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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9일 화요일

난중일기(亂中日記)


도서명 : 난중일기
지은이 : 이순신
옮긴이 : 이은상
분 야 : 문학 / 인물 / 역사
출간일 : 2014년 8월 15일
ISBN : 979-11-304-0080-8 03810
가 격 : 15,920원
판 형 : 사륙판(128*188mm)
제 본 : 무선(PUR)
면 수 : 894쪽







☑ 200자 핵심요약

≪난중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기보다는 곁에 두고 틈틈이 펼쳐 보며 구절을 되새길 때 더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일기 한 편 한 편마다 거기에 배어 있는 이순신 장군의 충혼을 느낄 수 있도록 편집했다. 친필 초고와 마찬가지로 내려쓰기 편집에다가 충분히 긴 호흡으로 읽어 내려갈 수 있도록 여백을 두었다.




☑ 책 소개


꼭 읽어야 할 국민 독본, 그러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이 있을까.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7년 동안 쓴 진중일기로서 국보 제76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까지 한 고전. 노산 이은상은 “민족의 성전(聖典)”으로 “우리 국민 누구나 꼭 읽어야 할 국민 독본”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정작 ≪난중일기≫를 한번이라도 읽어본 이는 드물다. 왜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난중일기’란 제목처럼 내용도 어렵고 딱딱하리라는 생각에서 선뜻 접근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인간 이순신의 생생한 육성을 마치 학술 문헌처럼 담아낸 기존 책들의 편집도 ≪난중일기≫ 독서에 장애로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새로운 ≪난중일기≫, 이 책이 필요했다.


≪난중일기≫ 국역본의 원조

이 책은 노산이 1960년대 역주해한 ≪난중일기≫(1968, 현암사)를 새롭게 다시 펴낸 것이다. 노산은 이순신 장군의 친필 초고본을 바탕으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있는 내용을 보충해 한글로 옮기고 주석을 달았다. 앞서 1960년 당대 최고의 한학자들과 함께 작업한 ≪국역주해 이충무공전서≫(충무공기념사업회 간행)가 기초가 되었다.
노산 역주해본은 ≪난중일기≫ 국역본의 원조 격이다. 현재 출간되고 있는 모든 ≪난중일기≫ 국역본은 이 책에서 비롯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칼의 노래≫의 작가 김훈이 대학 시절 읽었던 ≪난중일기≫도 바로 노산 역주해본이었다.
1960년대 번역이라 문장과 표현이 지금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맞춤법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한 그대로 두었다. 다만 관련 자료를 참조해 명백한 오류 또는 오기는 수정했다. 또한 현재 지명 설명은 현재 행정구역상 이름을 반영하는 등 현재 독자들이 읽기에도 전혀 무리 없도록 다듬었다.

가장 ≪난중일기≫다운 ≪난중일기≫

≪난중일기≫는 일기다. 이순신 장군은 전란 상황과 진중 생활을 꼼꼼히 기록하는 한편 국정, 가족, 동료 등에 대한 내밀한 심정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일기마다 간결한 문체에 절절한 심정이 담겨 있다. 소설보다는 아포리즘에 가깝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기보다는 곁에 두고 틈틈이 펼쳐 보며 구절을 되새길 때 더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일기 한 편 한 편마다 거기에 배어 있는 이순신 장군의 충혼을 느낄 수 있도록 편집했다. 우선 친필 초고와 마찬가지로 내려쓰기로 편집했다. 충분히 긴 호흡으로 읽어 내려갈 수 있도록 여백을 두었다. 아래쪽엔 남해의 물결, 조선과 일본의 전선들을 문양처럼 배치했다.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한산, 명량이나 노량 바다의 물결 위를 떠다니는 느낌이다.
책의 분량은 약 900쪽에 이른다. 그럼에도 책을 펼쳐 보기에 불편하지 않다. PUR 제본이라는 제본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덧붙여, 눈치 챘겠지만, 책값 15,920원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을 상징한다.
백문이 불여일독(讀). 직접 한번이라도 이 책을 펼쳐 보면 이 책의 가치를, ≪난중일기≫의 가치를, 영웅 이순신의 진정을 알게 될 것이다.




