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19일 토요일

샤를마뉴의 행적 De Carolo Magno

노트케르 Notker the Stammerer (독일,  840~912)

이 책의 저자인 말더듬이 노트케르(Notker the Stammerer, 840~912)의 라틴명은 노트케르 발불루스(Notker Balbulus)다. 노트케르는 프랑크 명문 가문 출신으로, 성 갈렌 수도원 부근에 있는 투르가우 지방에서 840년경에 태어났다. 어릴 때 그는 아달베르트(Adalbert) 밑에서 양육되었다. 아달베르트는 프랑크인들에게 강력한 저항세력이었던 작센족, 훈족, 슬라브족을 상대로 한 정복전쟁에 참여했던 프랑크의 용감한 전사였다. 노트케르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이미 연로했던 아달베르트는 그에게 수많은 전쟁담을 들려주었다. 그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노트케르는 이 책의 제2권에 나오는 샤를마뉴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구성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성 갈렌의 수도원학교에 들어가 그 수도원의 수사였던 그리말트(Grimald)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말트는 당시 프랑크 왕국의 최고 지성으로 알려진 앨퀸의 제자였다. 성 갈렌의 수도원학교에서 다양한 학문 분야를 두루 섭렵한 후, 노트케르는 스승의 뒤를 이어 그 수도원의 수사가 되었다. 수사가 된 후에 그는 주로 교사로서 활약했으며, 시와 음악, 저술에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신체는 가냘팠지만 마음은 강직했으며, 혀는 어눌했지만 지성은 번뜩였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보급하고 발전시키는 데 헌신하다가 912년에 사망했다. 1512년에 교황에 의해서 시복(beatification)되어 복자(the Blessed)의 반열에 올랐다.


해설                      

이 책의 원전은 ≪De Carolo Magno≫[Jaffé, Philipp(ed), de Carolo Magno, in Bibliotheca Rerum Germanicarum, Vol. Ⅳ, Monumenta Carolina(Berlin, 1867), pp.628∼700]입니다. <Charlemagne>[≪Two Lives of Charlemagne≫(trans. by Lewis Thorpe, Penguin Books, 1969) pp.91∼172]를 참조해 모두 번역했습니다.

샤를마뉴(Charlemange, 재위 768~814)는 서유럽 중세 전기를 대표하는 통치자로서 47년이라는 긴 통치 기간에 수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그는 주변의 민족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여 서유럽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며, 그의 통치 시대에 프랑크 왕국은 역사상 전성기를 구가했다. 유럽 대륙에서 그가 다스리는 영토는 고대 로마제국의 유럽 영토에 필적할 정도로 광활했다. 샤를마뉴는 그의 지배력이 미치는 지역에 적극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보급하고 교회조직을 확대했다. 그 결과 서유럽과 그 주변 세계에 기독교가 널리 확산되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기독교 신앙과는 별개로 그는 또 서유럽의 각지에서 유명한 학자들을 프랑크 궁정으로 초빙하여 고전의 연구를 장려할 정도로 학문의 진흥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집요한 노력의 결과 프랑크의 궁정학교와 수도원학교를 중심으로 학문 연구가 활성화되어, 서유럽 세계는 중세 초의 문화적 암흑기에서 벗어나 이른바 ‘카롤링거조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학문의 부흥을 이루게 되었다.

