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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8일 화요일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



☑ 책 소개

세계 최초의 협동조합과 유치원을 설립한 로버트 오언의 사회 발전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엿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져온 양극화가 심각한 오늘날 사회에서 고통 받고 있는 우리에게, 현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줄 것이다.



☑ 출판사 책 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는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로버트 오언이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을 집필할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이 비참한 삶을 살아가던 사회였다. 찰스 디킨스 또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1838)에서 이러한 현실을 다룬 바 있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며 오언은 무엇이 절망적인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으며, 이 책은 그러한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오언은 외부의 강제보다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 행동에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두었다. 무지와 오류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서로 협력하고 개인과 사회 모두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사회 원리들을 만들면서 사회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의 성격은 본성이나 유전자가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 환경에 따라 달리 형성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환경과 교육을 특히 강조했으며, 합리적으로 교육을 받고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를 얻고 가족을 꾸리고 간간이 오락을 즐길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영국의 뉴래너크와 미국의 뉴하모니의 공동체에서 직접 실험하고 증명했다. 일례로 그는 영국의 뉴래너크에 세계 최초의 유치원을 세웠다. 그가 생각하는 사회 발전의 또 하나의 동력은 바로 협동조합으로, 협동조합은 개인과 사회의 이익을 조화시키는 좋은 제도였다. 나아가 그는 여러 산업을 공동으로 통제하고 협동해서 운영하면 더욱 좋은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아쉽게도 오언의 실험은 성공하지 못했고, 오언은 공동체를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운동가로 여생을 보냈다. 실패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세계의 협동조합 운동사를 쓴 존스턴 버챌은 정부와 기업가들의 억압 때문에 노동조합이 폐쇄되어 협동조합이 활성화되지 못했고, 조합원들이 빈곤에 빠질 정도로 경기가 악화되었으며, 이윤 배분과 관련된 원칙이 정해지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의 공동체 계획은 실패했을지라도 그의 주장은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 당시의 정부 관료와 기업가들도 지지를 보냈으며, 여전히 많은 사람이 오언의 이상을 따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하고 있다. 또한 오언이 강조했던 새로운 교육의 필요성과 협동조합 운동의 중요성은 우리 사회에도 의미 있는 주제들이다.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은 총 네 개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2에세이는 새로운 사회의 원리를 밝히는 장이고, 제3·4에세이는 그것을 실제 사회에 적용하는 장이다. 원리도 중요하지만 오언 스스로 밝혔듯이 이 책은 자신의 구상이 공상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따라서 저자의 의도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제1·2에세이는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한에서 발췌했으며, 제3·4에세이는 완역했다.



☑ 책 속으로

이런 계획들은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모든 종류의 좋은 습관(당연히 이 습관은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사람들을 속이는 습관을 몸에 익히지 않도록 막을 것이다)을 익히도록 고안되어야만 한다. 그 뒤에도 아이들은 합리적으로 교육을 받아야만 하고 그 노동력은 유용하게 지도되어야 한다. 그런 습관과 교육은 사람들이 능동적이고 정열적인 욕망을 품고 모든 개인의 행복을 늘리도록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종파나 정파, 국가나 풍토 때문에 배제되는 일이 조금도 없을 것이다. 이런 습관과 교육은 거의 아무런 예외도 없이 건강하고 활기차며 생기 있는 육체를 보증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복은 육체의 건강함과 마음의 평온함에 의지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28~29쪽

지금 공동체에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은 아파서 일할 수 없거나 늙어서 퇴직했을 때 자신을 도울 기금을 낸다. 그렇지만 이 기금은 최소한의 생계에 필요한 것 이상을 제공하도록 마련되지는 않았다. 거의 50년 이상을 쉴 새 없이 일한 노동자가 인생의 말기에 가능하다면 편안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분명히 바람직하다. - 80쪽



☑ 지은이 소개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1858)

일곱 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난 오언은 열 살 때부터 런던의 방직공장에서 도제로 일했다. 도제로 일하기 전에 학교를 다닌 것을 제외하면 교육을 받지 못했던 오언은,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쌓은 뒤에 맨체스터대학교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에 관심을 쏟았다. 결혼 후 장인에게서 뉴래너크의 방직공장을 인수해서 지배인이 되었고, 이곳이 바로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에서 얘기된 실험의 주요한 무대가 된다. 이 책을 집필하기 한 해 전 <뉴래너크 시설에 관한 주장>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해 산업사회에서 자신의 실험이 가진 진보적인 의미를 강조했다. 어린아이의 성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핵심 시설인 ‘새로운 시설(new institution)’을 만들어서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이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했다. 세계 최초의 유치원으로 알려진 이 시설은 무료로 운영되었고 그 비용은 공장의 협동조합을 통해 마련되었다.

1817년에 오언은 <빈곤을 줄이기 위한 사회주의적 계획(Plans for alleviating poverty through Socialism)>을 발표해 자신의 구상을 사회주의와 연관시켰다. 그는 인간의 단결과 상호 협동을 기초로 한 공동체들이 늘어날 때 세상도 자연스럽게 변화되리라 믿었다. 오언은 자신의 구상을 뉴래너크만이 아니라 영국 전체로 확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의치 않자 미국의 인디애나 주 뉴하모니에 공동체를 세웠다. 하지만 이 공동체들은 2년을 넘기지 못했고, 오언은 다시 실패를 경험한 후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으로 돌아온 오언이 벌였던 운동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1832년부터 시작한 공정한 노동교환제도다. 오언은 전국공정노동교환소(National Equitable Labor Exchange)를 설립하고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제도는 각자가 일한 기록만으로 직접 필요한 재화나 서비스를 장만하도록 해서 중간 유통 과정을 없앴고, 협동 노동으로 노동자의 자주성을 기르고 협동 사회를 실현하려 했다.

