憶頭流 ···················74
산에 살며 山居 ···················75
법광사를 지나며 過法光寺 ···················76
통결 通決 ···················77
행원 杏院 ···················78
귀양객을 방문해 訪謫客 ···················79
높은 곳에 올라 가을을 감상하며 登高賞秋 ···················80
우연히 읊다 偶吟 ···················81
세상을 탄식하며 嘆世 ···················82
봉래산 느낌 蓬萊即事 ···················83
여관을 지나며 거문고 소리를 듣고 過邸舍聞琴 ···················84
부휴자 浮休子 ···················85
청량사의 영첩에 쓰다 題淸凉影帖 ···················86
감회가 있어 有懷 ···················87
조 학사와 함께 청학동을 노닐며 與趙學士遊靑鶴洞 ···················88
숨어 사는 사람 隱夫 ···················89
송암 스님 松巖道人 ···················90
구름 속으로 떠나는 감 스님을 전송하며 送鑑禪子之雲遊 ···················92
강월헌 江月軒 ···················94
초가 草屋 ···················95
무상 거사에게 贈無相居士 ···················96
세상을 탄식하며 嘆世 ···················97
영정 스님에게 내 마음을 보이다 咏懷示永貞禪子 ···················98
재송 스님을 칭찬하며 讚栽松道者 ···················99
일암 스님에게 贈一庵道人 ···················100
인경구탈 人境俱奪 ···················101
사야정 四也亭 ···················102
염불승 念佛僧 ···················103
봉성 땅을 지나다 낮닭 울음소리를 듣고 過鳳城聞午鷄 ···················104
덕의 스님에게 贈德義禪子 ···················106
법장 스님 法藏大師 ···················107
내은적 內隱寂 ···················108
고의 古意 ···················109
심 스님의 행각 心禪子行脚 ···················110
약속한 그대는 아니 오고 有約君不來 ···················112
낙양에서 생긴 일 洛中卽事 ···················113
귀녕 가는 태희 사미 太熙沙彌歸寧 ···················114
좌주의 물음에 답하다 答座主問 ···················115
도능 스님에게 贈道能禪子 ···················117
새인 스님이 게송을 구하기에 賽仁禪子求偈 ···················118
신 상사의 시운을 빌려 次申上舍韻 ···················119
찬불 讚佛 ···················120
유교와 도교를 찬하다 讚儒道 ···················121
달마 진영에 찬을 붙이다 讚達摩眞 ···················122
달마도강도 達摩渡江圖 ···················123
백운산에 올라 읊으며 登白雲山吟 ···················124
죽은 스님을 곡하다 哭亡僧 ···················126
쌍계사 방장 스님 雙溪方丈 ···················127
회포를 읊다 咏懷 ···················128
가도 賈島 ···················129
화산 은자 花山隱者 ···················130
운계동을 찾아가다 尋雲溪洞 ···················131
지나는 봄 안타까워 惜春 ···················132
도반과 헤어지며 別山友 ···················133
용성 사는 김 악사를 만나 성원에서 묵다 遇龍城金樂士宿星院 ···················134
백전에서 묵으며 宿栢巓 ···················135
삭발 削髮 ···················136
일정 스님을 전송하며 送一晶禪子 ···················137
죽은 교산을 곡하며 哭喬山 ···················138
꿈에서 깨어나 夢覺 ···················140
여름날 夏日 ···················142
이 수재의 시운을 빌려 次李秀才韻 ···················143
감호대 題鑑湖臺 ···················144
죽은 벗을 탄식하며 亡友嘆 ···················146
순 스님의 책 題淳師卷 ···················147
은계의 시운을 빌려 次隱溪韻 ···················148
윤 방백의 시운을 빌려 次尹方伯韻 ···················149
가을 밤 秋夜 ···················151
그림자를 보고 느낌이 있어 顧影有感 ···················152
삼몽사 三夢詞 ···················153
휴량승을 조롱하며 嘲休糧僧 ···················154
곡지 曲池 ···················155
산을 나서는 영 스님을 전송하며 送英庵主出山 ···················157
김 신사의 내방에 감사하며 謝金信士來訪 ···················158
어떤 일을 겪은 뒤 느낌이 있어 因事有感 ···················159
서래곡 西來曲 ···················160
한강을 노닐며 遊漢江 ···················161
소나무와 국화를 심으며 栽松菊 ···················162
꿈에서 이백의 무덤을 지나며 夢過李白墓 ···················163
고향에 돌아와 還鄕 ···················164
병들어 病懷 ···················166
도성으로 들어가는 심 스님을 경계하며 誡心禪子入城 ···················167
이 죽마의 내방에 감사하며 謝李竹馬來訪 ···················168
낮에 화촌에서 쉬며 花村午憩 ···················169
임석천의 시운을 빌려 次林石泉韻 ···················170
자조 自嘲 ···················172
가을을 감상하며 賞秋 ···················173
환향곡 還鄕曲 ···················174
각행 스님 覺行大師 ···················175
창해에 올라 上滄海 ···················177
전도음 傳道吟 ···················179
임종게 臨終偈 ···················182
경술년 가을, 풍악산 향로봉에서 주석하고 있었다… 庚戌秋 住楓岳山香爐峯… ·············183
법현 스님에게 示法玄禪子 ···················187
지해 스님이 선게를 청하기에 단두화로 답하다 智海禪子索禪偈以斷頭話報之 ·············189
재상인 소세양께서 진기대사에게 준 시운을 빌려 次蘇相世讓韻贈眞機大師 ·············190
채씨의 남편을 천도하는 게송 蔡氏薦夫伽陁 ···················193
자락가 自樂歌 ···················196
완산 노 부윤에게 올리는 글 上完山盧府尹書 ···················199
사형에게 답하는 글 答師兄書 ···················214
스님을 부르다 招禪子 ···················215
김 거사의 죽은 딸을 곡하며 哭金居士女 ···················216
천옥 스님 天玉禪子 ···················217
성운 스님에게 示性雲長老 ···················218

해설 ···················219
지은이에 대해 ···················229
옮긴이에 대해 ···················230



2013년 2월 12일 화요일

허정 문집



도서명 : 허정 문집(虛靜文集)
지은이 : 법종(法宗)
옮긴이 : 배규범
분야 : 문집
출간일 : 2013년 1월 25일
ISBN : 978-89-6680-373-6 03810
18,000원 /  222쪽


☑ 책 소개

빼어난 시승(詩僧)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허정 스님의 문집이다. 그의 시는 다른 선시에 비해 담박하면서도 적절한 시어를 배치하는 기술이 뛰어나다. 이 책에는 264편 299수의 시와 31편의 시문이 실린 ≪허정집≫에서 그의 정신세계를 가장 잘 드러내는 109편의 시문을 가려 뽑았다.


☑ 출판사 책 소개

≪허정집≫은 2권 1책 목판본으로, 허정 스님이 입적하기 한 해 전인 1732년(영조 8)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서 개간(開刊)했다. 권두에 김정대(金鼎大)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저자의 발문과 간기(刊記)가 있다.
이 책의 말미에서 문집 간행과 관련한 저간의 사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허정집≫은 틈틈이 적은 게송을 묶은 것이다. 허정 스님은 제자들의 강권에 의해 제자들의 수행을 인도할 목적으로 이 책을 인간(印刊)하게 되었으나, 산중에서만 돌려보도록 했다. 본인 스스로가 밝히는 문집 간행의 목적이 이러한 만큼 이는 조선조 불교계를 관통하는 의식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문학을 통한 득도(得度)의 달성은 불가 시문학의 전반적인 목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허정집≫ 상권에는 264편 299수의 시가, 하권에는 31편의 문이 실려 있다. 특히 하권에는 <안국사기(安國寺記)>·<청룡사기(靑龍寺記)> 등 8편의 기(記)와 <백화당형주대사비명(白華堂浻珠大師碑銘)>·<영허대사비명(靈虛大師碑銘)> 등 5편의 고승의 행장과 사찰 중수를 위한 권선문(勸善文), 부모·사승(師僧) 등을 위한 천혼소(薦魂疏), <화엄경후발(華嚴經後跋)>·<유금강산록(遊金剛山錄)>·<속향산록(續香山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산록(山錄)들은 자연 형태와 풍물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금강산기>에는 내·외금강의 신비로운 모습이 화려하게 묘사되고 있다. 직접 답사하여 일반인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동천(洞天)·봉만(峰巒)·계곡·폭포·암석 등의 형태와 명칭 등을 세세하게 그려내었다. 간혹 중간마다 나오는 대찰들의 형태는 물론 환경과 역사를 예의 박식함으로 기록했다.
김정대는 서문에서 허정 스님의 시는 “체법이 유염(柔艶)하며 태도가 평담(平淡)하”고, “청원(淸圓)하지 않는 게 없”다고 했으며, <비문>을 쓴 이중협은 “거친 듯하나 군(君)·친(親)·사(師)·붕(朋)에 뜻을 많이 두었”다고 했다. 종합하면, 허정 스님의 시는 다양한 시체를 실험하면서도 그 내용은 담박하며, 모나지 않은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제되지 않은 듯한 느낌을 주는 시라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허정집≫의 전체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 준다. 평이한 시어를 통해 쉽게 다가서면서도 분명한 요지를 담고 있는 시, 그것은 허정 스님이 가진 선사로서의 향기와도 맥이 닿아 있다.