☑ 책 속으로

중위장(中衛將)을 불러 내일 새벽 떠날 것을 약속하고 장계를 썼다. 이날 여도 수군 황옥천이 집으로 도망간 것을 잡아다가 목을 베어 군중에 높이 매어 달았다.(임진년 오월 초사흘) −59쪽

비가 오다 말다 했다.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털인들 무엇이 어떠하랴마는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었다.(계사년 유월 열이틀) −141쪽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오니 나그네 회포가 어지럽다. 홀로 배 뜸 밑에 앉았노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은 뱃전에 비치고 정신도 맑아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 덧 닭이 울었다.(계사년 칠월 보름) −167쪽

원균이 포구에 있는 수사 배설과 교대하려고 여기 이르렀기로 교서에 숙배하게 하였더니 불평하는 기색이 많으므로, 두 번 세 번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하였다 하니 너무도 무식한 것이 우스웠다.(을미년 이월 스무이레) −383~384쪽

혼자 수루에 의지했다. 나라 정세가 아침 이슬같이 위태로운데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기둥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만한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음을 생각해보니 사직이 장차 어떻게 될지 몰라 마음이 산란했다. 종일토록 누웠다 앉았다 했다.( 을미년 칠월 초하루) −427쪽

장흥 부사, 우우후, 가리포가 와서 함께 활을 쏘았다. 요전번 진 군관들 편에서 한턱을 내어서 모두 술이 몹시 취해 가지고 흩어졌다. 이날 밤에 너무 취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났다 누웠다 하면서 밤을 밝혔다. 봄철의 피곤한 기운이 벌써 이렇구나.(병신년 이월 열엿새) −511쪽

이날 아들 회가 방자(房子) 수(壽)를 곤장 때렸다 하기에 아들을 뜰아래로 붙들어다가 잘 타일렀다. 밤이 든 후에 땀이 줄줄 흘렀다.(병신년 팔월 스무하루) −585~586쪽

종일 노를 빨리 저어 이경에 어머님 앞에 이르렀다. 백발이 부수수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기운이 흐려져 아침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이 새도록 위로하여 그 마음을 풀어 드렸다.(병신년 윤팔월 열이틀) −608쪽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진을 우수영(右水營) 앞바다로 옮겼다. 그것은 벽파정 뒤에 명량(鳴梁)이 있는데, 수효 적은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약속하되,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 망정 용서치 않겠다”고 엄격히 약속하였다.(정유년 구월 보름) −769~770쪽

이른 아침에 특별 정찰 부대가 보고하기를 “적선이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이 명량으로 해서 곧장 우리가 진 치고 있는 곳을 향해 들어온다”고 하였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삼십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적하는 것이라 스스로 낙심하고 모두 회피할 꾀만 내는데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두 마장 밖에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地字), 현자(玄字)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니 탄환은 폭풍우같이 쏟아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그러나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얼굴빛이 질렸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하고 여러 장수의 배들을 돌아보니 먼 바다에 물러가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자 해도 적들이 더 대어들 것이라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군령을 내리는 기(旗)를 세우라고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中軍將)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中軍)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하였다. 그래서 두 배가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자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두 척에 지령하여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 붙듯하여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또 혹은 수마석(水磨石) 덩어리로 무수히 치고 막다가 배 위의 사람이 기진맥진하므로,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세 척이 거의 다 엎어지고 자빠졌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뒤쫓아 와서 합력해 쏘아 죽여 적은 한 놈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투항한 왜인 준사(俊沙)는 안골 있는 적진으로부터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에 빠져 있는 것을 굽어보더니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 있던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말했다. 내가 무상(無上) 김돌손(金乭孫)을 시켜 갈고리로 낚아 올린즉 준사가 좋아 날뛰면서 “그래 마다시다” 하고 말하므로 곧 명령하여 토막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였다. 우리 배들은 적이 다시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쫓아 들어가 지자, 현자 대포를 쏘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 적선 서른한 척을 깨뜨리자 적선이 퇴각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싸움하던 바다에서 그대로 정박하고 싶었으나 물결도 몹시 험하고 바람도 역풍이라 형세 또한 위태롭고 외로워 당사도로 옮겨가서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참으로 천행이었다.(정유년 구월 열엿새, 명량해전이 있던 날) −771~776쪽




