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16일 수요일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맑스    Marx, Karl Heinrich (독일, 1818~1883)

마르크스의 생애는 그의 사상이기도 하다. 그의 생애만큼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을 증명해 주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그는 평생 자신이 처해 있는 시대적 상황을 치밀하게 연구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시대적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에 문자 그대로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에게 이론은 실천을 위한 도구였고 실천은 이론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장(場)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처음부터 과학적 인식이 완벽한 형태로 갖추어져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가 살았던 역사적 상황과 함께 그의 실천방식이 끊임없이 변화했듯이 그의 사상 또한 부단한 변화를 겪으면서 발전과정 속에 들어 있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적 발전과정 자체가 마르크스 유물론의 산증인인 셈이다.
마르크스가 청년기를 보냈던 1840년대는 독일이 산업혁명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당시 수많은 제후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은 1834년 관세동맹을 결성하고 1835년에는 최초의 철도를 놓으면서 비로소 산업혁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독일의 이 산업혁명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훨씬 뒤늦게 시작되었기 때문에 당시 독일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은 훨씬 적나라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었고 그만큼 혁명적 분위기도 고조되고 있었다. 1848년에 독일을 비롯한 유럽대륙에는 부르주아 혁명이 휩쓸고 지나갔다. 이 시기에 ≪공산당선언≫이 집필되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주기적으로 공황을 겪음은 물론 이 공황기에 혁명적 여건이 성숙한다는 인식을 가졌던 마르크스는 1850년대 말에도 주기적 공황과 혁명적 상황이 도래할 것으로 예견하고, 서둘러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에게 혁명의 이론적 무기를 제공하기 위해서 서둘러 경제학 저술을 집필하게 되는데, 그 결실이 초고 형태로 남겨진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다. 그러나 예견했던 혁명적 상황은 도래하지 않았고 마르크스는 다시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적 모순과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에 대한 연구에 몰두한다. 1871년의 독일 통일이 1870년대 자본주의 대공황과 맞물리면서 독일은 급속도로 산업혁명의 진전을 경험하면서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진입한다. 당시 산업화 후발국으로서 산업혁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독일제국 정부는 “국가독점”(마르크스) 형태로 국가가 자본가계급을 의식적으로 육성하는 전략을 성공적으로 채택한다. 1883년에 생을 마감하는 마르크스는 독점자본의 등장을 목격할 수 있었고, 그가 수차례에 걸쳐 수정한 ≪자본론≫에서 이 독점자본의 등장을 “자본주의적 소유의 변증법”(마르크스)에 수용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그의 생애에 걸쳐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르크스가 23세에 베를린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던 1841년 당시 독일 학계는 헤겔주의자들이 좌우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당시 마르크스는 학내에서는 물론이고 학위를 받고 생계를 위해 <라인신문> 편집장으로 활약하면서도 청년헤겔주의자였다. 마르크스는 10개월 만에 <라인신문> 편집장이 될 정도로 맹활약을 펼쳤고 마르크스의 활약으로 독일에서 가장 급진적인 신문으로 변모한 <라인신문>은 정부의 탄압을 받아 결국 1843년 3월 폐간되고 만다. <라인신문>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마르크스는 인간생활에서 “물질적 이해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훗날 고백하고 있다.

<라인신문> 폐간을 계기로 마르크스는 파리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우선 프랑스혁명 연구에 몰두했으며, 아담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등 경제학자들의 저서를 비판적으로 연구했다. 또한 하이네, 프루동, 바쿠닌 등과 교분을 나누었으며 <독불연보>를 발간하면서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 등을 발표했다. 파리에서 엥겔스와 사상적으로 일치함을 확인한 마르크스는 깊은 친분을 맺고 <신성가족, 또는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 ―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에 대하여>를 공동으로 저술함으로써 청년헤겔주의와 결별하게 된다. 청년헤겔주의와의 결별이 헤겔 철학 일체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훗날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의 “합리적 요소들”에 관한 별도의 집필을 계획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에도 마르크스는 관념론을 벗어나 유물론으로 이행하는 국면에 있었다. 파리에 체류하면서 초고 형태로 남긴 <경제학 철학 수고>는 여전히 관념론적인 요소를 다분히 담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물질적 토대를 창출하는 노동에 대한 관심을 “소외된 노동” 이론에 집중함으로써 관념론과 명백한 거리를 두고 있다. “노동은 부자를 위해서는 경이로운 작품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결핍을 생산한다.”