☑ 책 속으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니 유유한 나그네요
절은 절이요 암자는 암자니 곳곳마다 집이로다.
멀고 멀며 굽고 굽어 험하디험한 길이요
열심히 열심히 바쁘고 바빠 걸음마다 지나가네.
山山水水悠悠客
寺寺庵庵處處家
迢迢曲曲嶇嶇路
役役匆匆步步過
-<장난삼아 행각승에게 지어주다(戱贈行脚僧)>
생전엔 그대가 내 그림자더니
죽은 뒤엔 내 그대 그림자로고.
그대와 나 원래 허깨비 상인걸
누가 참된 모습인지 알 수 없네.
껍질 벗고 초연히 경계 나서니
허공에 떨어져 자취가 없구나.
목인(木人)이 박자 맞춰 니나나 노래하고
석마(石馬)를 거꾸로 타고 절로 돌아가네.
절로 가는 곳 내 자취 잠겼으니
내 자취 잠긴 곳 바로 열반이도다.
참된 열반은 도대체 무엇이더냐.
그 무언가는 또 무엇이더냐.
生前渠於我之影
死後我於渠之影
渠我元來幻化形
不知誰是其眞影
脫殼超然出範圍
虛空撲落無蹤跡
木人唱拍哩囉囉
石馬倒騎歸自適
是自適處沒朕跡
沒朕跡處眞涅槃
眞涅槃者是甚麽
是甚麽者又甚麽
-<임종계(臨終偈)>


☑ 지은이 소개

법종(法宗, 1670∼1733)
조선 영조 때의 승려.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이중협(李重協, 1681∼?)이 지은 <허정당법종대사비명(虛靜堂法宗大師碑銘)>에 따르면, 스님의 호는 허정(虛靜)이며 완산 전씨(完山全氏)로 관서 땅 삼화(三和) 사람이다. 어머니 노(盧)씨는 용이 강림하는 꿈을 꾸고 경술년(庚戌年) 초파일(浴佛日)에 임신을 하여 스님을 낳았는데, 타고난 바탕이 비범하였다.
12세에 옥잠장로(玉岑長老)를 찾아가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출가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으나, 그 무렵 개인의 신변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 뒤 수행을 거듭하여 ‘원돈(圓頓)의 법계(法界)가 너 자신에게 있다(今在汝矣)’고 하는 화엄의 원돈법계설(圓頓法界說)을 공부하다가 크게 깨달았다.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월저도안(月渚道安, 1638 ∼1715)을 참배하고 장경(藏經)을 두루 공부하였는데, 이때 나이 스무 살 남짓이었다.
그 뒤 드디어 월저 스님의 고족제자인 설암추붕(雪巖秋鵬, 1651∼1706)을 따라 현지(玄旨)를 듣고 인가(認可)를 받음으로써 그의 법을 이었다. 설암 스님은 월저 스님으로부터 청허(淸虛)→편양(鞭羊)→풍담(楓潭)으로 이어지는 의발을 전수받은 선사였다. 특히 ≪선원제전집도서과평(禪源諸詮集都序科評)≫(2권)·≪설암잡저(雪巖雜著)≫(3권 3책)·≪설암난고(雪巖亂藁)≫(2권 1책)을 남기는 등 당대 대표적인 선객의 한 분이셨다.
그 뒤 진상암(眞常庵)·내원암(內院庵)·조원암(祖院庵) 등 여러 절에 머물렀다. 그때마다 법을 배우고자 하는 승려들에게 낮에는 경전을 강의하고 밤에는 참선을 지도했다. 1708년(숙종 34) 구월산으로 초청되어갈 때, 그를 따르는 문도가 항시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해에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와 계축년 4월 17일, 남정사(南精舍)에서 입적하시니 세속 나이 64세요, 법랍(法臘) 52세였다. 화장을 할 즈음, 상서로운 빛이 하늘을 밝혔는데 영골(靈骨) 1편(片)과 사리 3과(顆)가 나와 묘향산과 구월산 그리고 해남 대둔사에 부도(浮屠)를 세워 봉안했다.


☑ 옮긴이 소개

배규범
1998년 문학박사 학위(<임란기 불가문학 연구>)를 받은 이래, 한국학 및 불가 한문학 연구에 전력하고 있다. 한자와 불교를 공통 범주로 한 ‘동아시아 문학론’ 수립을 학문적 목표로 삼아, 그간 한국학대학원 부설 청계서당(淸溪書堂) 및 국사편찬위원회 초서 과정을 수료했으며, 수당(守堂) 조기대(趙基大) 선생께 사사했다.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에서 지난 10여 년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및 한자 강의를 진행했으며, (사)한국한자한문능력개발원의 한자능력검정시험 출제 및 검토 위원으로 재임 중이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 학술진흥재단의 고전 번역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2000년부터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고·순종≫ 교열 및 교감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경희대(학진연구교수), 동국대(학진연구교수), 북경 대외경제무역대학(KF객원교수)을 거쳐 현재 중국 북경공업대학 한국어과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중국 학생들에게 한국어 및 한국 문화를 강의하고 있다. 해외에서 우리의 말과 문화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연구와 전파라는 새로운 뜻을 세우고 활동 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불가 잡체시 연구≫, ≪불가 시문학론≫, ≪조선조 불가문학 연구≫, ≪사명당≫, ≪한자로 배우는 한국어≫, ≪요모조모 한국 읽기≫, ≪외국인을 위한 한국 고전문학사≫, ≪속담으로 배우는 한국 문화 300≫ 등이 있고, 역저로는 ≪역주 선가귀감≫, ≪한글세대를 위한 명심보감≫, ≪사명당집≫, ≪허정집≫, ≪허응당집≫, ≪청허당집≫, ≪무의자 시집≫, ≪역주 창랑시화≫, ≪정관집≫, ≪초의시고≫ 등이 있다.