☑ 지은이 소개


이순신(李舜臣, 1545~1598)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45년(인종 1) 3월 8일(양력 4월 28일) 한성부 건천동(현재 서울시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사화로 몰락한 문반 가문의 사형제 중 셋째였다. 이름 순신은 중국 삼황오제의 순(舜) 임금에서 따왔다. 어려서 유학을 공부했고 21세 때 혼인한 이후 병학과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28세 때 처음 무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했고 32세 때 식년 무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무관으로서 승진과 좌천, 파면과 복직을 거듭하며 동구비보(현재 함경도 삼수)의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 병사 군관, 발포 만호, 함남 병사 군관, 건원보(현재 함북 경원) 권관, 훈련원 참군, 사복시 주부, 조산보(현재 함북 경흥)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 전라순찰사 군관 겸 조방장 등을 거쳤다. 이어 선전관에서 정읍 현감으로 그리고 1591년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사천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한산대첩,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뒀다. 1593년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1597년 조정을 기망하고 왕명을 어겼다고 해서 통제사 직에서 해임되고 투옥, 고초를 겪었다. 정유왜란의 와중에 옥에서 풀려나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했다. 같은 해 7월(양력 8월)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함으로써 궤멸 상태에 이르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두 달 뒤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명량에서 13척의 배로 수백 척의 일본 수군을 물리쳤다. 1598년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선조 37년(1604) 1등 선무공신에 책봉되었고, 인조 21년(1643)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다. 정조 17년(1793)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2년 뒤 ≪난중일기≫를 포함해 그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간행되었다.




☑ 옮긴이 소개


이은상(李殷相, 1903~1982)

시조 시인이자 사학자이다. 호는 노산(蘆山)으로 190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192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현대 시조의 개척자로서 ‘가고파’, ‘봄처녀’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광복 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호남신문사 사장, 대구 청구대 교수,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 대한민족문화협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영남대 교수 등을 지냈다. 언론, 학술, 사학 방면의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충무공 연구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1960년대 한학자들과 함께 ≪이충무공전서≫국역 작업에 참여했다. 전서본과 친필 초본을 합쳐 한글로 옮기고 주석을 달아 펴낸 ≪난중일기≫는 이후 나온 모든 국역본들의 바탕이 되었다. 역주해본 ≪난중일기≫와 함께 저서로 ≪노산 시조집≫, ≪조국 강산≫ 등 시조집과 ≪이충무공 일대기≫, ≪조선 사화집≫, ≪민족의 맥박≫, ≪노변필담≫, ≪피어린 육백 리≫ 등이 있다.





☑ 차례


임진(壬辰)...11

계사(癸巳)...71

갑오(甲午)...197

을미(乙未)...369

병신(丙申)...481

정유(丁酉) 하나...630

정유(丁酉) 둘...749

무술(戊戌)...821


작품 해설 ‘세세에 번쩍이는 역사의 면류관’...835

신구 시간 대조표...874

신구 지명 대조표...876

2014년 7월 14일 월요일

경제문감 (經濟文鑑)


도서명 : 경제문감 經濟文鑑
지은이 : 정도전
옮긴이 : 조기영
분야 : 정치
출간일 : 2009년 11월 15일
ISBN : 978-89-6406-377-4
가격 : 12,000원
규격 : A5 제본 : 양장본 쪽 : 199쪽


☑ 200자 요약

정도전이 쓰고 태조 이성계가 읽은 국가 경영 핵심 지침서
조선 왕조의 초석을 쌓은 삼봉 정도전의 고뇌를 담은 책이다. 태조 이성계에게 올린 국가 경영에 관한 핵심적인 지침서로 무엇이 올바른 정치인지를 깊이 고민하고, 어떻게 공명정대한 정치 체제를 만들지를 풀어냈다. 권근의 주해와 정총의 서문으로 더 풍부해진 이 책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올바른 정치이론을 읽어보고, 태조와 정도전이 이루고자 한 국가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 책 소개