오언이 죽은 뒤에도 뉴래너크는 계속 유지되었고, 1975년에는 뉴래너크 보존 트러스트가 만들어져 대부분의 건물을 잘 보존하고 있다. 2001년에는 유네스코가 이 지역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 옮긴이 소개

하승우

경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경희대 정치학과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 논문으로 <마르쿠제(Herbert Marcuse)의 모더니티 비판>을, 박사 논문으로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재구성한 <풀뿌리공론장에 관한 이론적 고찰>을 썼다. 현재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비판이론과 풀뿌리민주주의, 아나키즘, 시민사회이론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2007년 문학평론가 이명원, 오창은과 함께 <지행네트워크>를 만들어 인문사회과학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고 있다. 저서로는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참여를 넘어서는 직접행동≫,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가 있으며, 역서로는 ≪아나키스트의 초상≫(폴 애브리치), ≪리바이어던≫(토머스 홉스)이 있다. 그 외에 <공론장에서의 말과 행위에 관한 연구>, <정부의 주민투표제도 악용과 시민사회의 역할>, <한국의 지역사회와 새로운 변화 전략의 필요성>, <항일운동에서 ‘구성된’ 아나코 코뮨주의와 아나키즘 해석 경향에 대한 재고찰>, <한국 풀뿌리민주주의의 사상적 기원에 관한 고찰>, <풀뿌리민주주의, 엘리트민주주의에 도전하다>와 같은 논문들을 썼다.



☑ 목차

해설
지은이에 대해
제1에세이
제2에세이
제3에세이
제4에세이
옮긴이에 대해

2012년 2월 15일 수요일

삼봉집


이 책은 정도전이 평생에 걸쳐 쓴 글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부, 오언 및 칠언 고시, 율시, 악장, 소, 서, 기, 제문 등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글들을 맛볼 수 있다. 정도전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라는 격변의 시기를 살았고, 그 시대의 역사를 만들어간 사람이다. 정도전 개인이나 그가 살았던 한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건국과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라고 할 수 있다.



☑ 책 소개

이 책의 전래

≪삼봉집≫은 몇 차례 간행되었다. 최초의 간행은 정도전이 살아 있을 때인 1397년에 이루어졌는데, 아들 정진이 정도전이 가지고 있던 원고만을 모아 성석린·권근의 도움을 받아 두 권의 ≪삼봉집≫으로 간행했다. 권근이 서문을 썼다. 하지만 이 문집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후 증손자 정문형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기존의 ≪삼봉집≫에다 <경제문감>·<조선경국전>·<불씨잡변> 등을 더하여 1464년 안동부에서 목판본으로 중간했다. 중간본의 서문은 신숙주가 썼다. 이어 1467년 정문형이 강원도관찰사로 있을 때 <경제문감별집> 등을 추가했으며, 1791년 국왕의 명령에 의해 규장각에서 다시 편집하고 교정을 보아 대구에서 간행했다. 모두 14권 7책이다.

이 책의 구성

권1과 2는 부(賦), 오언 및 칠언고시(七言古詩), 육언 및 칠언절구(七言絶句), 율시(律詩), 사(詞), 악장(樂章) 등 지금의 형식으로 보아 시(詩)에 해당되는 글들을 모아놓았다. 권3은 소(疏), 전(箋), 서(書), 계(啓), 서(序), 권4는 기(記), 설(說), 제발(題跋), 전(傳), 행장(行狀), 묘표(墓表), 제문(祭文), 책제(策題), 명(銘), 찬(贊)으로, 문장 형식의 글들이다. 권5와 6은 <경제문감>, 권7과 8은 <조선경국전>, 권9는 <불씨잡변>, 권10은 <심기리편(心氣理篇)>, 권11과 12는 <경제문감별집>, 권13은 진법(陣法)과 습유(拾遺)이며 권14는 부록이다. 이 책에서는 11권과 12권의 <경제문감별집> 상·하에 수록된 글은 모두 빠졌다.

이 책의 내용

악장과 같이 조선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글도 있으나, 당시 사회의 실상과 그에 대한 통찰이 엿보이는 글이 많다. 특히 정도전이 유배에 처해졌던 불우한 시기에 지어진 시문들은 고려 말의 사회 상황과 이에 따라 파생된 당시 사회문제를 엿볼 수 있게 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정도전의 사회의식도 녹아들어 있다. 이러한 점은 당대의 어떤 학자나 관료들도 따라올 수 없었던 점이며, 정도전이 새로운 국가체제를 구상하게 한 힘이 되었을 것이다.


☑ 책 속으로

下民至弱也 不可以力劫之也 至愚也 不可以智欺之也 得其心則服之 不得其心則去之 去就之間 不容毫髮焉 然所謂得其心者 非以私意苟且而爲之也 非以違道干譽而致之也 亦曰仁而已矣

땅에 사는 백성들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써 위협할 수 없으며,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혜로써 속일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복종하게 되고,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떠나갑니다. 떠나가거나 쫓아오는 간격은 털끝만큼의 차이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그들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사사로운 뜻을 가지고서 구차하게 얻는다는 것이 아니며, 도리를 어기고 명예를 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역시 “오직 어짊으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지은이 소개