한편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을 접하면서 − 엥겔스가 훗날 고백했듯 − 일시적으로 ‘포이에르바흐주의자’로 변신한다. 마르크스는 헤겔에 대한 포이에르바흐의 유물론적 비판을 수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헤겔의 변증법은 “신비의 외피”를 입고 “물구나무 서 있는” 관념론으로 인식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는 유물론의 유효성을 자연에 국한시키는 포이에르바흐를 비판하면서 유물론의 영역을 인간역사로 확대했다.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그들의 의식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결정한다.” 1845년에 집필한 <신성가족>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고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청년헤겔주의를 청산하고, 유물사관의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1845∼1846년 사이에 엥겔스와 공동 집필된 <독일이데올로기>에서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 사실상 완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 “사회구성체”, “소외”, “이데올로기”, “토대와 상부구조” 등의 개념들을 정립하고 있다.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제기했던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가”로 바뀌었고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들”에서 출발하고 있다.

1847년 <철학의 빈곤>을 프랑스어로 간행함으로써 마르크스는 당시 프롤레타리아 운동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프루동과의 인연을 끊었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이 경제적 범주를 선험적인 영원한 이념으로 설정하려는 사변철학(思辨哲學)에 빠졌으며, 경제학 지식의 부족으로 교환가치를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식을 선험적으로 도출하려는 공상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1848년 3월혁명이 일시적으로 성공하자 마르크스는 프랑스 혁명정부의 요구에 따라 파리로 돌아가지만 이내 고국의 혁명에 가담하고자 쾰른으로 향했고, 엥겔스와 함께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대중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또한 혁명의 성공을 위해 <신 라인신문>을 발행했다. 이 <신 라인신문>에는 소위 마르크스의 정치저술로 불리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이 연재되었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유물사관을 적용하여 정치적 사건의 근본원인을 경제상황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말하자면 1848년 2월혁명과 3월혁명의 “진정한 모체”(엥겔스)를 1847년 세계적인 상업공황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그 연장선 상에서 마르크스는 1848년 중반 이후로 점차 회복되기 시작하여 1849년과 1850년에는 절정에 이른 산업호황이 유럽의 반동을 강화시켰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 저술에서 마르크스가 내린 결론은 “새로운 혁명은 새로운 공황의 결과로서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공황이 확실한 것처럼 혁명도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엥겔스가 이 저술의 1895년판 서문에서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전망은 수정되어야 했다.

<신 라인신문>의 비판적 논조가 심화되자 마르크스는 재차 독일에서 추방당했고, 그즈음 프랑스의 혁명도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제는 영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국제적 노동자 조직이었던 ‘공산주의자동맹’의 의뢰를 받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으로 집필한 이론적, 실천적 강령이 <공산당선언>이다. 이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인류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규정하는 한편, 당시 노동운동에 영향을 미치던 다양한 사회주의 사상의 “반동성, 보수성, 공상성”을 비판함과 아울러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호소했다.