경국제세(經國濟世)에 필요한 거울이 되는 글
“경국제세, 나라를 잘 다스려 세상을 구제한다.”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가 이 한마디에 모두 들어 있다. 정도전은 ≪경제문감≫을 씀으로써 세상을 구제하고자 했다. 그는 옛사람을 숭상했기 때문에 그들 직분 임무의 잘잘못과 인물의 잘남 못남을 널리 가려내어 우선 글로 기록했다. 이를 정리하는 작업을 통해 그가 세우고자 하는 바른 정치 체제를 알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선대 선비들의 학설을 인용하면서 그 사이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는데 매우 간단한 형태지만 소략하지는 않고, 상세하면서도 번잡하지 않다. ≪경제문감≫에서 주장하는 정도전의 정치 체제 및 통치 철학은 재상을 중심으로 하는 공명정대한 정치, 백성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민본주의, 경제적·물질적 성장과 절약을 강조하는 실용주의, 그리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룩하는 정치 이념이다. 요임금과 순임금 시대에도 그러했고, 오늘날까지도 새겨 읽을 만한 정도전의 정치에 대한 생각이 이 한 권 안에 있다.

무릇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군수와 현령은 백성의 근간이 된다
군군신신(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각자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이 책에서 제시한 각 직분에 맞는 태도와 정신은 오늘날 읽어도 하나 모자람이 없다. 정도전이 제시한 올바른 국가의 모습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었다.
재상은 위로는 음양(陰陽)을 조화하고, 아래로는 많은 백성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며, 안으로 백성을 평온하고 밝게 다스리고, 밖으로 사방의 오랑캐를 진정시키고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임금이 어질면 어질지 않은 사람이 없고 임금이 옳으면 옳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한 번 임금을 바르게 하면 나라가 안정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임금을 보좌하는 재상의 업무는 임금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태조가 즉위하면서 교시한 고과법(考課法)도 소개했는데, 이는 중국 고대의 전최법(殿最法)을 인용해 만든 것으로 선(善)·최(最)는 지방 수령(守令)의 근태를 조사해 등급을 정하는 명칭으로 선(善)은 덕의(德義)·청근(淸謹)·공평(公平)·각근(恪勤)이고, 최(最)는 옥송(獄訟)에 억울함이 없는 것, 납세를 독촉하되 백성을 불안하게 하지 않는 것, 부역을 균등하게 차출하는 것, 농토를 개간하고 뽕나무를 심는 것, 들을 넓히고 토지를 개간하는 것, 수리(水利)를 잘 다스리는 것, 간특함과 도적을 없애는 것, 곤궁함을 구제하는 것 등으로 했다.
조선왕조 창건에 초석이 되었던 정도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두뇌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방면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두 번의 유배와 10여 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통해 독서와 성찰로 자기 자신을 연마하고 국가 경영에 필요한 대도를 구상했다. 그리하여 전제(田制) 및 군제(軍制) 개혁은 물론이고 각종 정치 이론을 정립했다. ≪경제문감≫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난국을 해결하기 위한 정도전의 고뇌에서 나온 저서로서 시대를 통관하고 국운을 전망하고 국정을 계획한 삼봉 리더십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 책 속으로

君仁莫不仁 君義莫不義 一正君而國定 故曰 輔相之業 莫大於格君

임금이 어질면 어질지 않은 사람이 없고 임금이 옳으면 옳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한번 임금을 바르게 하면 나라가 안정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임금을 보좌하는 재상의 업무는 임금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 지은이 소개