정도전(鄭道傳, 1342∼1398)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는 데 누가 가장 많이 기여했는가를 이야기한다면 여러 사람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가체제의 기틀을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 한 명만을 꼽으라면 정도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전은 몽골의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하던 1342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쪽은 대대로 경상도 봉화의 향리 집안이었다. 당시 봉화는 안동부의 속현이었고, 따라서 가세는 매우 약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 우씨는 혈통에 하자가 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이 점은 죽어서까지 정도전을 괴롭히는 약점이 되었다. 정도전의 호 삼봉은 어머니의 고향인 단양의 도담삼봉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정도전은 아버지가 이곡과 친했기 때문에, 15세에 이곡의 아들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었다.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이제현으로부터 이곡, 이색으로 이어지는 고려 말 당시 최고 수준의 성리학 학통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1360년 성균시에 합격했고, 1362년 문과에 진사로 급제해, 다음 해 충주사록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1366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거푸 돌아가자, 영주로 내려가 삼년상을 지냈다. 1370년 성균관이 다시 만들어지고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성균박사에 기용되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권력을 잡은 이인임 등은 친원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정도전은 앞장서서 반대했고, 결국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 거평부곡으로 유배되었다. 여기서 농민의 생활상과 지방의 열악한 실정을 직접 체험하고 많은 것을 생각했던 것 같다.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영주로 갔다가 지금의 서울 삼각산 밑에 초가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곳 출신 재상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집을 허물어버렸다. 다시 부평으로 갔으나 그곳의 집마저 다른 재상이 허물어버렸다. 1383년 정도전은 함주로 이성계를 찾아갔다. 당시 이성계는 왜구들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면서 떠오르는 장군이었으나, 고려 중앙정부와는 특별한 연고가 없는 인물이었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선택해 찾아간 것은 고려라는 나라를 어떻게 해야 될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이 정리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9년 뒤 역성혁명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을 잡자 정도전은 밀직부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조준·윤소종 등과 함께 토지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농업 생산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당시에 이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문제였으며,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였다. 고려는 정치·사회적으로 격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창왕이 옹립되었다가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곧 폐위되고 공양왕이 옹립되었다. 정도전은 공양왕 옹립에 대한 공으로 봉화현충의군 봉해지고 공신 칭호를 받았다. 이러한 정치적 격변, 토지제도의 개혁은 결국 고려의 사회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넘어, 새로운 왕조를 건립할 것인가 아니면 고려 국가를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었다. 이를 둘러싼 대립 세력 간의 공격이 계속되었으며, 1391년 정도전은 탄핵당해 유배되었다. 다음 해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출신 문제 등으로 다시 탄핵당해 체포되었다. 하지만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써 이성계 일파가 권력을 잡게 되고 정도전도 풀려났다.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정도전은 개국 일등 공신에 책봉되었고, 문하시랑찬성사 등의 요직을 맡았다. 조준·남은 등과 더불어 조선왕조의 국정을 총괄하는 위치에 올랐으며, 동시에 저술을 통해 조선왕조의 국정 이념과 국가체제의 틀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국가의 모습으로 조선왕조를 개혁하려 했다. 1396년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정도전은 명나라에 의해 이러한 사태를 불러일으킨 주범으로 인식되었다. 결국 그는 병을 이유로 현직에서 물러났고, 요동 정벌 계획을 더욱 구체화하고 이를 태조에게 건의했다. 다음 해 정도전은 정계에 복귀하여 동북면 일대의 성곽을 순찰하고 지방 제도를 정비했다. 하지만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의 와중에 이방원 일파에게 살해당했다.


☑ 옮긴이 소개

박진훈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연세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해 박사 과정까지 마쳤다. 학위논문은 <여말 선초 노비정책 연구>다. 연세대, 국민대, 한국외대, 가톨릭대, 대림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국민대 한국학연구소의 전임연구원을 지냈다. 현재 명지대 사학과에 재직 중이다. 한국 중세 사회경제사를 비롯하여, 생활사, 법제사 등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 차례

해설 ·······················7
지은이에 대해 ··················10
권1 ·······················15
권2 ·······················35
권3 ·······················49
권4 ·······················61
권5 ·······················93
권6 ······················105
권7 ······················117
권8 ······················175
권9 ······················207
권10 ······················221
권13 ······················225
옮긴이에 대해 ··················235

2011년 6월 9일 목요일

중국학 개론 國學槪論

유가와 공맹에 
포박되지 않은 중국

청말의 대학자 장타이옌은 중국 근대의 시대정신을 대표한다.
공자와 유학을 제자백가의 한 갈래로 한정한 뒤 언어와 제도와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중국 정신을 재정립한다.
원제는 <<국학개론>>, 국내 초역.










청말과 민초 시기의 혁명가이자 저명한 국학대사 장타이옌의 강연록. 장타이옌의 독특하고 풍부한 견해와 함께 중국 전통 학문인 경학, 철학, 문학의 역사 내용이 체계적으로 전개되어 있다. 장타이옌이 인식한 국학의 가치와 그 연구의 의의를 이해해 볼 수 있다.

이 책은 ≪국학 개론(國學槪論)≫을 완역한 것으로, 옮긴이는 우리말 서명을 ≪중국학 개론≫으로 바꾸었다. ≪국학 개론≫은 청말(淸末)과 민초(民初)의 저명한 학자 장타이옌의 강연록으로, 1922년 4월에서 6월까지 장타이옌이 상하이에서 개최한 국학 강연을 당시 청강자였던 차오쥐런(曹聚仁)이 채록해 단행본으로 낸 것이다. ≪국학 개론≫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대중에게 호응을 받자, 그의 청강생들은 강연에 대한 자신의 독자적인 의견의 개진을 통해 장타이옌의 강연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부록(附錄)으로 실었다.

