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17일 목요일

모리 오가이 단편집 舞姫 外

모리 오가이 森 鷗外(일본, 1862~1922)

모리 오가이(森 鷗外)는 1862년 현재의 시마네현(島根縣) 서부에 속하는, 옛 이름으로는 이와미(岩見) 지방의 쓰와노(津和野)라는 마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번주(藩主)의 시의(侍醫)였다. 장남으로 태어난 오가이의 본명은 린타로(林太郞)로서, 다른 아이들이 대부분 하는 연날리기나 팽이치기도 못 해보고 어려서부터 독서에 몰두해야만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훈육으로 만 다섯 살 때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 1km나 떨어진 곳에 가서 ≪논어≫와 ≪맹자≫를 배웠으며 여덟 살부터는 한적(漢籍)을 익히며, 아홉 살쯤부터는 아버지를 통해 의학 서적을 공부하기 위해 화란어와 영어를 배우는 등, 유·소년기부터 매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1872년 10살 되던 해에는 친척인 니시 아마네(西周)의 권유로 도쿄로 올라와 독일어를 배운다. 아마네는 일본 최초의 화란 유학생으로서 법률과 철학을 배워 메이지 정부에서 일했던 지식인 관료 겸 학자였다. 아마네의 집에서 5년이나 거처하며, 도쿄대학 의학부에 나이를 속여가며 입학한 오가이는 19세에 최연소로 졸업한다.

졸업 후, 육군 군의로 채용된 오가이는 1884년 스물 두 살 되는 해에 육군성(陸軍省)의 명령으로 독일에 유학하여, 위생학을 연구하는 한편 문학과 미술에도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공부에 열중한다.

1888년에 귀국하여 군의학교(軍醫學校) 교관이 된다. 그 이듬해부터는 번역시집 ≪모습(於母影)≫을 발표하는 것을 시작으로, 문(文)과 무(武)의 두 가지 길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외국의 문학 사상이나 예술 이론을 일본에 소개함과 동시에 ≪파우스트≫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번역하여 일본 문학자들을 자극하며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시, 소설, 평론, 미술, 단가, 번역 등 다방면에 걸쳐 지대한 공헌을 한 오가이는 일본 근대문학의 제일인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의학계에도 신풍을 일으키는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며 무(武)의 길에서도 육군군의학교 교장을 거쳐 군의총감이라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던 그는 1916년 35년간의 군의 생활을 마치고, 여생은 제실박물관총장(帝室博物館總長), 제국미술원장(帝國美術院長) 등으로 지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1922년 이승을 떠날 때, 일체의 세간의 명예나 칭호를 거부하며 ‘나는 이와미 태생 모리 린타로로서 죽으려 한다’고 친구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도쿄도 미타카(東京都三鷹) 선림사(禪林寺)에 있는 오가이의 유택(幽宅)에는 간단히 ‘모리 린타로 묘(森林太郞墓)’라고만 새겨져 있다. 모든 무거운 짐을 훌훌 벗어놓고 산뜻하게 저승으로 이사를 간 맑은 영혼이 느껴진다.

해설          

국내 최초 소개
∙이 책은 ≪鷗外全集≫(筑摩書房, 1988)을 저본으로 하였습니다.

이 책은 모리 오가이(森 鷗外, 1862∼1922)의 단편소설 다섯 편, 즉 1890년 발표된 일본 근대문학의 출발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 <무희(舞姬)>, 같은 해에 발표된 <마리 이야기>, 이듬해에 발표된 <아씨의 편지>, 1915년 발표된 <인신매매 산쇼 다유>와 <최후의 한마디>를 묶은 것이다.

작가 오가이(鷗外)는 19세에 도쿄대학 의학부를 최연소로 졸업하고 육군에 들어가 군의(軍醫)가 된다. 그 후 22세에 독일 유학을 떠나 위생학 공부를 하고, 26세 때인 1888년에 귀국, 군의로서 업무를 계속하는 한편 다채로운 문학 활동을 벌인다. 초기 삼부작(三部作)이라고 불리는 <무희(舞姬)>, <마리 이야기>, <아씨의 편지>는 바로 이때의 작품으로 독일이 안겨준 선물이라고도 칭해진다.

이 세 작품은 독일 생활에 젖어가는 일본인 청년들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화자(話者)로 등장하지만 내용의 중심인물은 모두 아리땁고 조숙한 소녀들이다. 19세기 말의 고풍스런 독일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들 작품에는 당시의 독일 소녀들이 갖고 있던 순수하고 애틋한 정서가 담겨 있어, 독특한 색깔의 낭만적 분위기에 잠기게도 한다.