☑ 목차

산중사 山中辭
유거사 幽居辭
한가롭게 읊다 閑詠
월운대사에게 贈雲月大師
회포를 읊으며 내 뜻을 말하다 咏懷言志
초당 草堂
자경 自警
맑은 밤 淸夜
유거 幽居
물외 物外
산에서 살며 山居
고요한 밤 夜靜
아파 신음하다 病吟
백운암 白雲庵
은선대 隱仙臺
금강산 金剛山
참의 권중경의 시운을 빌려 次權參議重經韻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의 시운을 빌려 次伽耶山海印寺一柱門韻
금화산 징광사 金華山 澄光寺
백운산인에게 示白雲山人
호남으로 가는 환몽 스님을 전송하며 送幻夢之湖南
문촌 유 처사의 시운을 빌려 次文村柳處士韻
계율을 지키며 護戒
<봄 골짝에 핀 한 송이 꽃> 시운을 빌려 次春谷一花韻
진사 백대문, 처사 황지리와 함께 백사장을 노닐다 지은 시운을 빌려 白進士大文黃處土地理同遊白沙場韻次
운을 빌려 청옥 수좌에게 보이다 次示淸玉首座
운을 빌려 육공 수좌에게 보이다 次示六空首座
조급하게 배우려는 자에게 잡사와 백공을 훈계하다 示學卞雜事百工故誡示
아파 신음하며 病吟
고향 생각 思鄕
송광사 무용 스님의 시운을 빌려 松廣寺無用大師韻次
월저 스님의 시운을 빌려 敬次月渚大和尙韻
신선을 찾다가 길을 잃고서 訪仙失路
운을 빌려 의진 수좌에게 주다 次示義眞首座
운을 빌려 백운 스님을 전송하다 次送白雲子
운을 빌려 내원의 성곡민기 스님에게 주다 次示內院城谷敏機大師
중악에서 삼남으로 내려가 오래도록 오지 않는 이를 그리워하며 憶中岳下三南久不來
운을 빌려 설잠 스님에게 부치다 次寄雪岑
운을 빌려 고향 사람인 운서 거사에게 드리다 次贈同鄕人雲瑞居士
대공각민 스님에게 示大工覺敏道人
은자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訪隱不遇
운을 빌려 축림 스님을 전송하며 次送竺林
가을 산에 혼자 살며 秋山獨居
운을 빌려 금강산 도일 수좌에게 보이다 次示金剛山道一首座
해문도인에게 示海文道人
고향 생각 望鄕
한양 漢陽
모은 스님과 헤어지며 別慕隱
운을 빌려 식암 스님에게 부치다 次寄息巖
사시사의 운을 빌려 次四時詞
묘향산 구름집 香山雲舍
한식 寒食
능파희세 스님에게 寄綾坡希世子
자탄 自歎
사군 김일경의 시운을 빌려 次金使君一鏡韻
운을 빌려 수이 스님에게 부치다 次寄守夷
능파희세 스님을 전송하며 送綾坡希世子
고요히 살며 靜居
깊은 산골 洞深
가을 풍경 秋景
삼가 설암 스님의 시운을 빌려 敬次雪巖和尙韻
하늘 天
땅 地
태양 日
달 月
바람 風
구름 雲
소나무 松
노송나무 檜
묘향산 보현사 香山普賢寺
설암 스님을 애도하며 悼雪巖和尙
삼가 설암 스님의 시운을 빌려 敬次雪巖和尙韻
묘향산 상운암 題香山上雲庵
장난삼아 행각승에게 지어주다 戱贈行脚僧
옛 시의 운을 빌려 次古韻
눈 雪
장난삼아 허영 스님에게 戱示虛影
창파취원 스님에게 贈滄波子翠遠大師
제야에 화초 가꾸기를 권면하는 게송 分歲造花草勸偈
만경대에 올라 登萬景臺
어머니 생신 날 가르침을 생각하며 生辰記慈母敎訓
봄눈 春雪
양관체 ―산 속의 묘한 향내를 찬양하다 陽關體 讚山中妙香
옥련환체 ―같은 문도를 권면하다 玉連環體 勸同徒
측입체 仄入體
요체 拗體
일이언체 ―안곡 스님에게 一二言體 寄安谷
수시체 數詩體
건제체 建除體
자응 스님의 시운을 빌려 次慈應韻
월저 스님을 애도하며 悼月渚大和尙
객지살이 회포를 쓰다 旅窓書懷
제석 除夕
초당 草堂
만월 스님에게 부치다 寄滿月
고향에 머물며 산을 생각하다 滯鄕憶山
묘향산 香山
스스로를 위로하며 自遣
한식 寒食
고향을 그리며 望鄕
스님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서 訪師不遇
운을 빌려 무명도인에게 보이다 次示亡名道人
설암 스님을 추도하며 追悼雪巖和尙
운을 빌려 우암 스님에게 드리다 次贈牛巖
고향 산을 걱정하며 滯憂關山
임종게 臨終偈
착정기 鑿井記
유금강록 遊金剛錄
속향산록 續香山錄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2013년 1월 21일 월요일

무의자 문집




도서명 : 무의자 문집
無衣子文集
지은이 : 혜심(慧諶)
옮긴이 : 배규범
분야 : 문집
출간일 : 2013년 1월 15일
ISBN : 978-89-6680-353-8
18,000원 / 172쪽




☑ 책 소개

국문학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선시인(禪詩人) 진각국사 혜심의 시 81편과 산문 3편을 실었다. 그의 시는 깊은 깨달음의 선 사상을 내용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문학적 자질을 충분히 발휘해서 자신의 사상과 정서를 유감없이 표현해 내고 있어 문학성이 높다.


☑ 출판사 책 소개

고려 중기의 피폐한 불교계를 혁신한 인물인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당시 불교계의 모순을 지적하고 새로운 불교 부흥 운동을 전개하는데, 이것이 곧 정혜 결사 운동(定慧結社運動)이었다. 이를 통해 선교상쟁(禪敎相爭)을 불식하고 선(禪)에 의한 교(敎)의 흡수와 함께 새로운 선학의 체계를 수립하게 된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제자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에게 계승되었으며, 혜심은 이를 다양한 양상으로 승화시켜 승려들에게는 물론 일반 재가신도에게까지 널리 전파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제작된 것이 한국 선가의 요체인 ≪선문염송(禪門拈頌)≫을 비롯한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 ≪무의자 시집(無衣子詩集)≫ 등의 저서다.
≪무의자 시집≫ 상·하권에는 각각 68수, 180수 총 248수의 시가 실려 있다. 이는 혜심의 뛰어난 문학적 자질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실제 그 내용을 보더라도 법사로서 법을 전수할 때의 시법시(示法詩)·개오시(開悟詩)는 물론이거니와 아름다운 자연과 사찰의 정경 묘사, 차 끓이며 자적하는 산사 생활의 즐거움, 대·연(蓮)·귤 등의 자연물에 대한 감흥, 재가신도와 타 승려들과의 교유시, 그리고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읊은 인정시 등으로 무척 다양하다.
혜심의 시에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은데, 주로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는 선적(禪的) 흥취를 묘사한 작품들이 거기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그 양상을 보면, 우선 산사 생활의 배경이 되는 자연과 그것을 배경으로 펼쳐진 사찰의 아름다움을 읊은 것을 들 수 있다. 둘째는 산사 생활의 즐거움에 관한 내용이다. 고적한 산사에서 펼쳐지는 승려들이 차를 끓인다거나 숲길을 산책한다거나 하는 일상생활의 모습들인 것이다.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청빈한 삶 속에서 존재의 의의를 찾고자 하는 승려들의 일상사를 혜심은 지족수분(知足隨分)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셋째는 사물에 대한 감흥이다. 이른바 영물시라고 하는 부분인데, 파초(芭蕉)·가사(袈裟)·연꽃·귤·밤·모란·달·지팡이·눈 등의 묘사가 그것이다. 이는 사물에 대한 혜심의 예리한 관찰력과 함께 한갓 미물이지만 그 미물에 쏟는 시인의 아름다운 시선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문학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


☑ 책 속으로

●<봄을 아쉬워하며(惜春)>
저무는 봄을 남몰래 아쉬워하며
작은 뜰에서 낮게 읊조린다네.
바람 부는 잎엔 푸른빛이 나부끼고
비 내린 꽃술엔 붉은 가루 떨어지지.
나비가 빨고 가니 꽃은 붉어지고
꾀꼬리가 따라오니 버들은 푸르러진다.
향기롭고 부드럽고 따스한 봄날의 모습이라
솔잎과 댓잎 같은 새순은 차고도 담박한 모습일세.

●<비 온 뒤 송만(雨後松巒)>
비 개자 시원스레 목욕하고 나온 듯
남기가 엉켜 푸르름이 뚝뚝 맺힐 듯.
멍하니 보다 마음 일어 한 수 읊으니
내 온몸도 서늘하고 푸르러지네.

●<시로 깨달은 바를 보여주기에 그 시운을 빌려 답하다>
물고기와 용은 물에 있어도 물을 모르나니
운에 따라 파도에 따라 물결 좇아 노닌다.
본래부터 떠나지 않았거늘 누가 잃고 누가 얻었나.
미망도 없는데 깨쳤다 함은 무슨 이유에선가?


