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16일 수요일

사시전원잡흥 四時田園雜興

범성대  范成大(중국, 1126~1193)

범성대(1126∼1193)는, 자(字)가 치능(致能), 호(號)가 석호거사(石湖居士)다. 오현(吳縣, 지금의 강소성 소주시) 사람이다. 14세 때 모친을, 18세 때 부친을 여의고 10년간 출사를 하지 않다가 부친의 유지를 따르라는 권고에 따라 소흥(紹興) 24년(1154) 진사(進士)가 되었다.
처주지부(處州知府), 지정강부겸광남서도안무사(知靜江府兼廣南西道安撫使), 사천제치사(四川制置使) 등의 지방관을 역임했고 중앙에서는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중서사인(中書舍人),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의 관직을 맡았다. 효종(孝宗) 건도(乾道) 6년(1170) 금(金)으로 사신을 가서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금의 군신 앞에서도 당당한 태도를 보여 조야(朝野)의 칭송을 받았으며 그 결과 건도 8년(1172) 그의 나이 53세 때 중대부참지정사[中大夫參知政事, 부재상(副宰相)급]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비록 2개월간(4월 2일∼6월 11일)이었으며 실권은 가지지 못했으나 지방관에서 시작하여 참지정사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 또한 대단한 업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범성대를 부를 때 치능(致能, 또는 至能)과 함께 참정(參政)을 자주 사용했다. 만년에는 병을 핑계로 은퇴하여 그의 별장이 있던 고향의 석호(石湖)에 은거했다가 몇 년 뒤 조정의 부름으로 다시 벼슬을 하기도 했다.
범성대는 지방 관리 생활을 하면서 백성을 위하여 여러 치적을 남겨 세금을 줄이기도 하고 구제 활동을 펼치기도 했으며 중앙에서는 언관(言官)의 직책을 맡고 온화하면서도 굽힘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그를 주전파(主戰派) 속의 온화파(溫和派)라 불렀는데 그는 어떤 정치적 주장을 강력히 펼친 정치가였기보다는 자신의 일을 적절히 완수한 행정 관리에 가까웠다. 그에게는 자신의 직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강력한 대립이나 갈등은 찾아보기 힘들고 감정상의 기복 또한 보기 힘들다. 가장 명확한 시대 상황이던 금나라와 송나라 사이의 문제도 개인이 아닌 관리로서의 범성대에게는 아주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육유(陸游), 양만리(楊萬里) 등과 함께 남송사대가(南宋四大家)로 불리는 그는 주로 시에 뛰어났으며 그 중에서 전원시, 풍속시(風俗詩), 사회시(社會詩), 애국시(愛國詩), 기행시(紀行詩) 등이 유명하다. 특히 그의 전원시는 남송부터 청(淸)에 이르기까지 도연명을 능가하는 전원시의 모범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해설               

∙ 이 책은 ≪범석호집(范石湖集) 상하(上下)≫(上海古籍出版社, 1981년, 上海)을 저본(底本)으로 삼아 완역했습니다.