오가이는 이 세 작품으로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었고, 일본 문단에 낭만주의를 불어넣는 데도 큰 몫을 했다. 특히 <무희>에는 작가가 유학 중에 느꼈던 실제 체험과 가슴속에 숨겨두었던 고뇌가 투영되어 있기 때문에, 근대문학의 대표 작가인 오가이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나 메이지(明治)의 청년상을 살펴보는 데에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 작품들을 통해서 국가와 개인, 봉건과 근대, 동양과 서양 등 이중구조(二重構造)의 본질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 메이지 시대(1867∼1912)를 살아가야 했던 일본 지식 청년의 전형적인 갈등을 발견할 수 있다.

<무희>의 남자 주인공 오타 도요타로는 ‘아아, 아이자와 겐키치와 같은 좋은 친구는 세상에 다시 얻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나의 뇌리에 단 하나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아직 자아가 덜 성숙된 모습으로 죄책감을 친구에게 전가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여주인공인 ‘16∼17세가량’의 소녀 엘리스는 이국 남자의 아기를 임신하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사랑의 배신을 느껴 끝내 미치고 말지만 태어날 아기를 위해 준비하고 있던 기저귀를 손에서 놓지 않는 한결같은 순수함을 보이고 있다. 남자 주인공에 비해 자아가 뚜렷한 유럽 여성이다.

<무희>와 마찬가지로 <마리 이야기>에서도 주인공 마리는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소녀다. ‘나이는 17∼18세가량 되어 보이는 얼굴이 비너스의 조각상을 무색케 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의 마리는 미술학교 모델이다. 그러나 다른 모델들과 달리 사람들에게 살갗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광녀’ 또는 ‘병신’이라고도 오해받으나 그녀는 당당하게 소리친다.

… 만약 그렇다면 세상에서 박사라고 불리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광인이었을까요. 나를 미치광이라고 매도하는 미술가들, 그네들이 미치광이가 아닌 것을 걱정해야 마땅해요. 영웅호걸, 명장대가가 되는 데에는 다소의 광기가 없고서는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세네카나 셰익스피어의 말을 빌릴 것까지도 없어요. 보세요. 내 학문이 넓은 것을. 광인이었으면 하는 사람이 광인이 아닌 것을 보는 그 슬픔, 광인이 아니어도 좋은 국왕이 광인이 되었다는 것을 듣는 것도 슬픕니다.

작가는 마리의 입을 통해 예술가들이 좋은 작품을 만들기에 몰두하지 않고, 돈이 되는 것에나 연연하는 것이라든지,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소홀하고 궁중화가의 예쁜 아내에 마음이 팔려 미치광이가 된 것 등을 야유하고 있다.

이어지는 <아씨의 편지>에서도, 백작의 딸인 주인공 이다 아씨는 부모가 정해준 귀족 약혼자가 있었으나 ‘아무리 오래 사귀어보아도 가슴에는 숯불 정도의 따뜻함조차’ 생기지 않아 결심을 하고 궁녀로 들어간다. 마음이 가는 것은 늘 아씨 곁을 숨어 지키는 운명의 소년, 피리 부는 언청이 양치기였으나, 그를 받아들일 만큼 분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지긋지긋한 문벌, 혈통 같은 것이 한낱 미신의 흙덩이’라는 것과 ‘그때까지도 부모가 맺어준 인연이면 참된 사랑을 모르고도 부부가 되는 일이 많았던 일본 풍속’에 은근히 새로운 자각을 불러일으키려는 작가 오가이의 의도가 엿보인다.

초기 삼부작에서는, 개인의 진정한 사랑을 위해 헌신하지 못하는 당시의 일본 남성이나 또는 잘못된 사회제도 및 관습 등을, 외국 여성이긴 하지만 하나같이 여주인공을 통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다. 당시의 다른 남성 작가의 작품에서는 별로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서양 문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겉모습과 생활양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하여도 정신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봉건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례없는 ‘천황’ 중심의 절대 전체정치가 행해지고 있어, 일본 서민은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에 얽매인 신세였다. 청일전쟁, 노일전쟁 등으로 계속되는 전란 속에 오가이를 비롯하여 많은 남자들은 전쟁터로 나가야 했고, 여자들은 ‘현모양처’가 더없는 미덕으로 간주되는 교육을 받고 있는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보통의 일본 여성을 그린다는 것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그렸다 하더라도 공감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남성인 작가 오가이마저도 <무희>의 남자 주인공을 통해 ‘그때까지는 다만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인물이었음을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다. 지금 25세가 되어 이미 오랫동안 자유로운 대학 분위기에 접하고 나자 마음속이 왠지 평온하지 않고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진정한 내가 점점 밖으로 나타나 어제까지의 내가 아닌 나를 나무라고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부작에 그려진 여성상은 독일 유학에서의 자각이 가져온 작가의 이상형이라고도 생각된다.