청말 민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장타이옌의 혁명 정신
장타이옌의 국학 강연 정신은 구국과 항일(抗日)을 외치는 혁명가 정신의 연장이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국학 개념의 형성은 청말 민초라는 혁명과 격동의 시대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장타이옌은 혁명가로서의 저항과 투옥, 망명 생활 외에도 반청(反淸) 운동 이후 등장한 신해혁명의 실패 및 반위안(反袁) 운동과 그 좌절 등을 겪었다. 그리고 그의 강학은 새로운 형태의 혁명운동의 모색 속에서 시작된 것이다. 투옥 생활 중 결국 중병을 얻고 고향인 항저우로 낙향한 장타이옌에게 시대는 국학 연구를 통한 혁명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겨 주었던 것이다. 1920년 이후 ≪국학 개론≫을 필두로 장타이옌은 “국학 강학”이라는 공개 강연을 통해서 ‘혁명 시대’와는 다른 ‘강학 시대’라는 새로운 차원의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국학 개론≫은 상하이에서 개최한 정기적인 강학회의 강연에 해당한다. 장타이옌에게 국학 연구와 국학 강연 활동이란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애국 계몽운동의 연속으로 혁명과 항일 등의 시대정신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장타이옌이 인식한 국학의 의미와 그 범주
강학 운동 이전부터 그는 원래 신해혁명의 선봉장인 동시에 문사철(文史哲)에 정통한 저명한 학자였다. 그가 주장하는 국학이란 서방의 서학(西學)과 병존해 화이부동(和而不同)하며 근대 시기로 전형(轉形)하는 학문의 독자적 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장타이옌이 주장한 국학의 범주는 유가 전통을 강조하는 공교(孔敎)의 범주와는 무관하다. 그는 국학은 절대로 유학(儒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고, 유학은 제자학 중 하나로서 기타 학설과의 비교를 통해 객관적인 비판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역사는 넓은 의미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언어 문자고, 둘째는 문물제도고, 셋째는 인물과 사건이다”라고 했다. 일본에서 진행된 국학 강습회(國學講習會)에서 그의 첫 번째 강연 내용은 ‘언어 문자학’, 두 번째 강연 내용은 ‘문학’, 세 번째 강연 내용은 ‘제자학(諸子學)’으로 구성되었다. ≪국학 개론≫에 경학(經學), 철학, 문학에 대한 강연 내용이 있고, 도쿄에서 강연한 내용을 수록한 ≪국고 논형(國故論衡)≫이 소학(小學), 문학, 제자학으로 구성된 점 역시 이러한 관점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국학 개론≫의 구성과 내용 소개
≪국학 개론≫은 모두 열 차례의 강연을 수록한 강연록으로, ‘개론(槪論)’, ‘경학’, ‘철학’, ‘문학’, ‘국학의 진보’ 등 다섯 개 분야로 이루어졌다.
제1장은 ‘개론’에 해당하고, 장타이옌은 ≪국학 개론≫의 내용을 두 가지로 분류했는데, 첫째는 ‘경학의 본질’이고 둘째는 ‘국학의 연구 방법’이다. 경사(經史)에는 비록 약간의 신화적인 내용이 수록되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궤변적이거나 신비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제자백가에서도 결코 종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고 도덕과 철학에 대한 내용들을 다루었다고 했으며, 중국은 고래(古來)로 종교 사상이 희박했지만 대신에 정치(政治)를 중시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국학의 연구 방법’에 대해서 그는 고대 서적의 진위 판별을 가장 중시했으며, 소학(小學)의 전통을 강조하면서 음운(音韻), 훈고(訓詁), 문자(文字)에 능통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제2장은 경학 학파에 대한 내용이다. 장타이옌은 “육경개사(六經皆史)”라는 관점을 신봉했다. 그리고 한대(漢代)에 금문경(今文經)과 고문경(古文經)의 학파가 출현한 배경과, 동한(東漢) 이후 청대(淸代)에 이르기까지의 경학(經學)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설명했다.
제3장은 철학 학파에 대한 내용이다. 장타이옌은 선진 시기의 제자백가를 상세하게 분석했고, 진한 이후의 철학 발전에 관한 설명에 비교적 많은 부분을 할애했지만 불학(佛學)에 대해서는 생략했다.
제4장은 문학 학파에 대한 내용이다. 장타이옌은 죽서(竹書), 백서(帛書)를 일컬어 “문(文)”이라 했고, 이를 낮추어 부르는 이름이 “문학(文學)”이라고 했다. 그리고 서한(西漢) 이래의 문학 학파에 대해서 상세히 언급했다. 또한 운문(韻文)이 모두 시는 아니라면서 백화 시(白話詩)를 혹평하기도 했다.
제5장은 국학의 진보에 대한 내용이다. 그는 국학의 진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경학은 지식 원형의 비교를 통해, 철학은 직관(直觀)과 자득(自得)을 통해, 문학은 정서적인 감흥(感興)을 통해서 진보를 도모한다고 했다.


☑ 책 속으로

국학의 진보를 세 가지 방면에서 구할 수가 있다고 보았다.

(1) 경학(經學): 지식(知識)의 원형(原形)을 비교해 진보를 도모.
(2) 철학(哲學): 직관(直觀)의 자득(自得)을 통해서 진보를 도모.
(3) 문학(文學): 정서(情緖)의 감흥(感興)을 통해서 진보를 도모.

우리는 서방 문화를 합리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배후에는 국학이 있다는 점에 착안해, 이런 두 가지 문화가 결국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를 충분히 고려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우리가 국학이 갖고 있는 고유한 속성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서구 학문과 우리의 국학을 결합할 수가 있겠는가? 때문에 먼저 국학을 연구한 다음에야 비로소 소통의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 지은이 소개

장타이옌(章太炎, 1869∼1936)

장타이옌의 본명은 장빙린(章炳麟)이고 자(字)는 메이수(枚叔)며 타이옌(太炎)은 호(號)다. 그는 중국 저장성(浙江省)의 위항(余杭) 출신으로 민국 초기의 민주 혁명가며 사상가이자 저명한 국학사(國學史) 연구자다. 그의 연구 분야는 소학(小學)과 역사, 철학, 정치 등으로, 이에 대한 다수의 저술이 있다.