마르크스가 다시 망명처로 선택한 영국은 당시 자본주의가 가장 성숙한 나라였다. 영국 자본주의는 안정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으며 혁명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1852년에는 내부적으로 분열된 ‘공산주의자동맹’도 마르크스의 제안에 따라 해체되었다. 이즈음 마르크스는 <뉴욕 데일리 트리뷴>지에 연재하는 고정 칼럼을 빼고는 별다른 생계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하지만 그는 불굴의 투지로 경제학 연구에 매진하는 한편, 혁명 상황의 도래를 고대했다. 마르크스가 혁명과 공황 사이의 인과관계에 관해 <공산당선언>에서 내세운 가설에 따르면 1850년대 말에는 다시 공황과 혁명 상황이 도래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이에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이론적 무기를 제공하기 위해 서둘러 ≪정치경제학 비판≫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의도와는 다르게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는 출간할 수 있는 형태로 집필되지 못했고 혁명 상황은 도래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경제학과 경제 현실에 대한 연구에 더욱 빠져들었고 그 결과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를 발간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훗날 ≪자본론≫ 제1권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팸플릿은 마르크스가 총 4권으로 계획했던 ≪정치경제학 비판≫의 서두에 해당한다. 내용적으로는 ≪자본론≫과 보완관계에 있는 것으로 마르크스 스스로 설명하고 있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를 출간한 다음 마르크스는 후속작업에 몰두했고 그 결과 1861년부터 1863년 사이에 ≪자본론≫ 제4권에 해당하는 원고를 초고 형태로 집필했다. 훗날 이 원고는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카우츠키에 의해 ≪잉여가치학설사≫로 발간되었다. 1865년까지 마르크스는 대체로 ≪자본론≫ 초고 집필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자본론 초고를 대략 완성할 무렵인 1864년에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제1차 인터내셔널) 창립을 주도했고 총평의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마르크스는 이론적 연구를 빌미로 실천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실천을 핑계로 이론적 연구와 분석에 소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1867년 자본의 생산과정을 분석한 ≪자본론≫ 1권이 출판되었다. 그렇지만 이 책의 발간을 고대하던 운동가들에게 이 책은 상당한 실망을 안겨주었다. 우선 이해하기 어려운 데다가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만한 ‘비책’을 전수해 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자본론≫ 2권부터 4권보다 1권이 후세에서도 가장 다양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마르크스 사상의 정수가 담겨 있다. 이 책만큼 마르크스가 정성을 들여 수정하고 보완한 책도 없다. 독일어판이 출간된 이후 영어판, 프랑스어판, 러시아어판 등이 출간될 때마다 마르크스는 필요한 부분에서 수정을 가하기도 했고 서문을 남겼다. 이 1권의 핵심은 자본이 획득하는 이윤의 원천이 살아 있는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잉여가치임을 밝힌 것이다.

국제노동자협회의 방침에 따라 1869년에는 마르크스의 제자인 베벨과 리프크네히트 등에 의하여 ‘독일사회민주노동당’이 아이제나흐에서 창당되었다. 이 정당은 당시 라살레를 추종하는 ‘전(全)독일노동자동맹’과 치열한 대립관계에 놓여 있었다. 베벨은 1871년 5월에 마지막 항전을 계속하고 있던 파리코뮌의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이 ‘파리코뮌’은 1871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에서 수립된 프롤레타리아 정부였다. 당초 마르크스는 노동자 정부의 수립에 회의적이었지만 일단 코뮌이 수립되자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이를 위해 집필된 국제노동자협회의 공식문건이 <프랑스 내전>이다. 마르크스는 비록 백 일밖에 지탱하지 못했지만 코뮌이야말로 “역사상 최초로 노동계급의 역량과 이상주의를 공개적으로 보여준 도전이자, 노동계급이 전 세계가 보는 가운데 억압자들에 맞서 싸운 최초의 대접전”이라고 평가했다. 이 저술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과 함께 마르크스의 주요한 정치학 저술로 평가된다.