정도전(鄭道傳, 1342∼1398)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 충혜왕 복위 3년에 3남 1녀 가운데 첫째로 태어났다. 삼봉(三峯)이라는 호는 단양팔경 가운데 하나인 도담 삼봉에 연유한다고 하는데, 정도전의 외가가 단양에 있고, 그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또한 정도전의 집이 삼각산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취한 호일 가능성도 있다.
상경한 뒤로 이색(李穡)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해 공민왕 11년(1362)에 급제해 하급 관리를 역임하다가 공민왕 15년에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내려가 학문과 교육에 전념했다. 공민왕 19년에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어 이색·정몽주·이숭인·이존오 등과 성리학을 강론했다. 1374년 우왕이 즉위한 이후 신진 학자들에게 시련이 닥쳐와 친원(親元) 정책에 반대했던 탓에 나주 근처로 유배되었다. 풀려나와 고향에서 4년간 지내고 삼각산 집으로 와서 살다가 권신들의 외압에 부평·김포 등지로 이사하는 등 굴욕과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그 뒤 우왕 9년에 함주로 가서 이성계를 만난 뒤로 왕조 건국에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게 되고, 우왕 14년(1388) 위화도 회군 이후에는 밀직부사를 맡아 전제(田制) 개혁부터 단행했다. 그리고 1392년 조선왕조가 창건되면서 1등 공신으로 책봉되고 새로운 왕조의 요직을 장악했다. 새로운 도읍지 결정과 경복궁 창건, 군제(軍制) 개혁과 병법 개혁 등 새로운 왕조를 위해 수많은 업적과 공적을 쌓았다. ≪조선경국전≫, ≪감사요약≫,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 ≪불씨잡변≫ 등을 지었으며, 태조의 창업을 기리는 <문덕곡>, <몽금척> 등의 노래도 지었다.
그리하여 당시 정도전의 권세는 왕이나 왕족을 능가할 정도였으며, 항상 이방원과 대립했다. 결국 태조 7년에 일어난 무인의 난에 역적의 누명을 쓰고 이방원의 칼날 아래 쓰러지고 말았다.



☑ 옮긴이 소개


조기영
무외정사(無外精舍) 주인 조기영(趙麒永)은 강원대 사범대학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홍만종 시학 연구>로 석사, <하서 김인후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도회 한문연수원과 중앙승가대학 불전국역연구원 등에서 공부했으며, 권우 홍찬유 선생과 연민 이가원 선생으로부터 지어재(之於齋)와 인재(仁齋)라는 아호를 받았다. 연세대 국학연구원과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했으며, 연세대·강원대·경찰대·공주교대·방통대·목원대·상지대·한성대·서정대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는 충북대 우암연구소 전임연구원 및 고려대 교육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있으며, 경희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그동안 조광조 평전인 ≪위대한 개혁≫을 비롯해 ≪삼봉 리더십≫·≪하서 김인후의 시문학 연구≫·≪하서시학과 호남시단≫·≪화랑세기≫·≪한문학의 이해≫·≪정보사회의 언어문화≫·≪한국시가의 정신세계≫·≪한국시가의 자연관≫과 ≪동몽선습≫·≪백련초해≫·≪명심보감≫·≪백유경≫·≪반야심경≫·≪초발심자경문≫·≪완역 명심보감≫ 등 90여 편의 논저를 냈다. 지금도 우리나라 한문학 및 동양고전 전반에 걸쳐 연구하고 강의하고 저술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경제문감서(經濟文鑑序)
경제문감(經濟文鑑) 상(上)
재상(宰相)
1. 재상의 명칭
2. 주의 관제
3. 총론
4. 재상의 직분
5. 재상의 업무
경제문감(經濟文鑑) 하(下)
대관(臺官)
1. 총론
2. 대관의 직분
간관(諫官)
1. 총론
2. 간관의 직분
위병(衛兵)
1. 총론
감사(監司)
1. 총론
2. 감사의 직분
주목(州牧)
1. 총론
군태수(郡太守)
1. 총론
현령(縣令)
1. 총론
2. 현령의 직분
경제문감후서(經濟文鑑後序)

옮긴이에 대해

2012년 3월 16일 금요일

매천야록


☑ 책 소개


고종이 즉위한 1863년 전후부터 1910년 한일 합방 조약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기까지 48년간의 정치·사회·민족·문화 등을 생생하게 담아 낸 필기류(筆記類)다. 이 책에서 독자는 다른 사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구한말 개화와 보수, 침략과 저항의 소용돌이를 경험한 지식인의 날카로운 비판 정신을 보게 될 것이다.


