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18일 금요일

16세기의 무신앙 문제 La problème de l'incroyance un 16 siècle

뤼시앵 페브르  Lucien Febvre (프랑스, 1878-1956)     

뤼시앵 페브르(1878∼1956)는 프랑스 동부의 낭시에서 태어나 프랑슈콩테 지방의 주도인 브장송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1899년 파리의 고등사범(Ecole Normale Supérieure)에서 수학했으며, 1911년 ≪펠리페 2세와 프랑슈콩테: 1567년의 위기. 기원과 결과. 정치ㆍ종교ㆍ사회적 연구≫로 소르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0년 스트라스부르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여기에서 평생의 학문적 동지인 마르크 블로흐(1886~1944)를 만났으며, 함께 <경제사회사 아날(Annales d’Histoire économique et sociale)>을 창간했다. 1933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프랑스 백과사전≫의 편집자가 되어 철학자 앙리 베르와 함께 꿈꾸었던 학문적 ‘종합’을 실천했다.

페브르의 주요 저서로는 ≪펠리페 2세와 프랑슈콩테≫(1912), ≪땅과 인간의 진보≫(1922), ≪하나의 운명, 마르틴 루터≫(1928), ≪16세기의 무신앙 문제≫(1942), ≪오리게네스와 데 페리에 혹은 ‘세상의 해조(諧調)’의 수수께끼≫(1942),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1944)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그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한 것들을 묶은 ≪미슐레와 르네상스≫, ≪명예와 조국≫, ≪유럽. 문명의 발생≫ 등이 출판되었다. 페브르는 자기의 잡지인 <아날>에 무려 2000여 편의 글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고 독려했는데, 그의 주요 논문들은 ≪역사를 위한 전투≫(1953), ≪16세기의 종교적 심장에서≫(1957), ≪완전한 역사를 위하여≫(1962), ≪르네상스 프랑스에서의 삶≫(1977) 등에 수록되어 있다.

페브르는 16세기 전공자로서도 국제적으로 학문적인 권위를 인정받은 대역사가이지만, 그의 명성은 현대 역사학의 흐름을 선도한 ‘아날학파’의 창시자로서 더욱 높다. 아날학파는 구조주의 역사학을 ‘새로운 역사학’으로 제시했는데, 물질적인 구조주의 역사학이 페르낭 브로델의 역사학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면, 정신적인 구조주의 역사학은 페브르의 역사학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16세기의 무신앙 문제≫에서, 프랑수아 라블레 같은 뛰어난 인물도 자기 시대의 정신적 한계(“믿기를 원하던 시대”)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주장은 바로 그 같은 구조주의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해설          

이 책의 초판은 1942년 알뱅 미셸(Albin Michel) 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옮긴이는 1962년에 출판된 책을 저본으로 삼았습니다. 두 책의 내용은 동일합니다.
이 책은 전체 분량의 약 15%를 발췌한 것입니다.

이 책은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16세기의 작가인 프랑수아 라블레가 무신론자인가 하는 구체적인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 뤼시앵 페브르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 그것은 역사학의 시작이요 끝이다. 문제가 없으면 역사가 없다”며 ‘문제사’를 제창했는데, 랑케의 역사학에서는 “사료가 없으면 역사가 없다”는 원칙이 지배했음을 상기하면,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역사학도 문제를 제기하고 증명해 나가는 과학적인 방법을 도입하여 신생 사회과학과 대등한 ‘과학’의 대열에 동참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서론 제목(<문제와 방법>)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이 책은 역사 방법론적으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우선, 이 책은 무신론 연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페브르에 의하면 라블레의 동시대인들은 심성적 도구를 결여했기 때문에 무신론자가 될 수 없었다. 서구의 지식인들이 심성적 도구를 갖추게 되는 것은, 페브르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데카르트 이후다. 데카르트에 의해 비로소 근대가 열리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수학적인 방법론은 무신론을 체계화시키는 데 동원되었다. 데카르트의 과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무신론을 체계화시킨 사람은 암스테르담의 스피노자다. 이 유태인 철학자는 ≪윤리학≫에서 그야말로 기하학인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는 이렇게, 나름대로, 신의 존재를 증명했지만, 그가 증명한 신은 기독교의 신과는 전혀 다른 “신 즉 자연”이었다는 점에서, 그는 동시대의 극단적인 회의주의자인 피에르 벨이 말했듯이 “가장 체계적인 무신론자”였다. 라블레가 무신론자라고 비난받았지만 무신론자임을 부인했듯이, 스피노자도 무신론자라고 비난받았지만 무신론자임을 부인했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가해진 무신론자라는 비난은 “믿기를 원하던 시대”의 라블레에게 가해진 무신론자라는 비난과 함의가 달랐다. 이미 그것은 근대적인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고대의 디아고라스나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 이래 역사적으로 자취를 감춘 무신론자들이 참으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본문 중에서        

La religiosité profonde de la plupart des créateurs du monde moderne : cette formule qui vaut pour un Descartes, je voudrais avoir montré qu'elle vaut d'abord, à un siècle de distance, pour un Rabelais. Et pour ceux don’t il sut traduire, superbement, la ‘foi profonde’.

근대 세계를 만든 대다수 사람들의 깊은 종교심. 나는 데카르트 같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러한 표현이 한 세기 전의 라블레에게도, 그리고 그가 ‘깊은 신앙심’을 멋지게 표현해 준 사람들에게도 어울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옮긴 이                

김응종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를 졸업했으며(1978), 프랑스 프랑슈콩테 대학교에서 뤼시앵 페브르의 역사학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1987). 1988년부터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아날학파≫(1991), ≪오늘의 역사학≫(공저, 1998), ≪아날학파의 역사세계≫(2001),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2005), ≪페르낭 브로델≫(2006)을 썼으며, 프랑수아 퓌레와 드니 리셰의 ≪프랑스혁명사≫(1990), 뤼시앵 페브르의 ≪16세기의 무신앙 문제―라블레의 종교≫(1996), 퓌스텔 드 쿨랑주의 ≪고대도시≫(2000)를 번역했다. 초기에는 ‘아날학파’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켜 사학사적인 연구에 집중했으나, 최근에는 17세기의 회의주의자들과 무신론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뤼시앵 페브르의 ‘16세기의 무신앙 문제’를 계승한 ‘17세기의 무신앙 문제’라는 주제로 연구서를 쓸 계획이다.


출판사 서평       

이 책은 16세기 작가인 프랑수아 라블레가 과연 무신론자인가 하는 구체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16세기도 21세기와 마찬가지로 ‘믿는다’ 혹은 ‘믿지 않는다’라는 모호한 명제를 가지고 고민하던 시기다. 다만 각각의 견해를 체계화할 수 있는 ‘심성적 도구’가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다. 페브르는 16세기에 논의되던 무신론에 관한 명제들을 철학, 과학, 비학 등을 발판으로 하나하나 논증하면서 무신론의 의미와 본질이 무엇인지 구명하고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