☑ 지은이 소개

혜심(慧諶, 1178~1234)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은 1178년 전라도 나주 화순현(和順縣)에서 향공진사(鄕貢進士)인 아버지 최완(崔琬)과 어머니 배씨(裵氏) 사이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재주가 있었던 그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유학을 공부해 24세인 120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태학(太學)에 들어가 학문을 닦게 된다.
본래부터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기에 1202년에 조계산 송광사에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을 모시고 승려가 되었다. 이후 용맹정진(勇猛精進)하던 그는 보조국사로부터 다양한 시험을 통과한 뒤 1210년, 지눌의 법석을 공식적으로 이어받는다. 지눌로부터 이어받은 수선사(修禪社) 2대의 자리는 당시의 사회적·종교적 측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였다. 수선사는 당시 왕권과 결탁해 온갖 부패와 모순을 낳았던 교종 중심의 불교계를 보며 지눌이 결성한 실천적인 결사 운동이었다. 지눌의 이러한 결사 운동은 당시 실질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던 최씨 무신 정권의 깊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혜심은 항상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종교인의 본분을 다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종교인이 권력과 밀착되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을 알고 있었기에, 승려 본연의 자세와 개혁 정신을 유지하면서 수선사를 당시 정신계의 핵심으로 이끌 수 있었다. 이후 20여 년간 수선사를 이끌다가 1234년 6월 26일 57세(법랍 32)의 나이로 월등사(月燈寺)에서 입적했다.
스님이 남긴 책으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선서(禪書)로서 선가(禪家)의 고화(古話) 1125칙(則)과 선사들의 염송(拈頌)을 합쳐서 총 30권으로 완성한 ≪선문염송(禪門拈頌)≫과 생전에 행하신 각종 법어를 모은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등이 있다.


☑ 옮긴이 소개

배규범
1998년 문학박사 학위(<임란기 불가문학 연구>)를 받은 이래, 한국학 및 불가 한문학 연구에 전력하고 있다. 한자와 불교를 공통 범주로 한 ‘동아시아 문학론’ 수립을 학문적 목표로 삼아, 그간 한국학대학원 부설 청계서당(淸溪書堂) 및 국사편찬위원회 초서 과정을 수료했으며, 수당(守堂) 조기대(趙基大) 선생께 사사했다.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에서 지난 10여 년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및 한자 강의를 진행했으며, (사)한국한자한문능력개발원의 한자능력검정시험 출제 및 검토 위원으로 재임 중이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 학술진흥재단의 고전 번역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2000년부터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고·순종≫ 교열 및 교감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경희대(학진연구교수), 동국대(학진연구교수), 북경 대외경제무역대학(KF객원교수)을 거쳐 현재 중국 북경공업대학 한국어과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중국 학생들에게 한국어 및 한국 문화를 강의하고 있다. 해외에서 우리의 말과 문화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연구와 전파라는 새로운 뜻을 세우고 활동 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불가 잡체시 연구≫, ≪불가 시문학론≫, ≪조선조 불가문학 연구≫, ≪사명당≫, ≪한자로 배우는 한국어≫, ≪요모조모 한국 읽기≫, ≪외국인을 위한 한국 고전문학사≫, ≪속담으로 배우는 한국 문화 300≫ 등이 있고, 역저로는 ≪역주 선가귀감≫, ≪한글세대를 위한 명심보감≫, ≪사명당집≫, ≪허정집≫, ≪허응당집≫, ≪청허당집≫, ≪무의자 시집≫, ≪역주 창랑시화≫, ≪정관집≫, ≪초의시고≫ 등이 있다.


☑ 목차

정 낭중을 전별하며 餞別鄭郞中
어떤 일에 느낀 바가 있어 因事有感
새로 선상을 칠하고서 新漆禪床
파초 芭蕉
시자가 묻기를 눈꺼풀이 얼마나 넓으냐고 하기에 시를 지어 대답하다 問侍者眼皮濶多少無對作詩示云
금성 경사록의 시운을 빌려 次錦城慶司祿 從一至十韻
작은 연못 盆池
사뇌사 집회를 마치고 시주 등의 전송을 받고 돌아와 감사하며 思惱寺罷會施主等相送至還謝之
스님을 전송하며 送僧
기사뇌가 碁詞腦歌
만족의 즐거움 知足樂
물시계 更漏子
식심게 息心偈
못가에서 우연히 읊다 池上偶吟
자비사에서 이틀을 묵으며 일암의 시운을 빌려 信宿慈悲寺 次韻逸庵
봄을 아쉬워하며 惜春
여뀌 蓼花
비 온 뒤 송만 雨後松巒
진일 상인이 와서 말하길, “저는 타고난 성품이 산란하여 조섭을 할 수가 없으며, 혹 고요한 곳에 엎드려 있게 되면 곧 혼침한 곳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오직 이 두 가지야말로 저의 근심인데, 법게를 내려주신다면 처방으로 삼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眞一上人來言曰 某乙賦性散亂 未能調攝 或於靜處捺伏 則便落昏沈 惟此二病是患 請得法偈 爲對治方
고분가 孤憤歌
하늘과 땅을 대신해 답하다 代天地答
전 녹사에게 답하다 答田祿事
성주천 가에서 차 마시며 얘기하다 주지 스님의 시운을 빌려 聖住川邊茶話次贈住老
몽인 거사가 목우시를 청하기에 夢忍居士請牧牛詩
한가위 달구경 中秋翫月
쌍봉 장로의 <감춘> 시에 화답하며 和雙峰長老感春
봄날 산에서 놀다 春日遊山
냉취대 冷翠臺
폭포 瀑㳍
맑은 못 淸潭
사계절에 대한 느낌 四時有感
우연히 흥이 일어 偶興
연지에 샘물을 대고 蓮池注泉
산에서 놀다가 遊山
고향을 지나며 過古鄕
양 상인을 전송하며 送亮上人
근친하러 가는 옥 상인을 전송하며 送玉上人覲親
그림자를 마주하고 對影
작은 못 小池
천관산 의상암에 깃들여 사는데 몽인 거사가 남긴 시를 보고는 운을 빌려 마음을 적다 寓居天冠山義相庵 見夢忍居士留題 次韻叙懷
눈 내리는 패주 죽림사에 묵으며 宿貝州竹林寺有雪
인월대 隣月臺
능운대 凌雲臺
부모님을 뵈러 가는 육미 상인을 전송하며 送六眉上人省親
팔령사 동재에서 묵으며 이경상의 시운을 빌려 宿八嶺寺東齋 次李敬尙韻
기능을 경계하다 誡技能
저물녘 비 개자 晚晴
산을 나서며 出山相讃
황 중사의 시운을 빌려 次黃中使韻
검 원두가 게송을 구하기에 儉園頭求頌
남포원 누대에서 놀다 모란을 보고 遊南浦院樓看牧丹
응 율사가 법을 구하는 시의 운을 빌려 次膺律師求法韻
작은 글자로 쓴 금강경을 찬하다 小字金剛經賛
청량굴 題淸凉窟
전물암에 깃들여 살며 寓居轉物庵
담령 상인이 육잠을 구하기에 湛靈上人求六箴
방일을 경계하다 誡放逸
시로 깨달은 바를 보여주기에 그 시운을 빌려 답하다 以詩呈悟處依韻答之
백운대 위에서 선사를 추억하며 白雲臺上憶先師
서석산 규봉에서 노닐다 남겨둔 시를 보고 그 운을 빌려 遊瑞石山珪峰見留韻次之
둥근 부채 團扇
조월암에서 피리 소리를 듣고 祖月庵聞笛
누군가 법을 구하기에 서암의 주인공 화두를 들어 게송을 지어주다 求法擧瑞巖主人公話作偈
목련 木蓮
자규 울음을 듣고 대중들에게 보이다 聞子䂓示衆
권백 卷柏
감흥 感興
좌우명 左右銘
산 속의 사위의 山中四威儀
암자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庵中聽雨
여름날 감원에서 처마를 수리해 준다기에 시를 지어 거절하다 暑月監院欲補簷作詩去之
겨울날 석상암에서 자다 冬日寄石上庵
신묘년 8월, 인홍사를 지나다 벽에 붙은 시운을 빌려 辛卯八月過仁弘寺次壁上韻
무위사 공 장로와 차를 마시며 茶無爲寺恭長老
연꽃 핀 못에서 蓮池
달을 읊다 咏月
비 온 뒤 雨後
물가에서 臨水
삼가 지장 일승통의 시에 화답하다 奉和地藏一僧統
유거 幽居
세상을 민망히 여겨 憫世
빙도자전 氷道者傳
대인명 병서 大人銘 并序
일암명 병서 逸庵銘 并序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2013년 1월 4일 금요일