☑ 출판사 책 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는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매천야록≫이 작성되던 시기는 조선 사회의 전통과 국가의 기반이 흔들리던 격동기였다. 이 시기 조선은 안으로는 정치의 혼란을,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극복하지 못하고 마침내 국권을 상실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황현은 이 책에서 혼란했던 그 시기의 정국과 사회상, 국제 관계 등을 중심으로 사회·민족·문화 등 각 부분의 모든 사실을 종횡으로 취급했다. 특히 무능했던 치자(治者)층의 부패상과 권력의 농단, 국가 정치 기강의 해이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아울러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상을 절절히 담아냈다. 또한 당시 지배층들에서부터 민초에 이르는 생활상, 서울의 도시적 변화, 개화의 미명 아래 유입되던 서양 문물과 그에 대한 민초들의 반응을 소상히 기록했다.

≪매천야록≫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오랜 시일을 기다려야 했다. 황현은 순절할 때 자손들에게 유훈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 책을 보이지 말 것을 당부했고, 후손들은 극비에 붙여 깊이 간직했다. 그 후 책의 일부를 중국에 망명 중이던 김택영에게 비밀리에 보내어 교정과 편찬을 청했는데, 김택영이 자신이 편저한 ≪한사계(韓史綮)≫를 엮을 때 ≪매천야록≫을 인용했음을 명시하면서, 이 책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원본은 수십 년이 지난 뒤에 공개되었다.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이 책을 등사했는데,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 등사본을 가지고 원본과 대조한 후 ≪한국사료총서≫ 1집으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매천야록≫에서 구한말의 사회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을 주로 골랐다. 특히 서구의 물결이 밀어닥치는 상황에서 당시 민초들의 삶과 풍속을 살필 수 있는 내용들을 선별했다. 이 책을 통해 황현의 매서운 필체 속에 펼쳐지는 풍운의 사회상을 경험하기 바란다.


☑ 책 속으로

석유는 영·미 등 여러 나라에서 산출되는데 혹은 바닷속에서 나온다고도 하고, 혹은 석탄에 근원하는 것이라고도 하며, 또 돌을 가열하여 짜낸다고도 하는 등 그 설이 하나가 아니나 천연의 산물임은 분명하다. 우리나라는 경진년(1880) 이후 처음 사용했는데 처음에는 색이 붉고 냄새가 무척 지독했으며 한 홉이면 열흘 밤을 켤 수 있었다. 몇 년이 되지 않아 색이 점차 맑아지고 냄새가 점점 옅어졌으며 화력도 약해지더니 한 홉에 겨우 사나흘 밤밖에 켜지 못했다. 석유가 들어온 이래로 산과 들에 기름 짜는 열매들은 자라지 않게 되었다. 전국을 통틀어 위로부터 아래까지 사람들이 석유가 아니면 등불을 켤 수 없게 되었다. 무릇 물(物)은 양쪽이 다 커질 수는 없는 것이다. 양면(洋綿)이 들어온 뒤로 재래종의 면화 농사는 잘 되지 않았고 서양 철이 들어오자 철의 산출이 아주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일이 종종 있으니 또한 괴상한 일이다. - 69~70쪽

울릉도 바다 동쪽으로 백 리쯤 가서 하나의 섬이 있는데 ‘독도(獨島)’라고 한다. 예부터 이 섬은 울릉도에 속했는데 일본인들이 억지를 부려 그들의 영토라 주장하며 조사해 갔다. - 150쪽


☑ 지은이 소개

황현(黃玹, 1855~1910)

황현은 광양현 서석촌(현 전라남도 광양군 봉강면 석사리)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이라 했다. 출신 가계를 보면 장수 황씨로 황희 정승의 후손이기는 하나, 중간에 가세가 영락해서 그의 조부에 이르러서는 상업으로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 이렇게 축적한 재산을 기반으로 황현은 1천 권의 장서를 갖추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황현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으나, 관력은 불우하여 34세에야 겨우 성균관의 생원이 되는 데 그쳤다. 그는 생원이 된 후, 조선 안팎으로 혼란한 세상을 등지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거실에 구안옥(苟安屋)이라 이름을 붙이고 독서와 시작(詩作)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서울에 있는 여러 친구가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 구국 운동에 참가하라”라고 권유했으나, 황현은 그때마다 “그대들은 어찌 나를 귀신 나라에서 날뛰는 미친 사람들 가운데로 끌어들여 같은 귀신, 미친 사람으로 만들려 하는가” 하고 도리어 엄절히 책망했다.

