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감국사 충지
글자마다 아름다움을 통하고 글귀마다 깊은 의미를 품었다.
그것을 읊으면 갱갱히 속진을 벗어난 취향을 발휘하고,
그것을 음미하면 적적해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심오함을 보여 준다.
이로부터 손이 춤추고 발이 뛰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 문장은 도끼나 끌로 판 흔적이 없고 그 뜻은 혼혼해
아름다운 구슬이 소반 위를 구르는 것 같았을 따름이다.
지만지가 펴내고 진성규가 옮긴 충지의 문집, <<원감국사집>>에 대해 1680년에 사문(沙門) 소명(小螟)이 적은 서평의 한 구절이다.
자구마다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고, 속기(俗氣)를 벗어난 경지에 이르렀으며, 문장 또한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상태였다고 했으니 가장 적당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어릴 적에 유문(儒門)에 깊은 소양을 쌓았고, 불문(佛門)에도 깊은 경지에 다다른 결과라고 추측된다. 즉 유·불의 온축(蘊蓄)이 자아낸 보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원감국사집≫은 한 시대를 고민하다가 사라져 간 충지의 얼이 응고된 영롱한 보석일 터이다.
☑ 책 속으로
밤낮으로 벌목해
전함 만들다 힘은 다했고,
척지(尺地)도 개간하지 못했으니
백성은 무엇으로 연명하랴
가구마다 묵은 양식 없고
태반은 벌써 굶어서 우노라
하물며 다시 농업을 잃었으니
당연히 다 죽음만 보겠네
슬프다! 나란 무엇 하는 사람인가?
눈물만 공연히 흘러내리네
-<농민을 불쌍히 여겨 1283년 4월 1일 빗속에서 지음> 중에서
☑ 지은이 소개
원감국사 충지
1226년 전라도 장흥(長興)에서 태어났다. 휘(諱)는 법환(法桓)인데 후에 충지로 고쳐 불렀으며, 자호(自號)는 밀암(宓庵), 속성명(俗姓名)은 위원개(魏元凱), 탑호(塔號)는 보명(寶明)이고, 원감국사는 그의 시호(諡號)다.
9세에 취학해 경서(經書) 자사(子史)를 암송하고 문장력도 뛰어났다. 일찍이 출가했다가 어머니의 청으로 환속했다.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9세에는 춘위(예부시)에 장원으로 뽑혀 재질의 탁월함이 입증되었다. 영가(永嘉: 지금의 안동)서기(書記)를 거치고, 그 후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국위를 선양했으며, 옥당(玉堂)에서는 문체가 수려해 많은 선비들이 탄복했다. 그는 모친이 세상을 떠난 뒤 29세에 다시 출가했다. 당시 고려는 몽고(蒙古)와의 전쟁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으며 무인 정권의 부패로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했다. 그가 다시 승려가 된 것은 고귀한 생명이 무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목도하고 백성의 고통을 공유하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41세에 김해(金海) 감로사(甘露寺) 주지가 되었고, 3년 만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이때부터 승려들에게 보통 있게 되는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45세에 정혜사(定慧寺)에 이주했다. 61세에 조계 6세(世)로 임명되었다.
충지는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우국의 세월을 보내면서 조계 법맥(法脈)을 계승하다가 1293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 옮긴이 소개
진성규
경북 예천에서 출생했다. 은풍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당에서 3년 동안 한학을 공부했다. 경북 예천의 대창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3년 여 공무원 생활을 했다. 중앙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및 중앙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문학석·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부산여대(현 신라대)를 거쳐 현재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진각국사 혜심 연구≫, 공저로는 ≪신라의 불교사원≫, ≪인물로 본 한국불교사상사≫, ≪한국사상사 입문≫ 등이 있다. 역서로는 ≪서하집(西河集)≫,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 ≪계와문집(溪窩文集)≫, ≪금석문(金石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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