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17일 목요일

봉래 시집 蓬萊詩集

양사언 楊士彦(한국, 1517~1584)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은 조선 전기의 문인·서예가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이다. 조선 중종 12년(1517)에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했다.
그는 서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명종 1년(1546)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함흥·평창·강릉·회양·안변·철원 등 여덟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중간에 사임하고 쉰 때도 있긴 하지만, 근 40여 년간 관직에 있었다. 내직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을 외직에서 보낸 셈이다. 부임하는 고을마다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고, 안변 군수로 있을 때는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만년에 지릉(智陵) 화재 사건으로 해서(海西)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2년 뒤 풀려나서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선조 17년(1584), 68세 때의 일이다.
그는 해서와 초서에 능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 4대 명필로 일컬어졌다. 특히 큰 글씨를 잘 썼다. 금강산 만폭동 바위에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 새긴 글씨 외에도 도처에 많은 암각문이 남아 있다.
문집으로 ≪봉래 시집≫이 있으며, 별도로 ≪봉래 유묵≫이 전한다. 아우 사기(士奇), 사준(士俊)과 함께 문명을 떨쳐 중국의 미산삼소(眉山三蘇)에 견주어졌다.

해설          

≪봉래 시집(蓬萊詩集)≫은 16세기 조선의 문인이자 서예가인 양사언(楊士彦)의 문집이다. 그의 아들 만고(萬古)가 집안에 전하는 초고를 바탕으로 수집·편차하여 간행한 것이다. 편찬자의 서(序)와 발(跋)이 없어 편집 및 간행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현재 1633년경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이 전한다. 이 책에는 양사언의 아우인 양사준(楊士俊)의 ≪풍고 시집(楓皐詩集)≫과 양사기(楊士奇)의 ≪청계 시집(靑溪詩集)≫이 부록되어 있다.

≪봉래 시집≫ 분량은 3권 1책으로 총 86판이다. 부록된 ≪풍고 시집≫은 4판으로 시 21수가 수록되었다. ≪청계 시집≫은 3판으로 시 16수가 실려 있다. 규장각 소장본(규5108)이 유일한 판본으로 생각되며, 이 판본은 반엽이 10행 20자이며, 반곽의 크기는 22×16.2㎝다.

이 책에는 권1에 오언절구 58수, 육언시 2수, 칠언절구 149수가, 권2에는 오언율시 41수와 칠언율시 34수, 오언배율 3수, 칠언배율 3수와 습유(拾遺)한 시 13수가 수록되었다. 권3에는 오언고시 52수, 칠언고시 2수, 장단구 11수 이외에 부(賦)와 책(策), 발(跋)과 전(傳)이 각 1편, 기(記) 3편, 제문 2편, 서(書) 2편이 실려 있다.

양사언의 시 작품은 수필고본(手筆稿本)으로 전해진 것 외에 양만고가 산재한 작품을 일일이 수집하여 수록한 것도 적지 않다. 구체적인 사례로 <완산령을 애도함(挽完山令)>은 허봉(許葑)이 암송해 전한 것이고, <거문고 배에 쓰다(題琴腹)>는 강릉 주인집에서 얻은 것이며, <고죽 최경창에게(贈崔孤竹)>는 널리 회자하여 전하던 것이다.

봉래 양사언의 작품은 ≪봉래 시집≫ 외에 양재웅(楊載雄) 씨 소장 ≪봉래 유묵(蓬萊遺墨)≫에도 별도로 작품이 전한다. 이 책은 양사언의 자필첩책(自筆牒冊)으로 <서호별곡(西湖別曲)>, <미인별곡(美人別曲)> 두 편과 시문을 합하여 모두 14장 24면으로 되어 있다. ≪봉래 시집≫에 수록된 작품도 네 편이 실려 있다.

양사언의 시 작품을 주제별로 분류해 보면 자연·명승지 57편, 술회(述懷) 57편, 차운(次韻) 44편, 증시(贈詩) 43편, 제시(題詩) 15편, 송별(送別) 14편, 만사(輓詞) 13편, 제진(製進) 12편, 교분(交分) 10편순이다.

양사언의 시 작품은 그렇게 다양한 편은 아니다. 자연·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지은 작품과 자신의 회포를 노래한 시가 많다. 특히 회양 군수(淮陽郡守)로 있을 때 금강산을 유람하며 지은 작품이 많다. 이들 작품은 그의 풍류객으로서의 면모를 시사한다. 차운한 시편도 대개 유람하면서 정자나 관가의 현판을 보고 지은 것이다. 증시·송별시·교분시는 절친한 친구들과 화답하며 지은 것으로 적지 않다. 그가 내직에 있으면서 지은 제진시(製進詩) 12편은 관료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시사한다.