원감국사집




도서명 : 원감국사집
圓鑑國師集
지은이 : 충지(冲止) 지음
옮긴이 : 진성규
분야 : 한국 문집
출간일 : 2012년 12월 28일
ISBN : 978-89-6680-281-4 90910
35,000원 /  740쪽



☑ 책 소개

어려서 출가했으나 효를 다하기 위해 환속했고 모친이 돌아가시자 29세에 다시 출가했다. 세상에서는 소년 장원 급제해 벼슬에 올랐고 출가해서는 국사(國師)에 올랐다. 드높은 문장은 사대부들로부터 존경받았다. 그러나 충지는 울며 탄식한다. “슬프다! 나란 무엇하는 사람인가?” 원의 탄압, 삼별초 항쟁, 일본 정벌 부역으로 고려는 피폐할 대로 피폐했다. 몸은 속세를 떠났지만 마음은 백성과 함께했기에 그의 시가 곧 고려사다.


☑ 출판사 책 소개

이 책은 원감국사 충지의 글을 모은 문집이다. 충지의 글은 ≪원감록(圓鑑錄)≫, ≪원감국사어록(圓鑑國師語錄)≫, ≪복암집(宓庵集)≫, ≪해동조계복암화상잡저(海東曹溪宓庵和尙雜著)≫, ≪원감국사가송(圓鑑國師歌頌)≫ 등에 실려 있는데 이 책은 이 글들을 문체별로 재분류해 편집하면서 ≪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이라고 개제(改題)했다.
번역은 ≪원감록(圓鑑錄)≫(아세아문화사 영인본, 1973)과 ≪조계복암화상잡저(曹溪宓庵和尙雜著)≫[≪고려불적집일(高麗佛籍集佚)≫, 동국대출판부, 1985]를 대본으로 삼았고, 원문은 ≪원감록≫, ≪조계복암화상잡저≫, ≪원감국사가송(圓鑑國師歌頌)≫[≪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 6책, 동국대출판부, 1984], ≪동문선(東文選)≫ 등과 대교(對校), 수정(修正)해 첨부했다.
≪원감국사집≫은 필자가 1988년 출판한 바 있는데 오류가 많아 재간행이 필요했다.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요청을 받아 작년 여름에 수정을 하고 2011년 3월 간행했다. 그때까지는 2010년 6월 동국대 출판부에서 ≪원감국사집≫이 간행되었다는 정보를 모르고 있었는데, 2쇄를 준비하면서 알게 되어 이 책을 수정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책은 2011년 지식을만드는지식 클래식으로 출간된 ≪원감국사집≫을 대폭 수정 보완한 개정판이다.
충지의 글은 자구마다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고, 속기(俗氣)를 벗어난 경지에 이르렀으며, 문장 또한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상태다. 이는 어릴 적에 유문(儒門)에 깊은 소양을 쌓았고, 불문(佛門)에도 깊은 경지에 다다른 결과라고 추측된다. 즉 유·불의 온축(蘊蓄)이 자아낸 보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원감국사집≫은 한 시대를 고민하다가 사라져 간 충지의 얼이 응고된 영롱한 보석일 것이다.



☑ 책 속으로

●계봉의 괴로움 지금 비유할 수 없어
한두 가지 먼저 말하려니 코가 찡하네
지은 지 오래된 집은 쇠락했고
처마 끝 기와와 담벼락은 모두 무너졌네
매양 끊임없이 비가 쏟아지면
체처럼 비가 새어 의지할 곳 없네
사철 불을 지필 땐 두어 가지 나무
의상은 남루하고 안색은 초췌하네
재 올릴 땐 나물과 연뿌리, 새벽엔 묽은 죽
험한 산에 올라 하루에도 서너 번 나무를 나르네


●  새끼에게 먹이 먹이다가 나는 법 가르치니
늙은 어미의 깊은 애정 다시 논하지 마라
은근히 계족봉 아래로 정을 보내오니
뼈가 가루 된들 어찌 이 은혜 갚으랴

누각이 첩첩 옛 범궁(梵宮)이여
산수의 형승(形勝) 천하제일일세
내가 자리 이어받음 진실로 분수 아니거니
당년의 국로풍을 욕되게 할까 두렵네

●  농사는 모름지기 때가 있는데
때를 놓치면 어쩔 수 없네
농사 때란 얼마 안 되니
봄, 여름 바뀔 때가 가장 좋네
봄이 다하고 여름 되니
농사일은 늦출 수 없네
하늘이 시절을 알아서
은택을 사방으로 자주 베풀지만
일본 정벌이 시급한데
농사일은 누가 다시 생각하랴
사신은 끊이지 않고
동으로 서로 달리네
백성들이 전역에 가니 고을은 비었고
오랫동안 달려 강가로 향하네
밤낮으로 벌목해
전함 만들다 힘은 다했고.
척지(尺地)도 개간하지 못했으니
백성은 무엇으로 연명하랴
가구마다 묵은 양식 없고
태반은 벌써 굶어서 우노라
하물며 다시 농업을 잃었으니
당연히 다 죽음만 보겠네
슬프다! 나란 무엇하는 사람인가?
눈물만 공연히 흘러내리네
슬프다! 동토(東土)의 백성이여
하늘마저 슬퍼하지 않네
어찌 장풍(長風)이 불어와서
나의 읍혈시(泣血詩)를 실어 가려나
한번 부니 천상에 이르러
임금 계신 뜰에 이르나니
시에 못다 한 말들
상제로 하여금 다 알게 하리


●    영남 지방의 간고한 모습
말하려 하니 눈물이 먼저 흐르네
두 도(道)에서 군량을 준비하고
세 곳의 산에서 전선(戰船)을 만들었네
부세와 요역은 백배나 되고
역역(力役)은 3년에 뻗쳤네
징구(徵求)는 성화(星火)같이 급했고
호령(號令)은 우뢰처럼 전하네
사신도 항상 계속되었고
서울의 장수는 잇달았네
팔은 있어도 모두 묶여 있고
채찍 맞지 않은 등이 없었네
맞이하고 보내는 것은 보통 익숙했고
밤낮으로 수송이 이어졌네
우마(牛馬)도 등이 온전할 때 없고
인민도 쉬지 못했네
새벽엔 칡 캐러 가고
달빛 맞으며 띠풀 베어 돌아오네
수수(水手)는 밭고랑으로 몰리고
초공(梢工)은 해변으로 가네
하인 뽑아 갑옷 입히고
장사 뽑아 창 메게 하네
단지 시간이 촉박하니
어찌 촌각이라도 지연이 용납되랴
처자식은 땅에 주저앉아 울고
부모는 하늘 보고 울부짖네
유명(幽明)이야 다르지만
성명(性命) 온전함을 어찌 기약하랴
남은 사람은 노인과 어린이뿐
억지로 살려니 얼마나 고달프랴
고을마다 반은 도망간 집이요
마을마다 모두 전지가 황폐했네
어느 집인들 수색하지 않으며
어느 곳인들 시끄럽지 않으랴?
관세도 면하기 어려운데
군역을 어찌 덜겠는가?
백성의 질곡은 날로 심하고
피곤과 병은 어찌 회복되랴
접하는 일마다 모두 슬픔을 견디려니
삶이란 진정 가련하구나
비록 형세 보존키 어려움을 알지만
하소연할 곳 없음을 어찌하랴
제(帝)의 덕은 푸른 하늘처럼 덮었고
황제의 밝음은 백일 같구나
어리석은 백성은 진실로 기다리니
성택은 반드시 베풀어지리라
삼한 안에서 볼 수 있으리
집집마다 베개 높이 베고 잠잘 수 있기를