파리코뮌이 실패한 이후 마르크스는 ‘독자적인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수립을 국제노동자협회에 제안한다. 하지만 이는 바쿠닌주의자들의 반발을 시작으로 ‘국제노동자협회’ 내분을 불러일으켰으며, 급기야 1876년 7월 국제노동자협회는 해산되었다. 이 무렵 독일 정부의 탄압이 강화되자 1875년 ‘독일사회민주노동당’과 ‘전 독일노동자동맹’은 ‘독일사회주의노동당’으로 통합되었는데, 이 통합 정당은 훗날 ‘독일사회민주당’의 전신이 되었다. 통합 전당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이 ‘고타강령’이며 이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이 <고타강령 비판>이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강령의 타협주의를 비판하는 한편, 공산주의 혁명의 단계적 접근을 시도했고 사회주의에서의 분배원칙과 공산주의에서의 원칙을 구분하고 있다.

국제노동자협회의 해산을 전후하여 마르크스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후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 등에서 마르크스의 영향력은 확대되었지만 아내와 큰딸 예니의 연이은 죽음에 상심한 그는 1883년 3월 14일 안락의자에 앉아 잠든 채로 65세의 삶을 마감한다. 마르크스가 사망한 후 1885년에는 엥겔스에 의해 ≪자본론≫ 제2권이 출판되었고, 이어서 1894년에는 ≪자본론≫ 제3권이 출판되었다.

해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하 ≪요강≫)에는 마르크스가 1857년 7월부터 1858년 5월까지 집필한 3편의 경제학 수고가 실려 있다. <바스티아와 캐리>(1857년 7월), <서설>(1857년 8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1857년 10월부터 1858년 5월까지)이 그것이다. 이 수고들은 1939년부터 1941년까지 구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에 의해서 처음으로 그 전문이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 판의 복사본이 구 동독의 국영출판사였던 디츠(Dietz)출판사에 의해서 1953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다가 ≪요강≫은 1980년대에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arx-Engels-Werke)≫ 제42권으로 편입되었다. ≪요강≫의 한글판 완역본은 이 독일어판을 원본으로 하여 번역되었다. 독일어 원본은 한 권으로 되어 있지만 한글 완역본은 영어판 역자 서문, 한글판 역자 후기 등을 추가로 담고 있으면서 세 권으로 출판되었다. 금년 2008년에는 ≪요강≫ 집필 150주년을 기념하는 논문집이 유럽 학자들에 의해 발간될 예정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마르크스는 혁명적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이론가로서 마르크스는 혁명의 물적 토대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1850년대부터 경제학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다. 한편으로는 애덤 스미스, 윌리엄 페티, 데이비드 리카도와 같은 고전경제학자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의 경제정책 및 경제동향도 집중적으로 분석하면서 이에 관한 많은 사설도 남겼다. 마르크스가 ≪요강≫을 집필한 직접적인 동기도 이론가이자 실천가인 마르크스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마르크스는 1850년대 말에 공황이 도래할 것을 예견하고 공황이 도래하면 노동자계급에 의한 혁명적 상황이 도래할 것으로 기대했다. 마르크스는 이때를 대비해서 노동자들을 가능한 한 빨리 경제지식으로 무장시키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요강≫의 첫 번째 부분에 해당하는 <바스티아와 캐리>에 대한 비판이 자본주의 사회를 계급사회가 아닌 조화로운 사회로 옹호하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었고, 세 번째 수고를 알프레드 다리몽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 것도 다름 아니라 당시 노동운동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프루동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요강≫은 흔히 ≪자본론≫ 초고로 알려져 있는 책이다. 그렇지만 저자인 마르크스가 출판을 목적으로 집필한 원고가 아니라 ‘자기이해’를 위해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내려간 초고인 데다가 헤겔 철학적인 표현이 많이 동원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자본론≫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내용도 상당히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요강≫은 초기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을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마르크스의 경제사상이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40여 년에 걸친 연구과 실천의 결실이라는 사실은 ≪요강≫에서도 이미 잘 드러나고 있다. 수고가 불과 10개월 동안에 작성되었음에도 그 사이에 새로운 사고와 문제의식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경제학의 완성판이라 할 수 있는 ≪자본론≫과 비교해 보면 마르크스경제학이 꾸준한 발전과정 속에 있었음을 더욱 확연히 알 수 있다. 두 저술 모두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적 성격, 다음 사회를 준비하는 사회로서의 자본주의의 위상에 관해 표명된 마르크스의 확신에는 변함이 없지만, ≪요강≫에서 단편적으로 제기된 문제의식, 훗날 천착하기로 예고되었던 상당수 경제 분야가 ≪자본론≫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요강≫의 서술 내용과 ≪자본론≫의 서술 내용에서 차이가 발견되기도 한다.