양사언은 서얼 출신으로 초년에는 주로 포천 지역에서 궁핍한 가운데 시서와 거문고를 벗하며 안빈낙도의 흥취를 즐겼다. 중년에는 강릉·고성·회양·철원 등 관동 지방의 수령으로 재임하며 선정을 베풀면서도 산수 자연을 유력하며 도가적 흥취에 몰입했다. 말년에는 선정을 베풀어 관리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한편, 도가적인 흥취에 더욱 몰입된 경지를 보였다.

양사언은 자연을 즐겨 회양 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완상했다. 금강산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여 자신의 호를 ‘봉래(蓬萊)’라 했다. 제가의 평대로 그는 이인(異人)으로 태어나 내외의 방술(方術)에 몰입하였고, 유자(儒者)이면서도 불교를 가까이 하였으며, 만년에는 선도(仙道)에 빠졌던 인물이다. 남사고(南師古)에게서 역술(易術)을 배운 바도 있다. 조경(趙絅)이 <묘갈명>에서 “처음에는 이단(異端)을 가까이하더니/ 나중에는 선도(仙道)에 빠졌도다/ 이단과 선도를 하지 않았다면/ 넉넉히 요천에 드실 텐데”라 평한 바 있다. 이 같은 인물평은 양사언이 여느 사람과 구별되는 취향을 가졌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취향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양사언은 16세기 방외인 문인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다른 방외인 문인처럼 기이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시를 짓되 이상스런 문구를 찾지 않았으며, 널리 인정될 수 있는 시를 지었다. 표현이 기발하고 탈속한 느낌이 든다는 평을 들었을 뿐이다. 시조 작품 <태산이 높다 하되∼>나, 가사 작품 <미인별곡>, 그의 한시에 나타난 도가적 경향 등은 모두 그의 남다른 출생 신분이나 환경에 기인한 것이다. <고죽 최경창에게(贈崔孤竹)>는 사람들의 입에 널리 회자되었다. <장항령(獐項嶺)>은 ≪동문선≫에도 수록되었다. 그의 <발연사 경석 위에 쓰다(題鉢淵磬石上)>와 같은 작품은 여러 시화에 인용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허균은 이를 두고 ‘선표발속(仙標拔俗)’이란 평을 남기기도 했다. <전책(殿策)>에서는 나무가 자라 말라죽지 않음이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인 것과 같이, 국가가 편안해 위태롭지 아니한 것은 선비의 기운을 부축해 배양하기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여러 번의 사화를 겪으면서 꺾인 사기(士氣)를 하루빨리 진작시킬 것을 주청하기도 했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양사언을 두고 신선과 같은 인물이라고 하고, 그 글씨 또한 그 인물과 같은데, 사람들이 그 글씨가 진속(塵俗)을 벗어난 줄은 알아도 그 시가 세상 사람의 말이 아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세속의 태를 벗어난 천진하고도 청아한 시풍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본문 중에서    

봉래산 모습을 그려내고는
세속을 향하여 시를 구하네
사람을 만나 산수를 묻거든
나의 집과 산은 말하지 말게

畵出蓬萊影
求詩向世間
逢人如有問
休道我家山

역자 소개      

처인재 주인 홍순석은 용인 토박이다. 어려서는 서당을 다니며 천자문에서 소학까지 수학했다. 그것이 단국대, 성균관대에서 한문학을 전공하게 된 인연이 되었다. 지역문화 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강남대 교수로 재임하면서부터다. 용인, 포천, 이천, 안성 등 경기 지역의 향토문화 연구에 20여 년을 보냈다. 본래 한국문학 전공자인데 향토사가, 전통문화 연구가로 더 알려져 있다. 연구 성과물이 지역과 연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동안 ≪성현 문학 연구≫, ≪양사언 문학 연구≫, ≪박은 시문학 연구≫, ≪김세필의 생애와 시≫, ≪한국 고전문학의 이해≫, ≪우리전통문화의 만남≫, ≪이천의 옛 노래≫ 등 40여 권의 책을 냈다. 짬이 나면 글 쓰는 일도 즐긴다. ≪탄 자와 걷는 자≫는 잡글을 모은 것이다.

댓글 1개:

  1. 책을 보고서 글을 달겠습니다만, 역자분도 아시듯이 양사언은, 포천 출신인데
    반월산탄금 작품에서의 반월산은 감호의 반월산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나중에 나오는 반월산 작품에서 현의 진산이 반월산이라 한 것을 보아
    양사언은 포천시에 있는, 그 반월산을 배경으로 하여 글을 쓴 것 일겝니다.
    주석이 좀 더 자세했다면 좋을텐데요.
    금주산과 운악산 둘 다 포천에 있는 산인데, 또 여긴 그런 주해는 없네요.
    중간의 왕반산은, 당송팔대가 중 왕안석을 일컫는것인데, 이것 또한 없구요.
    나중에라도 재판 할 시에는, 부탁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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