☑ 지은이 소개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冲止, 1226∼1293)
원감국사 충지는 1226년 전라도 장흥(長興)에서 태어났다. 휘(諱)는 법환(法桓)인데 후에 충지로 고쳐 불렀으며, 자호(自號)는 복암(宓庵), 속성명(俗姓名)은 위원개(魏元凱), 탑호(塔號)는 보명(寶明)이고, 원감국사는 그의 시호(諡號)다.
9세에 취학해 경서(經書) 자사(子史)를 암송하고 문장력도 뛰어났다. 일찍이 출가했다가 어머니의 청으로 환속했다.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9세에는 춘위(예부시)에 장원으로 뽑혀 재질의 탁월함이 입증되었다. 영가(永嘉: 지금의 안동)서기(書記)를 거치고, 그 후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국위를 선양했으며, 옥당(玉堂)에서는 문체가 수려해 많은 선비들이 탄복했다. 그는 모친이 세상을 떠난 뒤 29세에 다시 출가했다. 당시 고려는 몽고(蒙古)와의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으며 무인 정권의 부패로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했다. 그가 다시 승려가 된 것은 고귀한 생명이 무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목도하고 백성의 고통을 공유하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41세에 김해(金海) 감로사(甘露寺) 주지가 되었고, 3년 만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이때부터 승려들에게 보통 있게 되는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45세에 정혜사(定慧寺)에 이주했다. 61세에 조계 6세(世)로 임명되었다.
충지는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우국의 세월을 보내면서 조계 법맥을 계승하다가 1293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 옮긴이 소개

진성규
진성규는 경북 예천에서 출생했다. 은풍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당에서 3년 동안 한학을 공부했다. 경북 예천의 대창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3년여 공무원 생활을 했다. 중앙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및 중앙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문학석·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부산여대(현 신라대)를 거쳐 현재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진각국사 혜심 연구≫, 공저로는 ≪신라의 불교사원≫, ≪인물로 본 한국불교사상사≫, ≪한국사상사 입문≫ 등이 있다. 역서로는 ≪서하집(西河集)≫,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 ≪계와문집(溪窩文集)≫, ≪금석문(金石文)≫ 등이 있다.


