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18일 금요일

보릅스베데의 풍경화가들 Worpswede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독일, 1875~1926)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는 지난 세기 전환기의 격동 속에서 실존의 고뇌를 온몸으로 겪으며, 그 치열한 삶을 문학적 형상으로 승화시켜 ‘현대의 고전’ 반열에 올려놓은 시인이다. 당시 오스트리아ᐨ헝가리 황실의 직할지였던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불우한 환경을 딛고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독일어권 시인의 한 사람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모친은 그에게 여섯 살까지 여자아이의 옷을 입혔고, 부친은 그를 왕립 육군유년실과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렇게 그의 어린 시절은 각각 첫딸을 잃은 모친과 장교가 되지 못한 부친의 대리보상을 위한 제물이 되었고, ‘잃어버린 어린 시절’은 훗날 그의 작품에 중요한 모티프로 나타나게 된다.

릴케는  대학 입시 준비 중에 첫 시집 ≪인생과 노래(Leben und Lieder)≫(1894)를 출판했다. 그러나 그의 본격적인 문학 수업은 뮌헨대학교로 옮긴 후, 루-안드레아스 살로메(1861∼1937)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릴케보다 열네 살 연상이었던 루는 릴케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쳐주고, 두 차례나 러시아 여행에 동행해 톨스토이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평생 동안 릴케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3부작 시집 ≪시도집(時禱集, Stunden-Buch)≫(1905)의 제1부 <승려 생활의 시집(Buch vom mönchschen Leben)>에 실린 대부분의 시편들과, 산문집 ≪사랑하는 하느님 이야기(Geschichten vom lieben Gott)≫(1900)는 이 러시아 여행에서 얻은 체험의 소산이다. 또한 이 시기에 쓴 장시 ≪코르넷 흐리스토프 릴케의 사랑과 죽음의 노래(Die Weise von Liebe und Tod des Cornets Christoph Rilke)≫(1906)는 첫 출간 이후 인젤문고 제1호로 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후 릴케는 북독일의 예술가 마을 보릅스베데의 풍경화가들과 교류하며, 그 결과를 ≪형상시집(Buch der Bilder)≫(1902)으로 펴냈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여기서 만난 조각가 클라라를 아내로 맞이했으나(1901), 딸 루트가 출생한 직후 백부의 유산에서 받아왔던 지원이 갑자기 끊기자 신혼부부는 생존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릴케는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에 대한 평전 집필을 청탁받고 파리로 갔는데, 이때 시작된 아내와의 별거는 평생 지속되었다. 릴케의 파리 체험은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그는 로댕으로부터 ‘끝없는 작업과 인내’라는 예술가의 자세를 배웠고, 그것을 ‘사물시(Ding-Gedicht)’로 구현하려고 했다. ≪신(新)시집(Neue Gedichte)≫(1907)과 ≪신(新)시집 별권(Der Neuen Gedichte anderer Teil)≫(1908)은 ‘언어로 만든 사물’이 다양하게 들어 있는 시집이다. 그러나 릴케는 파리에서 ‘죽음의 대도시’를 보았고, 그것을 소설 ≪말테의 수기(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1910)에서 숨 막히게 절박한 문체로 묘사했다.

이후 릴케는 덧없음과 고립으로 요약되는 삶의 부정적 의미에 시달리며 ‘정처 없는 떠돌이’처럼 유럽의 전 지역을 돌아다니는 한편, ‘눈으로 본 시’가 아닌 ‘마음으로 느낀 시’를 쓸 방법을 찾아 헤맸다. 마침내 릴케는 1922년 초 불과 두 달 사이에 두 편의 장편 연작시 ≪두이노의 비가(Duineser Elegien)≫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Sonette an Orpheus)≫를 완성했다.


해설                  

이 책의 번역대본은 인젤 출판사에서 출판한 ≪Rainer Maria Rilke, Worpswede, Frankfurt am Main (1987)≫을 사용했습니다.
작품의 분량이 많지 않아 전문을 번역했습니다.

릴케가 보릅스베데의 풍경화가들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것은 당시 브레멘 미술관 관장으로 있던 구스타프 파울리의 호의적인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미술관 개관식을 위한 축사를 쓴 일도 있는 릴케는 결혼 초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다섯 명의 화가들을 소개하는 그의 글은 이 화가들의 그림을 담은 122개의 화보와 함께 1903년에 처음 발간되었다. 미술에 대한 릴케의 관심은 이것이 유일한 경우는 아니었다. 이미 그는 1898년 피렌체 여행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피렌체 일기>에 남겼고, 그 이듬해 안드레아스 부부와 함께 간 첫 번째 러시아 여행에서도 에르미타시 미술관을 관람한 후 <러시아 미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파리에서의 체험도 로댕의 조각과 세잔의 회화에서 받은 예술적 영감이 없었다면 별 뜻이 없었을 것이다.