 이 책은 위대한 샤를마뉴 황제와 그의 가문에 관련된 수많은 사건과 일화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성 갈렌(St. Gall) 대수도원의 수사였던 말더듬이 노트케르(Notker the Stammerer, 840~912)는 샤를마뉴의 증손자인 샤를 비만왕(Charles the Fat, 재위 884~887)을 위하여 이 책을 저술했다. 비만왕은 883년에 성 갈렌 수도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노트케르는 황금으로 휘황찬란하게 치장한 제복을 입은 왕의 화려하고 늠름한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 왕을 직접 목격하고 감동을 받은 노트케르는 그 왕의 위대한 선조인 샤를마뉴를 위시하여 직계 조상인 루이 경건왕, 루이 독일왕, 그리고 샤를 비만왕과 관련된 사건들을 글로 쓰기로 결심했다. 노트케르는 샤를 비만왕을 처음 목격한 그해인 883년 말부터 이 글을 쓰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인 884년 전반기에 이 책의 제1권을 마치고, 바로 이어서 제2권을 쓰기 시작하여 887년에 제2권을 완성했다. 이 책을 오늘날의 학자들은 ≪샤를마뉴에 관하여≫ 또는 ≪샤를마뉴의 행적≫이라고 부른다. 옮긴이는 이 번역서에서 후자를 책의 제목으로 택했다.

이 책은 샤를마뉴의 전쟁이나 샤를마뉴의 후손들에 관해서는 많은 정보를 정확하게 제공해 준다. 중세 역사상의 핵심 사건인 800년 샤를마뉴 황제의 대관식 사건에 관해서는 아인하르트보다 더 상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이 사건에 관해서 아인하르트는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노트케르는 이 사건의 배경과 경위를 비교적 상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 노트케르는 샤를마뉴의 외교관계에 관해서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샤를마뉴는 외국에 적극적으로 사신들을 파견하면서 능동적인 외교를 전개했다. 외국에서도 많은 사신들이 선물 보따리를 들고 샤를마뉴 궁정을 방문했다. 노트케르가 보고하는 국가 간 사신들의 방문기를 통해서 우리는 당시의 국제질서는 물론 왕들 사이에 선물로 교환된 물품의 종류까지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노트케르가 훈족(Huns)의 성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우리가 마치 성채 안으로 들어가 아홉 겹의 성채를 한 겹 한 겹 들여다보면서 설명을 듣는 것과 같은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노트케르의 이 책이 지닌 약점을 정확하게 알고 잘만 활용한다면,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샤를마뉴와 샤를마뉴 후손들의 행적 및 외교관계는 물론 중세 사회의 일상에 관해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옮긴이                   

이경구는 2001년부터 현재까지 ‘콘스탄티누스 기진장(Donation of Constantine)’을 연구 주제로 설정해 지속적으로 공부해 오고 있다. 이 주제는 내용상으로 샤를마뉴의 부친인 피핀 단신왕으로부터 샤를마뉴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들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옮긴이는 그동안의 연구 과정에서 샤를마뉴와 그의 가문에 관련되는 기본적인 사실들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트케르의 ≪샤를마뉴의 행적≫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2000년 이후 옮긴이의 주요 연구 성과물로는 ≪중세의 정치 이데올로기≫(느티나무, 2000), ≪꿰뚫는 논술 교과서≫(공저: 신서원, 2003), ≪만화 한국사․세계사 척척 논술≫(공저: 중앙재능북스, 2006) 등의 저서와 역서 ≪중세 이야기≫(공역: 새물결, 2003), 그리고 논문 <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의 제휴: 피핀의 쿠데타를 중심으로>(<서양중세사연구>제8집, 2001), <스테파누스 2세와 피핀의 상봉: 그 역사적 의미>(<서양중세사연구> 제9집, 2002),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의 작성 목적>(<서양중세사연구> 제11호, 2003),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에 관하여>(<서양중세사연구> 제13호, 2004),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의 작성 시기>(<서양중세사연구> 제14호, 2004), <신성로마제국의 성격: 교황권과 황제권의 관계를 중심으로>(<서양사연구> 제37집, 2007),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의 적용 사례: 13세기 전반기의 교황들을 중심으로>(<호서사학> 제49집, 2008) 등이 있다.


본문 중에서                

Since Charlemagne was already ruler and emperor of so many people in his own right, he should now in his glory be granted the title of Emperor and Caesar Augustus by the authority of the Apostolic See.

샤를마뉴는 이미 수많은 민족들의 통치자요 제왕으로서의 권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교황의 권위에 의해서 황제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아 영광을 누리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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