☑ 목차

서언(緖言)
원감국사어록중간서 圓鑑國師語錄重刊序 ········5
조계원감국사어록서 曹溪圓鑑國師語錄序 ·······11

시(詩)
1. 속세를 떠나 한적한 곳에 살다 ··········15
2. 우연히 씀 ···················16
3. 병인년 여름 처음 감로사에 들어가서 동포에게 보임 ·17
4. 산에서 놀다 돌아오는 길에 삼랑루를 지나면서 배 가운데서 짓다 ·················18
5. 안렴사 박항이 밀성 삼랑루라 제한 시의 운을 따라 ·18
6. 한가로운 가운데 스스로 기뻐하면서 ·······20
7. 지원 9년 임신 3월 초에 정혜사에 들어가 게를 지어 동범에게 보임 ················20
8. 자인화상에게 올리는 시 ·············21
9. 여러 스님들과 같이 고사리를 뜯고 돌아와 동범에게 보임 ·····················23
10. 한가로운 가운데서 우연히 씀 ··········24
11. 여름날 규봉 인 선백을 생각하면서 ·······25
12. 안렴사 박 시랑에게 부침 ············26
13. 가을날 일찍 조계산을 출발해 계족산으로 돌아와서 지음 ····················27
14. 어저께 도자 혜초가 돌아오는 편에… ······28
15. 한가한 가운데 시간을 보내면서 ·········30
16. 감로장로의 운을 따라 삼가 답함 ········31
17. 산에 살면서 저물어 가는 봄을 읊음 ·······32
18. 봄을 아낌 ··················33
19. 법형 묵 공이 나의 집안이 단정하고 고담하다는 것을 듣고… ··················34
20. 규봉 인 선백의 운을 빌려 답함 ·········38
21. 난송선사 인 공의 운을 빌려 답함 ········39
22. 안렴 김 시어에게 보내는 시 ··········40
23. 다시 앞의 운을 사용해서 김 제형에게 부침 ····41
24. 분간 김 시랑에게 희롱으로 답함 2수 ·······42
25. 운흥법주 대이를 곡함 ·············43
26. 스스로 희롱함 ················48
27. 평양에 부임하는 아우 수령 문개가… ······48
28. 막내 동생 추원당후 선이 앞의 시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차운해 보냈으므로 다시 그 운을 따서 답함 ··50
29. 전 동각사인 우 공이 앞의 운을 따라 시를 지어 보내 주었으므로 그 운을 사용해 답함 ·······51
30. 한가로운 가운데서 우연히 씀 2수 ········53
31. 규봉 인 공이 월헌 강 박사에게 준 시의 운을 따라 4수 ······················54
32. 나는 출가하면서부터… ············56
33. 원흥사 임정에서 놀면서 ············58
34. 왕암에서 자면서 그 경지의 청유함을 사랑해 졸시를 씀 ·····················59
35. 서원목백인 상서 이 공이… 2수 ·········60
36. 서원 이 상서에게 보냄 ·············61
37. 지원 13년 12월 요청을 받고 다시 서원에 도착해 현암난야에 우거하면서, 목백상서 이 공에게 드림 ·62
38. 밤에 많은 눈이 내렸으나 아무도 몰랐다. 새벽에 일어나 성안을 바라보면서 짓다 ·········63
39. 전 서원 반자 이 직강에게 보냄 ·········63
40. 노 교서의 운을 따라 답함 ···········64
41. 천안부의 군수 한 낭중에게 보냄 ········65
42. 낙화를 애석히 여겨 읊음 ············65
43. 정축년 3월 13일 진각사에서 놀면서 ·······67
44. 현암사의 자리를 파하고 되돌아오려고 한 수 남김 69
45. 서원 지방의 도속들이 성을 나와 울면서 전송하므로 느낌이 있어 시를 짓다 ···········70
46. 서원을 떠나 회덕에 이르렀다가 서원성 밖의 이별을 기억하고 시를 지어 목백 영각으로 보냄 ····70
47. 회덕 여관에서 비를 만나 ············71
48. 3월 24일 천호산 개태사에서 자면서 ······72
49. 우연히 진나라 사람 곽문의 전기를 읽다가… ···73
50. 한가로운 가운데 우연히 씀 ···········77
51. 무인년 11월 6일 대중을 거느리고 산을 벗어나 다음 날 장경을 지고 되돌아와 게를 짓다 ······78
52. 조계산의 누교를 지나다 원주 신 공이 누각을 수리하는 것을 보고 감탄해 시를 지어 그를 칭찬함 ··79
53. 정혜사 판상의 운을 따라 ············80
54. 채방사 김 시랑의 운을 따라 답함 ········82
55. 벽자운에 답한 시를 삼장장실에 부침 ······83
56. 절구 ·····················89
57. 다시 앞의 운을 따라 채방사 김 시랑에게 답함 ···89
58. 우중에 혼자 앉아 ···············90
59. 한가로운 가운데서 우연히 씀 2수 ········91
60. 김녕 최 태수 알(謁)이 사임하려고 서울에 갔더니… 93
61. 채방사 김 시랑의 운을 따라 답함 ········94
62. 규봉 인 선백을 생각하면서 ···········95
63. 굉소선인이 산중을 방문해 준 시에 답함 ·····96
64. 운흥장실에 드림 ···············97
65. 백운암의 검 선객이 가타 3수를 보내 주었는데… 4수 ······················98
66. 이별할 때 김 찰방의 운을 따라 답함 ······100
67. 상국 농서공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102
68. 산속 봄날 ··················106
69. 더위 속에서 사람들에게 보임 ·········107
70. 안렴사 반 공이 산에 이르러… ·········107
71. 운을 따라 삼장장실에 드림 ··········108
72. 삼장 공이 지팡이를 옮겨 동쪽으로 간다는 소문을 듣고 거친 말로 삼절을 지어 드림 ······110
73. 안렴 반 공이 다시 산속을 방문했으므로 산어를 지어 드림 ···················111
74. 날씨 갬을 기뻐함 ···············112
75. 삼가 농서상국 존비가 아름다운 시 두 수와… ··113
76. 즉석에서 시를 지음 ··············116
77. 게송을 지어 여러 승려에게 보임 ········116
78. 산어로 회포를 서술해 단양상국 각하에게 드림 ··117
79. 영남 지방의 어려운 모습. 24운 ·········119
80. 도통 홍 상국 막하께 드림 ···········122
81. 안집 권 시어에게 보냄 ············123
82. 9월 9일에 꽃을 대하고 느낌이 있어서 ······124
83. 섣달 20일 하루 종일 강풍이 불고… ······126
84. 초봄 열 선백에게 드림 ············128
85. 일본 정벌을 칭송함 ··············128
86. 도순문 이자추 행헌의 방문을 맞으면서 드림 ···132
87. 보림사 입 공이 서울 가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절구를 지어 보냄 ················133
88. 병중에 홍 상국이 깃발을 돌려… ········134
89. 사자수 공이 석장을 강동 백운암으로 옮긴다는 것을 듣고 감탄해 지음 ·············134
90. 농민을 불쌍히 여겨 흑양 4월 1일 빗속에서 지음 ·135
91. 한 평양 사기가 최 선사를 곡한 운을 따라 답함 ··137
92. 재가 끝나고 우연히 희어 한 편을 지어 인 선백에게 보임 ····················138
93. 우연히 절구 한 수 씀 ·············142
94. 만연사의 선로에게 두 수의 절구를 줌 ······143
95. 김 시랑 훤의 운을 따라 답함 ··········144
96. 선석암에 우거하면서 대나무를 심어 놓고 감상함 ·146
97. 암자 주인이 산을 내려간 후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므로 절구를 지어 부침 ···········147
98. 참선하는 사이에 절구를 지어 동지에게 보여 줌 ·148
99. 가을날에 우연히 씀 ··············149
100. 졸다 일어남 ················149
101. 오산 꼭대기에 좌선암과 행도석이 있는데… ··150
102. 눈 속 추위에 괴로워하는 시를 지어 평양에게 줌 152
103. 정회를 쓰다 ················153
104. 근래 벼슬을 그만둔 시중 하동영 하가 화전 한 폭을 보내면서 산어를 요구하므로 억지로 4절구를 지어 각하에게 드림 ··················154
105. 이 사관이 임금을 호종하고 조정에 되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절구를 지어 부침 ·····156
106. 이 상국이 가산 섭무실이 만든 좋은 먹 한 개를 보내 준 데 대해 감사함 ············157
107. 우러러 법제에 화답해 자인실에 삼가 드림 ···161
108. 지병마 상서 김석에게 부침 ··········162
109. 5월 15일 밤에 동루에 오르니… ········163
110. 게송을 지어 선석암 선로에게 보냄 ······165
111. 만연선로의 운을 따라 받들어 답함 2수 ·····165
112. 운을 따라 연곡선사에게 답함 ·········167
113. 다시 운을 따라 연곡선사에게 답함 ······168
114. 능가산에 놀다 ···············169
115. 운을 따라 김 시랑에게 답함 ·········171
116. 한소향에게 보낸 절구 3수 ··········173
117. 아픈 다리를 스스로 희롱함 ··········174
118. 아침 설법을 마친 후에… ···········175
119. 다시 규봉 인 공이 월헌 강 박사에게 준 시의 운을 따라서 ···················177
120. 한가로이 살면서 ··············178
121. 우연히 씀 ·················179
122. 나한율림 항 선객에게 부침 ··········180
123. 운을 따라 한 사군에게 부침 ·········181
124. 초봄에 한 사군에게 부침 ···········182
125. 운을 따라 홍 상국 막하에 절하고 드림 6수 ···182
126. 김 소경이 양주수로 좌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구를 지어 부침 ···············185
127. 다시 앞의 운을 사용해 김양주가 새로 사업에 임명되고 부름을 받아 대궐에 다다름을 축하해 부침 185
128. 김 시랑의 <송선객을 보냄>이라는 시를 보고 운을 따라 지어 부침 ·············186
129. 고양 가는 길에 제호조 소리를 듣고 짓다 ····187
130. 주상 폐하가 천조를 뵙고… ··········189
131. 새 붓을 시험하기 위해 손 가는 대로 한 게송을 써서 시자에게 주다 ··············192
132. 가을 산 ··················193
133. 병중에 심정을 말함 ·············193
134. 겨울 자리를 시주한 광림 선로에게 감사함 ···195
135. 우연히 씀 ·················196
136. 원옥상인이 산중에 이르러 중국에 간다고 하기에 그 말을 기록해 한 편의 시를 지어 전별함 ···197
137. 우서로 여러 선자에게 묻다 ··········199
138. 어떤 선자가 있어 답함 ············200
139. 자신에게 줌 ················201
140. 고산대선이 방문했으므로 시를 지어 보임 ···202
141. 한거 ····················202
142. 만연공의 시에 답함 ·············203
143. 소 사제의 방문을 사례함 ···········206
144. 영소를 보낸 후 다시 앞의 운을 따라 보냄 ···207
145. 야우송을 지어 동지에게 보임 ·········207
146. 신사 박 공이 세운 방광촌의 원소난야에 제함 ··208
147. 한 시랑에게 시를 부침 ············209
148. 12월 11일 눈보라 휘날리는데 김승을 보내다 ··211
149. 12월 18일 미설 가운데 ············212
150. 새로이 월남 인 공에게 부침… ········212
151. 평양의 한 태수 단에게 부침 ·········213
152. 지원 21년 5월 하순 진변원수 김 상국 주정이 변수를 순찰하러 온다는 소문을 듣고 절구 두 수를 지어 바침 ······················214
153. 또 김 원수에게 올리는 시 ··········216
154. 원수 상국이 특별히 속관을 보내 방문하지 못한 까닭을 알리기에 다시 앞의 운을 사용해 시를 지어 드림 ·218
155. 우연히 씀 ·················219
156. 달밤에 동쪽 망루에 오름 ···········220
157. 사람들에게 보임 ··············221
158. 달을 읊음 ·················222
159. 금장대선사가 새 차를 보내 줌을 감사함 ····224
160. 소 사제의 운을 따라 답함 ··········224
161. 흠산이 “노승은 평생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다만 매일매일 그 모양이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사랑해 게송을 지어 기록한다 ············225
162. 사람들에게 보임 ··············227
163. 팔이 짧음을 노래하다 ············228
164. 졸어로 회포를 펴 표형 선로에게 보임 ·····229
165. 수재 홍 상공에게 보내는 시 ·········231
166. 이 공 행검에게 답함 ·············237
167. 남원의 조 태수가 방문하면서 시를 주기에 그 운을 따라 사례함… ··············237
168. 청암에서 계봉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지음 ···239
169. 심정을 읊음 ················240
170. 운을 따라 염 상국에게 답함 2수 ········240
171. 한 시랑이 내가 조계의 자리를 계승했다는 것을 듣고 시를 지어 하례하므로 운을 따라 답함 ····242
172. 죽당 이 중사에게 답함 2수 ··········244
173. 서울 가는 장륙선사 진 공을 전송하면서 ····245
174. 만연 신장로 묵 공을 전송하면서 ·······246
175. 운흥 신장로 열 공을 전송하면서 ·······246
176. 계봉장로 우 공에게 답함 ···········247
177. 산에 살다 2수 ················249
178. 장난삼아 씀 ················250
179. 조백론을 설명하던 차에 게송을 지어 동범 제덕(諸德)에게 보임 ···············251
180. 조백론의 강을 마치던 날 계봉에서 장구 4운을 주므로 차운해 답함 ··············253
181. 계봉의 우 공이 절을 떠나 진원의 취봉난야에 옮겨 살면서 시를 보내 주기에 운을 따라 그에게 답함 254
182. 더위의 고통스러움을 읊음 3수 ·········256
183. 한가한 가운데 이것저것 읊다 6수 ·······259
184. 도안장로에게 부침 ·············261
185. 평양의 신태수 이 공에게 보냄 ········262
186. 옛날을 생각해 절구 두 수를 지어 계봉장로에게 보냄 ····················263
187. 조계산의 방장 동쪽 담 아래 동백나무 한 그루… 264
188. 선국사가 원소암에 못을 파고 연꽃을 심으면서 지은 시에 받들어 답함 ············265
189. 산에 살다 ·················267
190. 가을날 진락대에 오름 ············268
191. 원소암 벽 위의 옛 시제를 보고 기록함 ·····269
192. 자서 ····················269
193. 어버이를 뵈러 서울 가는 연숙선자를 보내면서 ·270
194. 원각소를 강설하던 차에 짓다 ·········271
195. 새벽에 일어나 새소리를 듣고서 짓다 ·····272
196. 신묘년 초여름에 난을 피해 불대사에 이르러… ·273
197. 밤에 앉아서 2수 ···············273
198. 사군 윤해가 산중을 방문해 머물도록 했으나 하루도 자지 않고 갔으므로 보낸 뒤 시를 지어 부침 ·274
199. 돌아오기를 재촉하는 시를 지어 진행·진경 두 소사에게 보냄 ···············276
200. 소사 심선이 취봉에서 되돌아오면서… ·····276
201. 취봉선로가 방문해 절구 세 수를 주므로 운을 따라 답함 ····················280
202. 한가한 가운데 회포를 읊음 ··········281
203. 네 명의 성인을 찬양하다 ···········282
204. 가을비 오는 원소탑원에서 ··········284
205. 감로장로에게 답함 ·············285
206. 시자가 게송을 청하므로 써서 주다 ······285
207. 빗속에 졸다가 일어남 ············286
208. 우연히 읊음 ················286
209. 저무는 봄에 즉사 ··············287
210. 봄을 아쉬워하며 읊음 ············288
211. 한가한 가운데 우연히 씀 ···········289
212. 큰 소나무 ·················290
213. 일찍이 옛 시를 본떠서 지은 것이 있으므로 추가해 기록함 ··················290
214. 사람을 경계함 2수 ··············291
215. 내가 평소에 풍악산의 뛰어난 경치를 듣고… ··292
216. 상국 농서공이 중국의 중사와 같이… ·····295
217. 사자수의 공이 조계에서 회강암으로… ·····299
218. 우연히 2수를 씀 ···············300
219. 둔재 김훤에게 희롱으로 답함. 2수 ·······301
220. 삼가 보내 준 운을 따라 수재 홍 상공 좌우에 드림 302
221. 운을 따라 소경 한사기가 연도에 있으면서 보내 준 시에 답함 ················303
222. 평양에 새로 부임한 수가 시랑으로 있으면서부터 정치의 교화를 폈다는 것을 알고 지어 보냄 ···304
223. 다시 앞의 운을 사용해 한 국박에게 보냄 ····305
224. 별동에 놀면서 ···············305
225. 계봉의 고통 ················306
226. 병중에 혼자 앉아 회포를 서술함 ·······310
227. 우연히 설당의 운을 써서 인·묵 두 선인에게 보이다 ·····················311
228. 앞의 운을 써서 희우에 답함 ·········313
229. 앞의 운을 써서 인 선백에게 답함 ·······314
230. 앞의 운을 써서 암자의 즐거움을 씀 ······316
231. 앞의 운을 써서 인 선백에게 답함 ·······317
232. 삼현을 애도하는 시 ·············319
233. 새로 부임한 승선 이 공을 축하해 부침 3수 ···322
234. 산속의 즐거움 ···············324
235. 다보사에서 읊음 ··············326
236. 흥룡사에서 읊음 ··············327
237. 최이가 보낸 다향에 감사하며 ·········328
238. 집의 아우 문개가 벼슬에 나아감을 축하함 ···329
239. 금강진에서 읊음 ··············330
240. 서울에 이르다 ···············331

