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8일 수요일

우신예찬(Encomium Moriae)


☑ 책 소개


한바탕 웃을 수 있는 풍자의 형식을 빌려 사람들의 풍속을 비판함으로써 악습과 폐단을 교화하고 충고하고자 한 에라스뮈스의 역작이다. 에라스뮈스의 우신은 농담을 하듯 가볍게 시대의 어리석음과 사람들의 결점을 비웃으며 사람들의 불만을 대변해 준다. 독자들에게 한 걸음 물러나 그것을 바라보고 넘어설 수 있는 자유를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 출판사 책 소개

열성적인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 규정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이었다. ‘암흑’이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고대 문화에서 새로운 정신과 비전을 발견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비상하려던 르네상스인들이 종교의 쇄신과 새로운 정신을 얼마나 절실히 갈구하고 거기에 열광했던가 하는 점이다. 이 열광한 무리들 속에 자유를 추구한 근대적 지식인, 열성적인 인문주의자로서 선구적 역할을 하며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에라스뮈스가 있다.

에라스뮈스의 영향력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이 책이 출간된 것은 1511년이다. 출간되자마자 유럽 각지에서 큰 호응을 얻어 유럽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작품이다. 수도원 교육을 충실하게 받고 자란 에라스뮈스는 기독교 관련 문헌들의 번역, 편집 작업에 몰두하여 그 분야에서 토대가 될 만한 연구 업적을 남기고 성경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옮길 만큼 신앙심이 깊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종교개혁가 루터는 그를 경멸조로 조롱했고, 트리엔트 공의회는 그를 ‘불경스런 이교도’로 정죄했다. 이처럼 신교와 구교의 핵심 세력 양측으로부터 배척을 당했지만 에라스뮈스는 많은 당대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전 유럽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뿐만 아니라 서구 문학사에서 근대성의 효시로 여겨지는 프랑스의 라블레, 스페인의 세르반테스, 영국의 셰익스피어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가장 위대한 인문주의자로 살아남아 있는 그의 영향력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중용의 태도
에라스뮈스는 16세기 종교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용의 태도를 견지했다. 1517년 95개조 논제를 발표하고 교회에 정면으로 맞섰던 루터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명망 있는 인물이었던 에라스뮈스의 지지를 받고자 했다. 에라스뮈스는 교회에 대한 루터의 비판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루터의 비판이 결과적으로 인문주의자들이 그토록 반대했던 교회 내의 수구 세력과 편협한 수도사들의 입장만 확고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격렬한 언동보다 정중한 중용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루터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여기서 에라스뮈스가 말하는 중용은 곧 관용에 대한 호소이자 평화의 추구였다. 루터가 교황에게서 이단자 선고를 받게 되었을 때, 루터를 박해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에라스뮈스가 마인츠 대주교에게 올린 진정서는 그가 설파한 중용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명백히 보여준다. “불화는 인간을 야수로 만든다. 화합은 죽음 후에 영혼들을 하나님과 결합시킨다.” 100년 후 유럽이 종교전쟁을 종식시키고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었을 때 그 조약의 원리는 바로 에라스뮈스가 주장했던 평화와 종교적 관용의 정신이었다.



☑ 책 속으로

Ut enim nihil nugacius quam seria nugatorie tractare, ita nihil festivius quam ita tractare nugas ut nihil minus quam nugatus fuisse videaris. De me quidem aliorum erit iudicium; tamet si, nisi plane me fallit filautia, Stulticiam laudavimus, sed non omnino stulte.

하찮은 일을 심각하게 다루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없고, 하찮은 것들을 가지고 진지한 일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보다 더 재치 있는 일이 없지. 나를 판단하는 일은 남들의 몫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허영심이 내 판단력을 흐려놓지 않았다면 그저 어리석게 우신을 예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 지은이 소개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1469∼1536)
1469년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성직자와 의사의 딸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9세부터 수도원에서 양육되었고, 20세경에 정식으로 수도사가 되었다. 1493년부터는 그가 비서로 모셨던 캉브레의 주교 앙리 드 베르겐의 도움으로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했다. 이 무렵에 쓴 <야만에 대항하여>에서 에라스뮈스는 당시 진보적인 학자들이 열광했던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교적인 고전문학의 효용성에 대한 기독교 교부들의 주장을 거듭 확인하고, 그가 떠나온 수도원 생활을 맹렬히 비판했으며, ‘건전한 학식은 모두 비종교적인 학식’이라고 주장했다. 주로 고전 라틴 문학 연구에 몰두했던 그는 1497∼1500년 사이에 유럽 전역의 인문학교에서 라틴어 교재로 쓰이게 될 ≪격언집≫(1500)과 ≪대화집≫(1518년에 개정판이 나옴) 초판을 출간했다. 1499년, 초청을 받아 영국으로 건너간 에라스뮈스는 영국에 체류하면서 토머스 모어와 평생 변치 않을 우정을 쌓게 된다. ≪우신예찬≫(1511)은 1506년부터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방문하고, 1509년 영국으로 건너가 여행하던 중 착상을 얻어 런던에 있는 토머스 모어의 집에 기거하며 쓴 작품이다. 이후에도 에라스뮈스는 기독교의 평화를 간절하게 희망한 <그리스도교 군주의 교육론>(1516), <평화에 대한 호소>(1517)를 간행하고,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첫 인쇄 교정본을 펴내고 ≪히에로니무스 저작집≫을 간행하는 등 다채로운 저술 활동을 통해 교회의 타락을 준열하게 비판하고 성서의 복음 정신으로 복귀할 것을 역설했다. 중년 이후에는 당시 본격화되던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해, 교회 권력에 대한 루터의 비판에는 동의하지만 그의 과격한 실천 행동에는 거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에라스뮈스는 가톨릭교회 내의 광신자들과 그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분노하는 신교 측 광신도들 양자로부터 비난을 받고 곤경에 처한다. 결국 고국으로 돌아가 바젤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에라스뮈스는 전 유럽에 영향을 미쳤다. 세계주의적 정신의 소유자, 근대 자유주의의 선구자로 유럽 문화에서 자유주의 전통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기독교 복원을 위해 가톨릭교회 제도를 비판하고, 성서를 교정하며, 고대 그리스 학문과 예술을 적극 수용하여 경직된 사고방식을 시정하려 함으로써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옮긴이 소개

문경자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루소의 자서전 글쓰기와 진실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에 출강하며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공저), 옮긴 책으로 ≪성의 역사 2≫(공역), ≪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부르디외 사회학 입문≫, ≪내정간섭≫, ≪카라바조≫, ≪에밀≫(공역), ≪인간의 대지≫, ≪페테르 파울 루벤스≫, ≪보티첼리≫ 등이 있다.


☑ 차례

우신예찬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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