장타이옌은 조부의 반청(反淸) 반만(反滿)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고, 22세에 항저우에 있는 고경정사에 입학해 유가 경전과 제자백가를 수학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캉유웨이·량치차오와 서신으로 교류했고, 1897년 상하이에서 ≪시무보≫ 주편(主編)을 맡으면서 유신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1900년에 변발을 자르고 혁명의 뜻을 세웠다. 1903년 <캉유웨이가 논한 혁명을 반박하는 글>이란 글과 쩌우룽(鄒容)의 ≪혁명군(革命軍)≫의 서문을 썼다가 청조(淸朝)에 의해 투옥되기도 했다. 장타이옌은 1906년에 출옥해 일본으로 건너가 쑨원과 함께 동맹회(同盟會)에 참여해 ≪민보≫를 편집하고 집필했다. 장타이옌은 신해혁명 뒤인 1912년 상하이 쑨원 총통부의 추밀고문(樞密顧問)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이후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의 총통이 되자 그에 대한 토벌 운동을 주장하다 가택에 연금(軟禁)되기도 했다. 그는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자 연금에서 풀려났고, 이듬해 쑨원이 광저우(廣州)에 새로 수립한 혁명 정부에 가담했지만 결국 의견의 차이와 건강상의 이유로 국민당을 탈당하게 되고, 1918년 이후에는 정계에서 은퇴했다. 정계 은퇴 이후 장타이옌은 학문 연구와 강학 활동에 전념하면서 만년에 국학대사(國學大師)라는 칭호를 얻으며 강학을 통해 항일과 애국적 구국 운동을 전개했다.

장타이옌의 학문은 시대적 변화와 함께 다양한 시도와 변모를 모색했다. 그는 초기에 서방의 기계적인 유물론과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서 서양의 철학과 사회학, 자연과학 등의 신(新)사상을 대변하며 관련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술인 ≪구서(訄書)≫에서 숙명론과 천명론을 부정했고, 또한 불교의 유식종(唯識宗)과 서방의 근대 유심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신해혁명의 실패 이후에 그의 사상은 점차 침체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루쉰이 장타이옌을 소개할 때 첫째로 혁명가고 둘째로 대학자로 언급한 점이 이를 대변한다. 장타이옌은 비록 국수(國粹)를 주장했지만 모든 권위와 구속을 반대했다. 다른 한편으로 강렬한 도덕주의자로서 도덕의 역량을 강조하면서도 개인에 대한 사회적 폭압을 반대하며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를 옹호하기도 했다.

장타이옌은 문학, 역사학, 언어학 등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고 그의 혁명적인 문장은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지금도 그의 문언체 문장은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저술한 ≪신방언(新方言)≫과 ≪문시(文始)≫, ≪소학 답문(小學答問)≫ 등의 내용은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널리 애독되고 있다. 그의 저술로는 ≪장씨 총서(章氏叢書)≫(1915), ≪장씨 총서 속편(章氏叢書續編≫(1933), ≪장씨 총서 삼편(章氏叢書三編)≫(1939), ≪장타이옌 전집(章太炎全集)≫(1994) 등이 있다.


☑ 옮긴이 소개


조영래
조영래(趙永來)는 중국 고대사에 관심을 두고 있는 연구자로서 경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의 베이징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중국 고대사를 전공했다. <북조(北朝) 시기 잡호(雜戶)의 연구>로 석사 학위를, <북위(北魏) 탁발(拓跋) 통치 집단의 형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베이징수도사범대학교 역사학과 객원교수를 거쳐서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Humanitas College)의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 고대사 가운데 특히 진한(秦漢)과 위진남북조사(魏晉南北朝史)의 통치 집단의 형성과 민족 문제에 관심을 두고 북방 민족의 정권 수립과 지역화 과정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아울러 선진(先秦) 시기의 제자백가의 사상과 목록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특히 역사 문헌학적인 지식을 근간으로 역사 문헌의 체계적인 분류와 문헌 사료의 효율적인 이해와 활용에 관한 문제에 관해서도 관심을 두고 있다. <16국 시기 호군제(護軍制) 연구−호한 분치(胡漢分治)를 중심으로>, <盛樂及代北地區與拓拔鮮卑的建國>, <중국 소수민족 정책과 민족 간부 양성>, <‘신중화주의’ 속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사부(史部)의 분류 체계에 관한 기원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 목차

해설
지은이에 대해

머리말
제1장 개론
제2장 국학의 분류(1)−경학의 유파
제3장 국학의 분류(2)−철학의 유파
제4장 국학의 분류(3)−문학의 유파
제5장 결론−국학의 진보
부록

옮긴이에 대해

2011년 2월 26일 토요일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 A New View of Society

세계 최초의 유치원과 세계 최초의 생활협동조합을 만든 로버트 오언의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이 나왔다. 오언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모든 사회적 관계를 파괴한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고 만들었다. 오언이 강조했던 새로운 교육의 필요성과 협동조합 운동의 중요성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도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져온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는 다시 일하는 사람들을 빈곤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교육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소수를 선발하는 비합리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무엇이 이런 극단적인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 책은 하나의 좋은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지은이에 대해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은 1771년 5월 14일 영국 웨일스(Wales)의 몽고메리 주(Montgomeryshire) 뉴타운에서 태어났다. 일곱 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난 오언은 10살 때부터 런던의 방직공장에서 도제로 일하며 일찍 세상에 눈을 떴다. 그 뒤 오언은 섬유와 관련된 각종 일거리들을 체험하면서 직물을 관리하고 다루는 방법, 재고를 기록하고 장부를 작성하는 법, 다양한 고객들을 상대하는 법 등을 배우며 십대를 보냈다.

열심히 노력한 덕분인지 불과 19살의 나이로 오언은 존 존스와 함께 방직기계 제조 공장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22살이 되던 1792년 4월에는 맨체스터(Manchester)에 있던 대규모 방직공장의 지배인이 되었다. 약 500명의 직공을 관리하던 오언은 제품의 질을 개량하고 작업 공정을 합리화시켜 영국 최고의 공장으로 만들었다.