삼부작이 오가이가 20대에 쓴 것인 반면, <인신매매 산쇼 다유>는 작가의 나이가 53세 때 작품이다. 삼부작과 마찬가지로 <인신매매 산쇼 다유>와 <최후의 한마디>도 역시 어린 소녀들이 이야기의 핵심을 끌고 가는 주인공이다. 앞의 작품이 독일이 무대였던 것과는 달리, <인신매매 산쇼 다유>는 그 배경이 헤이안 시대(794∼1192)이고, <최후의 한마디>는 에도 시대(1603∼1867)다. <인신매매 산쇼 다유>는 안주가 어머니, 남동생, 하녀와 함께 쓰쿠시로 간 후 소식이 끊어진 아버지를 찾아 집을 나섰다가 인신매매에 속아 어머니와 헤어지고 동생과 함께 산쇼 다유의 저택으로 끌려와 노비가 되어 지내게 되는 이야기다. 헤어질 때 어머니에게서 받은 ‘백제(百濟)에서 건너온’ 지장보살의 금불상을 수호신으로 소중히 여기며, 그 효험을 믿는  ‘14∼15세’의 여주인공 안주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가며 동생 즈시오를 도망가게 한다. 즈시오가 태수가 되어 인신매매를 금하여 노비를 해방시키는 일이라든지 눈이 멀어버린 어머니와 애틋하게 만나는 장면에서는 작가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최후의 한마디>의 여주인공인 16세의 이치는, 운송업을 하다 약간의 속임수로 돈을 챙긴 아버지가 그 벌로 참수형에 처해질 것을 알고, 동생들을 이끌고 관헌에 나가 아버지 대신 죽여달라고 한다는 이야기다. 서양 여성인 엘리스나 마리와는 달리, 안주나 이치는 그 말씨가 차분하고 속이 상할수록 안으로 참으며, 그 표정이 냉랭함을 띨지언정 격분하여 미치거나 소리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노비가 된 신세에 안주하지 않고 조용히 참으며 때를 기다려 그 환경을 벗어나려는 마음가짐이나, 극심한 처형의 부당함에 자기희생으로서 맞서는 정신세계는 삼부작의 여주인공들과 다를 바가 없다. 희생과 헌신 속의 저항이다.

강압적인 권력에 대한 항거가 극치를 이루는 것은 <최후의 한마디>에서 “대신 죽겠다는 것을 허락한다면 너희들은 지금 당장 처형될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은 볼 수 없는데 그래도 좋은가?”라고 묻는 사또의 말에 여전히 차가운 눈빛과 차분한 어조로 “조정에서 하시는 일은 틀림이 없을 테니까요”라고 덧붙인 마지막 한마디다. 이 작품은 시련의 시기였던 ‘고쿠라좌천 시대(小倉左遷時代)’를 지나 1907년, 육군 군의로서의 최고의 지위인 육군성(陸軍省) 의무국장을 지내고 있던 작가가 1915년 11월에 퇴관(退官) 의지를 표명하기 한 달 전인 10월에 발표한 것이다. 문학가로 활동하는 동시에 관리였던 오가이로서는 당국에 대한 불평불만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최후의 한마디>는 이때의 작가의 심정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겠으나, 작금의 이 시대에도 통치기관의 양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비판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오가이는 ‘메이지 천황’의 죽음과 노기 대장(乃木大將)의 순사(殉死)에 충격 받아 한때 역사에 충실한 ‘역사 그대로’의 작품 경향도 보인 적이 있으나, 위의 두 작품은 인간을 중히 여기며, 상상력을 발휘한 ‘역사 떠나기’의 자세로 쓴 것이라 하겠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이 책에 실린 오가이의 다섯 작품은 모두 스무 살 미만의 어린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것이 공통점이다. 그녀들은 나이는 어리지만 자아가 투철하다. 귀족인 이다 아씨는 물론이고,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가련한 소녀들도 비굴한 데가 없이 고결하고 당당하다. 여리고 따뜻한 마음을 지녔으면서도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비판할 줄 아는 판단력과 함께 자기주장을 행동으로 옮기는 개성이 돋보인다. 오가이와 나란히 언급되면서 늘 비교가 되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여주인공들이 대부분 단조롭고 수동적인 것에 비해 오가이의 그녀들은 생동감이 넘치며 능동적인 것도 흥미롭다. 오가이의 긍정적인 여성관 때문일 것이다. 소설이란 여러 관점에서 감상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여주인공을 중점으로 살펴보았다.