제문(祭文)
1. 충경왕사 제문 冲鏡王師祭文 ···········335
2. 혜소국사 제문 慧炤國師祭文 ···········340
3. 박량 최 선사 제문 泊良崔禪師祭文 ········343
4. 이오 상서 제문 李敖尙書祭文 ···········344

소(疏)
1. 단본대장경찬소 丹本大藏經讚疏 ·········351
2. 감로입원축법수소 甘露入院祝法壽疏 ········355
3. 정혜입원축법수소 定慧入院祝法壽疏 ········360
4. 법수재소 法壽齋疏 ···············364
5. 대원황제축수재소 大元皇帝祝壽齋疏 ········365
6. 우 又 ·····················367
7. 우 又 ·····················370
8. 우 又 ·····················371
9. 축수소 祝壽疏 ·················374
10. 우 又 ····················376
11. 우 又 ····················378
12. 우 又 ····················379
13. 축성소 祝聖疏 ················381
14. 우 又 ····················384
15. 우 又 ····················386
16. 우 又 ····················388
17. 우 又 ····················390
18. 우 又 ····················392
19. 우 又 ····················394
20. 우 又 ····················396
21. 우 又 ····················397
22. 우 又 ····················399
23. 우 又 ····················402
24. 우 又 ····················404
25. 우 又 ····················405
26. 우 又 ····················407
27. 우 又 ····················409
28. 대가환국축수소 大駕還國祝壽疏 ·········410
29. 미타재소 彌陀齋疏 ··············413
30. 도원수김시중축수소 都元帥金侍中祝壽疏 ·····416
31. 천충경왕사소 薦冲鏡王師疏 ···········418
32. 충경왕사소상재소 冲鏡王師小祥齋疏 ·······421
33. 천최사주소 薦崔社主疏 ·············422
34. 천박량최선사소 薦泊良崔禪師疏 ·········424
35. 천망우이오상서소 薦亡友李敖尙書疏 ·······426
36. 사사어제서족축성소 謝賜御製書簇祝聖疏 ·····428
37. 축영수소 祝令壽疏 ··············430
38. 은문이상허축수소 恩門二相許祝壽疏 ·······432
39. 청상당소 請上堂疏 ··············434
40. 축성동안거기시소 祝聖冬安居起始疏 ·······436
41. 우 又 ····················438
42. 대원황제절일재소 大元皇帝節日齋疏 ·······440
43. 정혜입원축성하안거기시소 定慧入院祝聖夏安居起始疏 ·····················442
44. 하신등보위축성소 賀新登寶位祝聖疏 ·······445
45. 우 又 ····················448
46. 축대가소재인왕천수지론사종법석소 祝大駕消災仁王千手智論四種法席疏 ··············450

표(表)
1. 상대원황제표 上大元皇帝表 ···········457
2. 상대원황제사사복토전표 上大元皇帝謝賜復土田表 ··461
3. 우 又 ·····················463
4. 하신등보위표 賀新登寶位表 ···········465
5. 하대가환조표 賀大駕還朝表 ···········468

서(書)
1. 재청주현암사기충청도지휘사곽상서서 在靑州玄巖寺寄忠淸道指揮使郭尙書書 ············473
2. 기진정통오대선서 寄眞靜通奧大禪書 ········478
3. 기대조요동로안찰부사홍공혁서 寄大朝遼東路按察副使洪公革書 ··················482
4. 답선월서 答禪月書 ···············485
5. 답김소감윤부서 答金少監允富書 ·········488
6. 답정판추가신서 答鄭判樞可臣書 ·········489

원문(願文)
1. 감로사 기사년 동안거 원문 甘露社己巳年冬安居願文 ·495
2. 규봉암 갑술년 동안거 원문 圭峯庵甲戌年冬安居願文 ·498
3. 조사 예참 겸 발원문 祖師禮懺兼發願文 ·······501

발(跋)
1. 발문 跋文 ···················509
2. 발 跋 ·····················510
3. 원감록인사발문 圓鑑錄印寫跋文 ·········512

부록(附錄)
1. 원감국사비명 원본 圓鑑國師碑銘原本 ·······519
2. 조계산제6세증시원감국사비명 曹溪山第六世贈諡圓鑑國師碑銘 ··················530

원문(原文) ···················537
찾아보기 ····················657


해설 ······················697
참고 문헌 ····················734
지은이에 대해 ··················736
옮긴이에 대해 ··················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