완역본의 분량은 본문 내용만 해도 2백자 원고지 5천 장가량 된다. 본 발췌본에서는 이를 약 10분의 1 정도로 줄였다. 마르크스가 자기이해를 위해 쓴 것이 명백한 계산문제 등은 발췌본에서 제외했고,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이론적인 부분만을 가능한 한 중복하지 않으면서 발췌본에 포함시켰다.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마르크스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퇴조했지만 역시 고전은 고전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최근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바라볼 때 ≪요강≫은 고전으로서의 의의를 톡톡히 되살리고 있다. 산업경제에서 지식경제로 이행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마르크스가 ≪요강≫에서 지식과 과학이 장차 인간의 생산활동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지 예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인 사회적 노동”으로 개념화하면서 단편적이나마 서술하고 있는 내용은 지식경제의 경제주체인 지식노동의 경제적 위상을 선지(先知)하고 있는 셈이다.

차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서설

A. 서설

I. 생산, 소비, 분배, 교환(유통)
1. 생산
2. 분배, 교환, 소비에 대한 생산의 일반적 관계
3. 정치경제학의 방법

II. 화폐에 관한 장
알프레드 다리몽: ≪은행 개혁에 관하여≫(파리 1856년)
[화폐의 등장과 본질]
[화폐관계의 담지자로서 귀금속]
[화폐의 회전]

III. 자본에 관한 장
[제1편: 자본의 생산과정]
자본으로서의 화폐에 관한 장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교환]
[노동과정과 증식과정]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
[잉여가치와 이윤]
[제2편: 자본의 유통과정]
[자본의 재생산과 축적]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형태들]
[자본의 순환]
[잉여가치와 이윤에 관한 이론들]
[고정자본과 유동자본]
[고정자본과 사회의 생산력 발전]
[제3편: 결실을 가져다주는 것으로서의 자본. 이자, 이윤(생산비 등)]
[기계류와 이윤]
[기타]

역자 소개      

김호균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직장생활 1년, 연구원 생활 2년을 하다가 독일에 유학, 브레멘대학교 경제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 <세계시장에서 독점에 의한 가치법칙 작용방식의 수정>에서는 가치개념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에서 출발해서 시장가치, 생산가격, 국제가치에 이르는 ‘정치경제학 비판’ 서술의 구체화를 보여주고자 했다. 아울러 1970∼1980년대 마르크스경제학 내에서 논쟁이 되었던 세계시장론과 1980년대 이후 마르크스경제학 내에서 논쟁 중이던 독점(자본주의) 개념에 대한 해석을 제시했다. 특히 논문의 보론에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라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서술방법’을 자본 개념에 적용한 것은 전례 없는 작업으로 평가받았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은 독일 유학 시절부터 번역을 꿈꾸고 있다가 귀국하면서 바로 착수했다. ≪요강≫은 마르크스가 출간이 아니라 “자기이해”를 위해서 문자 그대로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내려간 초고이기 때문에 완결되지 않은 문장도 많고 서술방식도 ‘정치경제학 비판 서술체계’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헤겔적인 표현이 많이 섞여 있어 번역에 어려움이 많았다. 한글 완역본은 우여곡절 끝에 2000년 3권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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