도제로 일하기 전에 학교를 다닌 것을 제외하면 교육을 받지 못했던 오언은 이렇게 사회적 지위를 쌓은 뒤에 맨체스터대학교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에 관심을 쏟기도 했다.
그러던 중 글래스고에서 만난 캐롤라인 데일(Caroline Dale)과 1799년 결혼하고 장인인 데이비드 데일에게서 뉴래너크의 방직공장을 인수해서 지배인이 되었다. 1813년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에서 얘기된 내용은 이 뉴래너크의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오언은 1812년 <뉴래너크 시설에 관한 주장>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했고 산업사회에서 자신의 실험이 가진 진보적인 의미를 강조했다. 1816년에는 어린아이의 성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핵심 시설인 ‘새로운 시설(new institution)’을 실제로 만들어서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이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했다(세계 최초의 유치원으로 알려진 이 시설은 무료로 운영되었고 그 비용은 공장의 협동조합을 통해 마련되었다). 이런 다양한 실험으로 뉴래너크는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뉴래너크를 방문했다.

1817년에 오언은 <빈곤을 줄이기 위한 사회주의적 계획(Plans for alleviating poverty through Socialism)>을 발표해 자신의 구상을 사회주의와 연관시켰다. 오언은 이 글에서 인간 노동력과 기계가 경쟁하는 것이 영원한 고통의 원인이고 그것을 치료할 것이 바로 인간의 단결과 상호 협동이라고 주장했다. 오언은 이런 공동체의 공간적인 배치도 세심하게 설계했는데, 공동체는 1000∼1500에이커의 땅에 12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생활해야 하고 공동 부엌과 식당 등을 갖춰야 했다.

오언은 이런 공동체들이 늘어날 때 세상도 자연스럽게 변화되리라 믿었다. 오언은 화폐로 계산되는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가들을 비판하면서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협동조합으로 노동자들의 복지를 증진시키려 했다.

오언은 자신의 구상을 뉴래너크만이 아니라 영국 전체로 확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총리를 비롯한 정부의 주요 지도자들과 얘기를 나눴고 영국 정부나 래너크 지방정부에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했지만 오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뉴래너크에서의 실험은 큰 성공을 거뒀지만 경제적인 이익을 고려하거나 종교 교육을 강요하는 동업자들은 오언의 계획을 방해했다.

결국 오언은 뉴래너크를 잠시 떠나 미국으로 향했고 1826년에 미국의 인디애나 주 뉴하모니(New Harmony)에 공동체를 세웠다. 하지만 이 공동체들은 2년을 넘기지 못했고, 오언은 다시 실패를 경험했다. 하지만 오언은 결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1829년 다른 동업자들과의 갈등 때문에 오언은 뉴하모니와 완전히 관계를 끊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오언은 주로 런던에서 활동했다. 오언은 대부분의 재산을 미국의 공동체 실험에 사용했기 때문에 부자가 아니었고, 그래서 실제 실험보다 사회주의와 세속주의가 결합된 자신의 이상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다.

이 당시 오언이 벌였던 운동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1832년부터 시작한 공정한 노동교환제도다. 오언은 전국공정노동교환소(National Equitable Labor Exchange)를 설립하고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제도는 각자가 일한 기록만으로 직접 필요한 재화나 서비스를 장만하도록 해서 중간 유통 과정을 없앴고, 협동 노동으로 노동자의 자주성을 기르고 협동 사회를 실현하려 했다. 하지만 런던의 교환제도는 1833년까지 유지되었고, 버밍엄의 지부는 1833년 7월 이후 몇 달 동안만 유지되었다.

1835년부터 오언은 ‘모든 국가의 모든 계급들의 연합’을 얘기하기 위해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오언은 노동계급 사이에서 영향력을 얻었고 오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퀸우드(Queenwood), 랠러하인(Ralahine), 클레어(Clare), 타이덜리(Tytherly)에서 공동체 실험을 벌였다. 이 공동체들은 잠깐 동안 큰 성공을 거뒀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 뒤에도 오언은 소책자와 대중 강연, 잡지 등에서 자신의 생각을 열정적으로 펼쳤고 점점 유심론(Spiritualism)에 빠졌다. 1858년 11월 17일 오언은 자신의 고향에서 숨을 거뒀다.
오언이 죽은 뒤에도 뉴래너크는 계속 유지되었고, 1975년에는 뉴래너크 보존 트러스트가 만들어져 대부분의 건물을 잘 보존하고 있다. 2001년에는 유네스코가 이 지역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오언의 아들인 로버트 데일 오언(Robert Dale Owen)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미국에서 부의 균등한 분배와 산업교육의 확대를 주장했다. 인디애나 주 주의원, 연방정부 하원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데일 오언은 남북전쟁이 터지자 링컨 대통령에게 노예제도를 폐지하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옮긴이에 대해 

하승우는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 배정고등학교, 경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경희대 정치학과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 논문으로 <마르쿠제(Herbert Marcuse)의 모더니티 비판>을, 박사 논문으로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재구성한 <풀뿌리공론장에 관한 이론적 고찰>을 썼다. 비판이론과 풀뿌리민주주의, 아나키즘, 시민사회이론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대학 시절부터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졌고 대학원을 다니면서부터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을 전공했다(뭔가 기성사회에 불만이 많았던 게다). 그리고 2001년 시민자치정책센터(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와의 만남은 한국 사회의 풀뿌리 운동을 이해하고 이론을 현실에 적용할 기회를 줬다(너무 소중한 인연이다). 또 박사 논문을 쓰고 난 후인 2006년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에 연구교수로 들어가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공부하며 쌓은 빚을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하도록 도와줬다]. 그리고 2007년 문학평론가 이명원, 오창은과 함께 <지행네트워크>를 만들어 인문사회과학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고 있다(공생공락의 삶을 체험하는 소중한 인연이다).
이론적이고 현실적인 관심은 이런 관계와 만남을 통해 성장했다. 이런 성장의 결과물들을 모아 ≪희망의 사회윤리 똘레랑스≫, ≪참여를 넘어서는 직접행동≫,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라는 책으로 묶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의 초상≫(폴 애브리치), ≪리바이어던≫(토머스 홉스)을 우리말로 옮겼다. 그 외에 <공론장에서의 말과 행위에 관한 연구>, <정부의 주민투표제도 악용과 시민사회의 역할>, <한국의 지역사회와 새로운 변화 전략의 필요성>, <항일운동에서 ‘구성된’ 아나코 코뮨주의와 아나키즘 해석 경향에 대한 재고찰>, <한국 풀뿌리민주주의의 사상적 기원에 관한 고찰>, <풀뿌리민주주의, 엘리트민주주의에 도전하다>와 같은 논문들을 썼다.