혼란한 세상에서 황현은 비록 은거했으나 망국상을 그대로 보고 있지는 못했다. 자신의 지기였던 김택영이 벼슬을 버리고 중국으로 망명한 것처럼 자신도 망국인의 방도를 생각한 듯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1910년 8월 일본은 소위 한일병합조약이라는 것을 발표해 나라와 민족의 멸망을 공식화했다. 이 소식을 듣고 황현은 애절한 절명시를 남기고 순국했다.


☑ 옮긴이 소개

조준호

국민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을 지냈으며(2004∼2005), 현재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조선후기 수도방위체제≫(공저: 바다출판사, 2004)가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조선 숙종∼영조대 근기지역 노론학맥 연구>(2003), <조선후기 석실서원의 위상과 학풍>(≪조선시대사학보≫11, 1999), <퇴계 이황의 서원 건립 활동과 서원론의 실현>(≪역사문화논총≫2, 2006), <조선 서원의 전개 과정에서 바라본 사림계의 서원관>(≪한중 국제학술회의 논문집≫, 2007) 등이 있다.


☑ 목차

해설 ······················15

지은이에 대해 ··················19

권1 상, 갑자년(1864)∼정해년(1887)

운현궁 ·····················25

장동 김씨 ····················25

국혼 ······················26

김흥근의 별장 ··················27

세도 ······················28

대원위 분부 ···················29

태산을 평지로 ··················30

원납전 ·····················31

만동묘 ·····················32

서원 ······················33

당백전과 청전 ··················34

천주교인 남종삼 ·················35

도모지 ·····················35

해인사 경판각 ··················36

운현의 청지기 ··················37

운현의 사람 쓰기 ·················38

종친과 ·····················38

포량미 ·····················39

북촌과 남촌 ···················39

어재연의 순절 ··················40

잠영록 ·····················41

산림 ······················42

대원군이 실각한 이후 ···············43

척양비 ·····················43

최익현의 상소 ··················44

최익현의 생활 ··················45

대원군의 10년 통치 ················45

십 년 세도 ····················47

운현궁 쪽 사람 ··················47

전주 아전 ····················48

김상현 ·····················49

다산 정약용 ···················50

다산 정약용의 기억력 ···············51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52

거벽·사수 ···················53

조흘강과 매좌 ··················53

과거시험장 ···················55

지방에서 보이는 시험 ···············56

과거 매매의 값 ··················57

가수와 실재 ···················57

낙폭전 ·····················58

석 돈 진사 ····················58

궁중 연회 ····················59

신분제도 ····················60

무과제도 ····················61

무관명가 ····················63

신래 ······················64

유가 ······················65

대원군의 수완 ··················65

나합 ······················66

우두법의 시행 ··················67

학질의 금계랍 ··················69

석유 ······················69

개항 이후의 수입품 ················70

영선사 김윤식 ··················71

전환국 ·····················72

북관묘 ·····················72

화륜선 구입 ···················73

임오군란 ····················73

대원군의 재집정 ·················75

문묘종사 ····················75

복제 개혁 ····················77

민영익의 저택 ··················79

개항 ······················79

과거 매매 ····················80

토문강 국경선 ··················81

육영공원 ····················81

청붕과 허교 ···················82

장탕반 ·····················83

서얼 ······················83

전보국 ·····················87

송금 ······················87

권1 하, 무자년(1888)∼계사년(1893)

세자의 소년 시절 ·················93

노인 난리 ····················94

최제우의 복주 ··················95

권2, 갑오년(1894)∼무술년(1898)