오가이는 남성들이 지배했던 사회의 모순이나 부당한 권위 등에 대하여 현명한 여성을 그려내어 고발하고 있는가 하면, <마리 이야기>에서 보듯이, 국왕의 횡사에는 신문이나 사람들이 크게 관심을 가지고 떠들어대지만 같은 시각에 죽은 불쌍한 소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는 이가 없었다’고 꼬집기도 한다. 의사이기도 했던 작가가, 사람이 지녀야 할 순수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에 문학에 주력하며 만년의 단편에서도 여전히 티 없는 소녀들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들 작품이 오늘의 독자에게도 고전으로서 많은 사랑을 받기를 원하면서, 천재이면서도 성실한 오가이를 길러냈던 어린 날의 교양 있는 할머니와 대단히 다부졌던 어머니의 애정과 교육이 그의 여성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무희(舞姬)
마리 이야기
아씨의 편지
인신매매 산쇼 다유
최후의 한마디

옮긴이에 대해

작품 중에서     

「… されど人生いくばくもあらず。うれしとおもう一弾指の間に、口張り開けて笑わずば、のちにくやしくおもう日あらん」かくいいつつかぶりし帽を脱ぎ捨てて、こなたへふり向きたる顔は、大理石脉に熱血おどるごとくにて、風に吹かるる金髪は、首うち振りて長く嘶ばゆる駿馬の鬣に似たりけり。「きょうなり、きょうなり。きのうありてなにかせん。あすも、あさてもむなしき名のみ、あだなる声のみ」

“…그렇지만 인생은 얼마 되지 않아요. 기쁘다고 생각한 순간에 입을 크게 벌리고 웃지 않으면 나중에 억울하게 생각할 날이 있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서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버렸다. 이쪽을 향해 돌아보는 얼굴은 대리석혈관에 뜨거운 피가 춤추는 것 같았고, 바람에 날리는 금발은 목을 세차게 흔들며 길게 우는 준마의 갈기를 연상케 했다. “오늘입니다. 오늘이 있을 따름이에요. 어제가 무슨 소용 있어요, 내일도 모레도 공허한 이름뿐, 부질없는 소리일 뿐이에요.”

옮긴이         

손순옥(孫順玉)은 1968년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에 들어가 일본어를 배웠다. 1974년부터 대학원에서 일문학을 전공하기 시작하여 1975년 도쿄대학교 대학원 비교문학과에서 연구하고 돌아와, 1976년 나쓰메 소세키와 춘원 이광수의 소설 비교연구로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부터 중앙대학교에서 일본문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1994년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正岡子規의 ‘寫生’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메이지 시기의 일본 지식인과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1989년 도쿄대학교 객원연구교수를 지냈으며, 중앙대학교 일본연구소 소장 및 한국 일본언어문화학회 회장으로 활약한 바 있다. 현재 중앙대학교 일본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서로는 ≪正岡子規의 詩歌와 繪畵≫(중앙대학교 출판부, 1995), ≪子規の現在≫(공저, 增進會出版社, 일본, 2002), ≪비교문학자가 본 일본 일본인≫(공저, 현대문학, 2005), ≪조선통신사와 치요조의 하이쿠≫(한누리미디어, 2006) 등이 있으며, 번역으로는 ≪明治維新과 日本人≫(1989, 예하), ≪이시카와 다쿠보쿠 시선≫(민음사, 1998), ≪어느 날 아침 미쳐버리다(吉增剛造詩選集)≫(들녘, 2004) 등이 있다. 그 밖에도 <森 鷗外의 ‘阿部 一族’ 考察>등을 비롯한 많은 논문이 있다.

편집자 리뷰     

임신한 채로 버림받고 미쳤다고 손가락질 받아도 자신이 택한 삶에 당당한 소녀, 자신의 목숨을 던져가며 동생을 살리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기를 각오하는 소녀…. 봉건적인 메이지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의리의 소녀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오가이의 대표 단편 다섯 편을 지만지에서 처음으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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