≪사시전원잡흥(四時田園雜興)≫은 남송(南宋)의 시인 범성대(范成大)가 그의 나이 61세에 지은 전원시(田園詩) 모음으로 60수의 절구(絶句)로 되어 있다. 그는 58세인 1183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소주(蘇州)로 돌아가 석호(石湖) 부근에 은거하며 전원의 여러 모습을 몸소 체험하고 이것을 1년의 시간으로 시를 써냈다. 이 60수에는 전원의 한적한 풍경, 농촌의 정겨운 인심, 절기에 따른 농촌 풍속, 전원생활의 즐거움, 농사의 고달픔, 사회의 모순 등 다양한 내용이 들어 있다. ≪사시전원잡흥≫은 계절의 순서에 따라 12수 씩 <춘일전원잡흥(春日田園雜興)>, <만춘전원잡흥(晩春田園雜興)>, <하일전원잡흥(夏日田園雜興)>, <추일전원잡흥(秋日田園雜興)>, <동일전원잡흥(冬日田園雜興)>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배열에 어떤 특정한 의도나 구조가 있지는 않다.
≪사시전원잡흥≫은 근래 중국에서는 중국 고대 전원시의 집대성이라는 명성까지 듣고 있다. 전원시인으로서의 범성대의 명성 또한 주로 이 시 모음에 기인하며 그의 명성은 고대 중국에서는 도연명(陶淵明)과 필적하거나 또는 도연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중국의 전원시인과 전원시에 비해 지명도가 다소 떨어지는 점이 있다. 이것은 대체로 남송 이후의 중국 한시가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시전원잡흥≫의 배경을 이루는 시인 범성대에게 다른 중국 시인과 같은 어떤 극적이며 강렬한 인생 역정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대 중국 문인과 현대 중국 연구자들은 ≪사시전원잡흥≫을 뛰어난 전원시로 인정하면서도 그 주안점이 서로 달랐다. ≪사시전원잡흥≫은 뛰어난 정치가이자 선량한 인격자인 시인이 유가적 사회의 이상 가운데 하나인 공성신퇴(功成身退) 정신에 입각하여 깨끗한 전원에서 자유로우면서도 검소한 삶을 견지한 증거다. 고대 중국 문인들은 범성대에게서 그 전범의 하나를 발견했다. 범성대는 송대 시인의 특징이기도 했던 세밀한 관찰과 다양한 관심을 그가 은거했던 전원의 형상에 주입시켰고 ≪사시전원잡흥≫에는 농촌의 여러 다양한 모습이 포함되었다. 그 결과 시 모음 안에는 농촌 사회의 사회적, 또는 정치적 문제점에 대한 내용도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러한 내용은 그 이전 시인들의 경우 굳이 전원시로 분류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현대의 연구자 가운데에는 ≪사시전원잡흥≫이 전원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한데 통합시킨 최초의 작품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사시전원잡흥≫이 후대 시가에 영향을 준 특징의 하나는 전원(농촌, 어촌, 산촌 등을 포함)을 노래하면서 계절 순서에 따라 1년의 기간을 설정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우리나라도 비슷해서 한시뿐 아니라 한글로 된 시가에도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있었다.
본 번역은 ≪사시전원잡흥≫의 원문으로 ≪범석호집(范石湖集) 상하(上下)≫(1981년, 上海古籍出版社, 上海)를 저본(底本)으로 삼았다. 이 책은 현대 활자본으로는 유일한 범성대의 시(詩)와 사(詞)의 전집이며 청대(淸代)의 여러 원전에 교감을 진행하여 만든 책이다. ≪사시전원잡흥≫의 경우 ≪송시초(宋詩鈔)≫와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범석호집≫의 내용을 따르는 경향이다.
≪범석호집≫에는 1800수 정도의 한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전원시는 약 300수가 안 된다. 범성대는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 특히 전원시로 명성을 얻었다. 그 가운데에서 ≪사시전원잡흥≫ 60수가 가장 유명한 작품이며 실질적으로 전원시인으로서의 범성대의 명성 역시 이 작품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니 범성대의 한시는 수량보다는 작품의 질적 수준이 중요하다. 그래서 본 번역은 중국, 대만, 한국 등에서 이전에 출간된 번역 선집과 달리 범성대 한시의 핵심이 되는 ≪사시전원잡흥≫만을 완역했다. 이 조시(組詩)들을 통해 국내의 독자 또한 중국의 전통 전원시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여겨지는 시가 어떠한 모습인지 경험할 수 있을 것이며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 중국 강남의 한 해 동안의 농촌 풍경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영미권에서는 범성대가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면서도 ≪사시전원잡흥≫은 완역 시집이 두 종류 출판되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사시전원잡흥육십수 서문
四時田園雜興六十首
춘일전원잡흥 12절
春日田園雜興十二絶
만춘전원잡흥 12절
晩春田園雜興十二絶
하일전원잡흥 12절
夏日田園雜興十二絶
추일전원잡흥12절
秋日田園雜興十二絶
동일전원잡흥 12절
冬日田園雜興十二絶

옮긴이에 대해

역자 소개         

서용준은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중문과 대학원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2008년 박사학위 취득 예정에 있다. 서울대, 숙명여대, 동국대, 서원대 등에서 중국문학, 중국어 등의 강의를 했다. 석사학위논문은 <범성대 전원시 연구(范成大 田園詩 硏究)>였고, 박사학위 예정 논문은 <이백시(李白詩)의 화자(話者)에 대한 연구>다. 주된 연구 분야는 당대(唐代)와 송대(宋代)의 시가(詩歌)이며 그 외에 중국 고대의 문학이론과 소설에 대한 논문을 썼다. 최근에는 시인의 개인적인 기억이 한시의 내용에 반영되는 방식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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