차례

해설 ·····················7
지은이에 대해 ················17

제1에세이 ··················25
제2에세이 ··················30
제3에세이 ··················45
제4에세이 ··················87

옮긴이에 대해 ················138


책 속으로

These plans must be devised to train children from their earliest infancy in good habits of every description which will of course prevent them from acquiring those of falsehood and deception. They must afterwards be rationally educated, and their labour be usefully directed. Such habits and education will impress them with an active and ardent desire to promote the happiness of every individual, and that without the shadow of exceptions for sect, or party, or country, or climate. They will also ensure, with the fewest possible exceptions, health, strength, and vigour of body; for the happiness of man can be erected only on the foundations of health of body and peace of mind.

이런 계획들은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모든 종류의 좋은 습관(당연히 이 습관은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사람들을 속이는 습관을 몸에 익히지 않도록 막을 것이다)을 익히도록 고안되어야만 한다. 그 뒤에도 아이들은 합리적으로 교육을 받아야만 하고 그 노동력은 유용하게 지도되어야 한다. 그런 습관과 교육은 사람들이 능동적이고 정열적인 욕망을 품고 모든 개인의 행복을 늘리도록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종파나 정파, 국가나 풍토 때문에 배제되는 일이 조금도 없을 것이다. 이런 습관과 교육은 거의 아무런 예외도 없이 건강하고 활기차며 생기 있는 육체를 보증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복은 육체의 건강함과 마음의 평온함에 의지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11년 2월 18일 금요일

제국과 커뮤니케이션 Empire and Communications

해럴드 이니스 Harold A. Innis (캐나다, 1894-1952)

해럴드 이니스는 1894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토론토 대학 정치경제학부 교수가 되었다. 그의 초기 연구는 캐나다 문화와 경제가 모피, 어류, 목재, 밀, 광물, 연료 같은 원자재의 개발과 수출입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정치경제사를 전공한 그가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토론토 대학 동료 매클루언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그 후 이니스는 커뮤니케이션 미디어가 사회 형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했고, 그 연구 성과는 잇달아 나온 ≪제국과 커뮤니케이션(Empire and Communications)≫, ≪커뮤니케이션 편향(The Bias of Communication)≫ 두 권의 주저로 집약되었다.

이니스는 캐나다인으로서의 관점이 분명한 사회과학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대학들이 캐나다와는 역사와 문화가 다른 영국이나 미국에서 교육받은 교수들에게 계속 의존하지 않도록 캐나다 학자들 중심의 학회와 재단을 설립했다. 특히 그는 대학이 정치적․경제적 압력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데 힘썼다. 그는 비판적 사고의 중심으로서 ‘독립적인’ 대학이 권력 지향적이고 광고 의존적인 미디어에 의해 훼손된 서구 문명의 존립에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그는 1952년 암으로 사망했다.

주요 논문 및 저서로는 ≪A History of the Canadian Pacific Railway≫(1923), ≪The Fur Trade in Canada: An Introduction to Canadian Economic History≫(1930), ≪The Cod Fisheries: The History of an International Economy≫(1940), ≪Political Economy in the Modern State(1946), Empire and Communications≫(1950), ≪The Bias of Communication(1951), Changing Concepts of Time≫(1952)이 있다.


해설          

이 책은 해럴드 이니스의 ≪Empire and Communications≫(Oxford, 1950)를 저본으로 번역하고, 2008년 1월에 완역으로 출간한 ≪제국과 커뮤니케이션≫(커뮤니케이션북스)을 토대로 2분의 1정도를 발췌한 것입니다.

캐나다 출신 경제사학자 해럴드 이니스는 맥매스터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토론토 대학 정치경제학부 교수가 되었다. 그의 초기 연구는 캐나다 문화와 경제가 모피, 어류, 목재, 밀, 광물, 연료 같은 원자재의 개발과 수출입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그가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토론토 대학 동료인 마셜 매클루언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1950년 출간된 ≪Empire and Communications≫는 이니스의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첫 번째 성과이며, 이듬해 이를 이론적으로 정리한 ≪The Bias of Communication≫이 출간되었다.

≪제국과 커뮤니케이션≫은 많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제국 형성과 문화 발전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역할을 탐구한다. 그러나 단순히 미디어에 의해 역사가 결정된다는 단선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니스는 정보나 지식을 통제하는 방식과 그 지배적 방식의 변화에 대응하는 태도, 매체를 통해 재편된 지식 독점 양상의 결과가 제국의 흥망성쇠의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문명의 몰락과 존속은 특정 매체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기보다 변화하는 매체 환경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상황을 그 문명이 어떻게 수용하고 대응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매체는 ‘역동적인 과정’이며 이 움직임 가운데 어떤 것의 ‘궁극적인 원인’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의 관계성, 무거운 매체와 가벼운 매체의 대조는 ≪제국과 커뮤니케이션≫의 주요 패턴이다. 이니스는 서양 문명사를 시간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매체와 공간의 ‘이동성’을 강조하는 매체의 충돌과 경쟁 속에서 변화해 왔다고 보았다. 매체 형식과 사회 현실이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특정 매체가 지배하는 ‘편향’이 일어난다. 편향은 매체의 물리적 속성뿐 아니라 매체를 전유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관계망의 양상, 그리고 가치 체계를 함축하는 것이다.