그의 <로댕론>과, 아내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에 피력한 세잔 추모전에 대한 감상은, 독창적인 예술적 형상에 도달하기 위해 엄격한 자세를 보여준 선배들에게 바치는 찬사였다. 그러나 릴케는 어디까지나 시인이었다. 릴케에게서 본격적인 미술사가, 또는 미술평론가의 전문적인 견해를 기대한다면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일이 될 것이다. 그의 텍스트는 장르를 떠나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예술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 구도자의 시적 순례기처럼 읽어야 한다. 실제로 미술작품에 대한 그의 관찰은 이제 막 습작기를 통과하며 자기만의 고유한 시적 어법을 찾아가고 있는 젊은 시인의 학습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릴케의 시에는 이렇게 관찰한 미술작품에서 연유하는 모티프들이 많이 들어 있다. 다시 말하면 릴케는 미술에서 ‘예술적 형상’의 모범을 찾았고, 또한 로댕과 세잔으로 대표되는 조형 예술가들의 작업방식을 자신의 ‘시적 형상’의 구현에 응용하려고 고심했던 것이다.

≪보릅스베데≫를 쓸 무렵의 릴케가 풍경에 관심을 집중한 데에는 물론 그 당시 지식인 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난 세기말은 산업화된 도시문명이 인간의 정신적 기반을 황폐하게 만드는 질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문화 비관주의적 의식이 만연하고 있던 시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술가들이 자연에 주목하게 된 것은 곧 도시문명에 대한 염증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본 자연은 로만주의자들이 본 것과 같은 인간 친화적인 자연이 아니다. 릴케의 말대로 그것은 인간에게 무심한 자연, 그러기에 인간이 아직 잘 모를 뿐만 아니라 두려워해야 하는 자연이다. 릴케는 인간이 자신의 목적에 따라 자연을 개간해 왔더라도 자연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선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의 입장에서라면 셸링 같은 로만주의자들에 의한 ‘자연의 정신화’도 자연을 인간의 입맛에 맞게 왜곡하는 짓이다. 릴케에게 풍경은 그처럼 낯선 자연을 관조하기 위한 창(窓)과도 같은 것이다. 보릅스베데에 옹기종기 모여 예술가 마을을 이룬 풍경화가들에서 릴케는 진지한 자연탐구의 모범적인 태도를 발견했다. 그들이 그린 풍경화에는 새롭게 발견된 자연이 들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자연 속에는 햇빛과 바람의 순수한 작용이 나타나 있을 뿐, 인간적 정조에 호소하는 분위기는 제거되었음을 강조한다. 아니, 인간 자체가 자연으로부터 아예 추방되었거나, 자연에 동화되어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풍화작용에 적응한 한 그루의 나무처럼 그려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릴케가 마켄젠의 <야외 예배>를 인물화로 보지 않고 풍경화로 본 것도 이런 뜻에서 비로소 이해가 된다. 거기에 그려진 인물들은 자연조건에 순응한 생활 속에서 자연 그 자체가 된 군상이라고 본 것이다.


옮긴이                  

안문영은 서강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독문학을 전공하고 독일 본대학교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후기시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4년 이후 충남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관심 분야는 현대 독일시와 번역 이론, 그리고 릴케와 괴테의 작품에 나타난 동양적 요소 등이다. 괴테, 릴케, 첼란, 구체시, 문학용어 번역 등에 관한 논문이 다수 있으며, 역서로 ≪릴케: 두이노의 비가/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문학과지성사, 1991/1994), ≪제니 에르펜 베크: 늙은 아이 이야기≫(솔출판사, 2001), ≪로버트 슈나이더: 오르가니스트(원제: 잠의 형제)≫(북스토리, 2006) 등이 있다.


본문 중에서          

풍경은 확실하다. 거기에 우연은 없다. 떨어지는 나뭇잎은, 그것이 떨어짐으로써, 우주의 가장 위대한 법칙 하나를 실현한다. 결코 망설이는 법이 없고 모든 순간마다 안정되고 느긋하게 완성되는 이 법칙성이야말로 자연을 젊은이를 위한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다.

Die Landschaft ist bestimmt, sie ist ohne Zufall, und ein jedes fallende Blatt erfüllt, indem es fällt eines der größten Gesetze des Weltalls. Diese Gesetzmäßigkeit, die niemals zögert und sich in jedem Augenblick ruhig und gelassen vollzieht, macht die Natur zu einem solchen Ereignis für junge Menschen.


출판사 서평        

릴케에게 보릅스베데는 자연을 관조하기 위한 창(窓)이었다. 이 책은 예술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했던 다섯 화가의 작품을 시인 릴케의 눈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이제 막 습작기를 통과하며 자기만의 고유한 시적 어법을 찾아가는 시인의 젊은 시절은 보릅스베데의 풍경 속에서 더욱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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