갑오년(1894), 고종 31년

전봉준 ·····················99

아리랑 타령 ···················100

옥당풍년 ····················101

중궁의 총명 ···················102

국한문 혼용 ···················103

은전과 엽전 ···················103

을미년(1895), 개국 504년

영은문·삼전도비의 훼철 ·············105

십 년 사이의 세상 변화 ··············106

전봉준 등 처형 ·················106

형사법 개정 ···················107

전주의 약령 설치 ················107

한성의 승금 해제 ················108

백관의 연봉 제정 ················109

관리의 연봉 제정 ················109

호열자의 유행 ··················110

공문서를 국한문으로 하다 ············110

개국기원절 ···················111

광견병 ·····················112

울릉도 ·····················112

인정종·파루종 ·················112

단발령 ·····················113

병신년(1896), 개국 505년

단발령과 의병 ··················115

비 ·······················116

지방 관원과 연봉 ················117

지방 관원의 임기 및 휴가 ·············117

정유년(1897), 건양 2년

원구단 ·····················118

국기 제정 ····················118

무술년(1898), 광무 2년

황성신문 창간 ··················120

대원군 장례 ···················120

철도사의 설치 ··················121

독립협회 ····················121

권3, 기해년(1899)∼계묘년(1903)

기해년(1899), 광무 3년

조경단 축조 ···················127

의학교 설립 ···················128

양교의 성행과 종현학당의 건립 ··········129

전차 ······················130

채회의 금지 ···················131

명성후의 유혼 ··················131

발명가 ·····················132

경자년(1900), 광무 4년

흑사병의 유행 ··················134

일본의 흑사병원균 규명 ·············134

영남 활빈당 ···················135

신축년(1901), 광무 5년

희랍교 전도 ···················136

안남미 수입 ···················136

일본인의 식민 계획 ···············137

계묘년(1903), 광무 7년

일본 상인들의 기념잔 ··············138

양무호 ·····················138

경부선 철도 공사 ················139

권4, 갑진년(1904)∼을사년(1905)

갑진년(1904), 광무 8년

상화가와 매음가 ·················143

무당 엄금 ····················144

을사년(1905), 광무 9년

정토종 ·····················145

성적도 배포 ···················145

일본인의 지금고 설치 ··············146

권5, 병오년(1906), 광무 10년

독도 ······················151

화투의 출현 ···················151

권6, 정미년(1907)∼경술년(1910)

정미년(1907), 광무 11년

구미식 혼례 ···················155

무신년(1908), 융희 2년

석전 금지 ····················156

작잠법 ·····················156

기유년(1909), 융희 3년

단군교 창설 ···················158

경술년(1910), 융희 4년

사색의 양반 조사

천조교

옮긴이에 대해

권1 하, 무자년(1888)∼계사년(1893)

세자의 소년 시절

노인 난리

최제우의 복주

권2, 갑오년(1894)∼무술년(1898)

갑오년(1894), 고종 31년

전봉준

아리랑 타령

옥당풍년

중궁의 총명

국한문 혼용

은전과 엽전

을미년(1895), 개국 504년

영은문·삼전도비의 훼철

십 년 사이의 세상 변화

전봉준 등 처형

형사법 개정

전주의 약령 설치

한성의 승금 해제

백관의 연봉 제정

관리의 연봉 제정

호열자의 유행

공문서를 국한문으로 하다

개국기원절

광견병

울릉도

인정종·파루종

단발령

병신년(1896), 개국 505년

단발령과 의병



지방관원과 연봉

지방관원의 임기 및 휴가

정유년(1897), 건양 2년

원구단

국기 제정

무술년(1898), 광무 2년

황성신문 창간

대원군 장례

철도사의 설치

독립협회

권3, 기해년(1899)~계묘년(1903)

기해년(1899), 광무 3년

조경단 축조

의학교 설립

양교의 성행과 종현학당의 건립

전차

채회의 금지

명성후의 유혼

발명가

경자년(1900), 광무 4년

흑사병의 유행

일본의 흑사병원균 규명

영남 활빈당

신축년(1901), 광무 5년

희랍교 전도

안남미 수입

일본인의 식민 계획

계묘년(1903), 광무 7년

일본 상인들의 기념잔

양무호

경부선 철도 공사

권4, 갑진년(1904)~정미년(1907)

갑진년(1904), 광무 8년

상화가와 매음가

무당 엄금

을사년(1905), 광무 9년

정토종

성적도 배포

일본인의 지금고 설치

병오년(1906), 광무 10년

독도

화투의 출현

정미년(1907), 광무 11년

구미식 혼례

석전 금지

작잠법

단군교 창설

사색의 양반 조사

천조교

옮긴이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