오늘날 ‘지구촌’이라는 ‘제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이라는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통해 가능했다. 인터넷은 이니스가 말한 시간 편향과 공간 편향을 극복하고 실시간성과 동시성, 편재성을 획득한 것이다. 해설을 쓰고 있는 이 시간, 광화문에서는 양손에 각각 촛불과 핸드폰을 든 시민들이 광장 아고라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한’ 마흔여섯 번째 촛불 집회를 하고 있다. 집회 참여자 모두는 촛불 시위 현장의 기자고 사진사이며 디자이너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고 광장 아고라에 모여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전통을 만들어내고 있다.

‘평범한 사람의 것이라도 목소리는 비범한 사람의 글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니스는 구술 전통의 생명력의 회복을 바랐다. ≪제국과 커뮤니케이션≫과 ≪커뮤니케이션 편향≫ 출간 이후 반세기 동안 매체 환경은 급변했다. 20세기에 독점적 권력을 소유한 신문과 방송은 인터넷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합리적인 정치 형식으로 여겼던 대의민주주의가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로 상쇄되고 있음을 목도한다. 개개인의 느슨한 연대를 통한 공동체의 탄생, 새로운 정치 세력의 출현, 이는 정치사회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뉴스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 또한 허물어지고 있다.

매클루언이 ‘지구촌’이나 ‘미디어는 메시지다’와 같은 아이디어를 만들어낸 것은 이니스의 영향이 컸다. 매클루언은 이니스의 커뮤니케이션 연구 개척에, 이니스는 그의 저작을 요약하고, 종합하고, 대중화한 매클루언의 능력에 서로 빚을 졌다. 그렇지만 매클루언이 조명되고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데 비해 이니스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국내 연구는 부진한 형편이다. 이는 이니스의 국내 번역서가 없던 탓이 클 것이다. 오늘날 개인의 목소리, 분권화된 매체 환경에 조응하는 이니스의 빛나는 통찰이 ≪제국과 커뮤니케이션≫의 번역 출간과 함께 활발하게 조명되기를 기대한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제국과 커뮤니케이션
머리말
이집트
바빌로니아
구술 전통과 그리스 문명
문자 전통과 로마 제국
양피지와 종이
종이와 인쇄기

옮긴이에 대해


본문중에서    

Large-scale political organizations such as empires must be considered from the standpoint of two dimensions, those of space and time. Empires persist by overcoming the bias of media which overemphasizes either dimension. They have tended to flourish under conditions in which civilization is offset by the bias of another medium towards centralization.

제국 같은 거대 정치 조직은 시간과 공간 두 차원의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제국은 두 차원 중 어느 하나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매체 편향을 극복함으로써 존속된다. 제국이 번영하는 경향을 보인 것은 문명이 한 가지 이상의 매체의 영향력을 반영하고, 지방분권 지향의 매체 편향이 중앙집권 지향의 매체 편향으로 상쇄되는 조건에서였다.


출판사 서평  

제국의 흥망성쇠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발달을 논리적으로 연결한 이니스의 이론이 흥미롭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대규모 상업 활동이 시작되면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많이 필요했다. 따라서 읽고 쓰는 수고를 덜기 위해 복잡하고 어려운 언어들이 점차 간소화되고 체계화되었다. 이처럼 수많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제국 형성과 문화 발전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역할이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지 탐구하고 있다.


옮긴이        

김문정은 이화여자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신문방송학과를 수료했다. 옮긴 책으로는 ≪제국과 커뮤니케이션≫(커뮤니케이션북스)이 있다.

2011년 2월 15일 화요일

유토피아 Utopia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이상에 대한 꿈꾸기"

500년 전에 나온 ≪유토피아≫는 어떤 구체적인 이상향을 설계했대서가 아니라, 늘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이상에 대한 꿈꾸기를 ‘유토피아’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인류에게 보여주었기에,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모어 자신처럼 그렇게 현실을 비판하고 ‘어떤 다른 곳’을 꿈꾸기를 권하고 있기에 영원한 고전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모어의 ≪유토피아≫는 1, 2권으로 구성된다. 제1권은 현실비판, 제2권은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1권에서 모어는 먼저 ‘저 좋을 대로’ 사는 르네상스인의 이상을 제기한다. 그러나 ‘저 좋을 대로’란 제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따를 뿐 부나 권력에 대해 욕심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긍정을 전제로 한 마키아벨리와 모어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특히 모어는 군주에 대해서 명예롭고 평화적인 일이 아니라 전쟁 수행에만 몰두한다고 비판하고, 왕의 자문관도 왕에게 아부한다고 비판한다.

토머스 모어 Thomas More, 1477~1535

1477년 런던에서 태어난 토머스 모어는 옥스퍼드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나 사제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법률가가 되었다. 이어 25세에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헨리 7세의 과중한 세금 부과안에 반대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1515년 38세에 ≪유토피아≫를 완성하고 친구인 에라스무스가 성서에 입각한 새로운 신학을 위해 그리스 고전의 연구와 성서의 번역을 장려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종교개혁 논쟁에 뛰어들어 헨리 8세를 위해 배타적인 루터에 반대하는 여러 글을 썼다. 1523년(45세)에 하원의장이 되어 의회를 토론의 장으로 만들었고, 1529년(51세)에 일반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수상직을 겸하는 대법원장이 되었으나, 헨리 8세와 그의 이혼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해 반역죄로 1535년(57세) 처형당했다.

박홍규

박홍규는 영남대를 졸업하고 오사카시립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창원대학교를 거쳐 영남대학교에서 주로 노동법을 가르쳤고 오사카대학, 고베대학 등 일본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법은 무죄인가≫, ≪노동법 1≫, ≪노동법 2≫등의 법학저서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를 비롯한 번역서, 그리고 ≪내 친구 빈센트≫와 ≪총칼을 버리고 평화를 그려라≫ 등의 예술 관련 책을 냈다. 모어보다 1세기 뒤 영국에 살았던 셰익스피어를 제국주의자로 조명한 ≪셰익스피어는 제국주의자≫를 썼고, 모어의 ≪유토피아≫에 대해 몇 편의 글을 발표한 그는 유토피아 사상 전반에 관심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